133화 개인적인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김종수가 강주혁에게 물었다.
이 길거리 싸움꾼들이 자기들끼리 별호를 붙여준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그럭저럭 쓸 만한 신입사원에 지나지 않는 윤정석도 <연남취검>이라는 그럴듯한 별호가 있으니까.
근데 그 별호가 경산마존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 세상에 그 별호를 아는 사람은 두 부류. 경산마존과 싸운 사람과 따른 사람.
당연히 전자는 경산마존을 입에 담는 것도 저주스러워한다. 단지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주혁을 죽이려고 할 정도로 증오한다.
경산마존을 자신의 별호로 삼을 정도라면 보나 마나 후자일 것이다.
“아, 팀장님은 회사 분이라서 우리 또래 사람이 별호가 있는 걸 좀 이상하게 생각하셔.”
중간에 있는 윤정석은 강주혁이 놀란 이유를 오해해서 멋대로 해명을 했다.
김종수이 피식 웃었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아, 그쪽 분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뭐, 어때요? 별명이 꼭 영감탱이들의 전유물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죠. 혹시 경산 출신입니까?”
강주혁은 경직된 얼굴을 풀고 웃으면서 물었다.
“거기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늘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죠.”
김종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했다.
“마음의 고향이요?”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예전에 이 별호를 쓰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개인적으로 그 사람 팬입니다. 존경의 뜻을 담아 별호를 이어받았죠.”
당사자는 물려주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이어받았다고 하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블랙 헌터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고 하니 그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당연하다. 아무리 정부에서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고 해도 사람들의 기억까지 없앨 수는 없으니까.
권대호는 경산마존을 알고 있는 블랙 헌터들이 거의 다 죽거나 감옥에 있다고 했으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근데 왜요?”
김종수가 따지듯 물었다.
내가 경산마존을 자청하는 데에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식이다.
“저도 알고 있거든요. 경산마존.”
“오, 진짜요? 반갑습니다. 공략회사 쪽에서는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어떻게 아신 거예요?”
“회사 선배님이 얘기해 줬습니다.”
“그래요? 그쪽 꼰대들은 잘 모를 텐데. 뭐라고 하던가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진짜 최강자라고 하더군요.”
“잘 알고 계시네요.”
“종수 씨가 알고 있는 건요?”
“저 역시 비슷합니다.”
“블랙 헌터의 수장이었다는 얘기는 없던가요?”
“아, 물론 그 얘기도 했죠.”
김종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는 윤정석도 주변에 모여 있는 다른 사람들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확실히 강주혁과 블랙 헌터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사람들하고는 온도 차가 컸다. 그들은 블랙 헌터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아마 이건 전쟁을 경험해 본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데도 경산마존을 존경하는 겁니까?”
“뭐, 어때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진짜 최강이라는 점이죠.”
“그건 그렇군요. 근데 자신 있습니까?”
“뭐가요?”
“그 별호를 계승할 만한 실력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강주혁의 말에 주변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는데도 다들 피식거리면서 웃기만 했다. 딱 한 사람, 윤정석만 표정이 어두웠다.
서걱!
“아아악!”
그때, 무리의 한복판에서 싸우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쓰러졌다.
“그만!”
김종수가 강주혁 옆으로 지나쳐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깔끔하게 끝났네. 주열이 승!”
김종수가 심판자격으로 승리를 선언했다.
“오오, 축하해!”
“멋있다!”
관중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자 승리자가 검을 번쩍 치켜들어 보였다.
“승희가 태형이 치료 좀 해줘.”
“알겠어요.”
힐러로 보이는 여성이 다가와서 패자를 치료해줬다. 승자도 다가와 패자를 부축해줬다.
“자자, 태형이한테 돈 걸었던 사람들 다 내놔.”
“젠장. 잘 좀 하지.”
“거 봐. 주열이가 더 낫다니까.”
이런 싸움판에는 늘 있기 마련인 노름꾼들도 보였다. 그렇게 싸움의 결과로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실 때쯤 다음 주자 두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잠깐만.”
그때, 김종수가 두 사람을 만류하면서 한복판에 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김종수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본 강주혁은 그가 그런 시선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손님이 왔거든.”
“손님이요?”
“어, 손님. 강남에 있는 대형공략회사에서 온 이름이…….”
김종수가 강주혁 쪽을 쳐다봤다.
“강주혁입니다.”
“맞다. 주혁 씨.”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정석이 형이 말하던 그 사람?”
“맞아. 정석 오빠가 졸라 세다고 했던 사람 있었잖아.”
윤정석은 민망한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그 사람이야. 모처럼 손님이 오셨는데 그냥 구경만 하고 가시라고 하기엔 좀 그렇잖아. 안 그래?”
“맞아. 왔으면 한 판 붙어봐야지.”
“누가 할 거야?”
“내가 해볼까?”
강주혁은 서로 자기가 나서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입꼬리를 씰룩였다.
상대의 격도 못 알아보는 코흘리개들이 호승심만 내세우는 꼴이 가당치도 않았다.
“팀장님.”
윤정석이 강주혁에게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왜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들 애들입니다. 여기 있는 힐러 친구들은 팀장님한테 입은 상처를 치료할 만한 실력이 안 됩니다. 진심으로 하시면…… 사고가 날 수도 있어요.”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강주혁은 씩 웃으면서 윤정석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이번엔 내가 할 거다.”
김종수의 외침에 떠들썩한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에이, 종수 형이 나서면 너무 싱거워지잖아.”
“맞아요. 그럼 내기를 못하잖아.”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면서 김종수를 나무랐다. 김종수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시선은 강주혁에게 향해 있었다.
강주혁은 이 쥐뿔도 모르는 풋내기들이랑 진지하게 대련에 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경산마존이라는 별호를 함부로 입에 담기에 손을 봐주려고 했는데 저런 놈이랑 싸우는 것 자체가 나잇값 못하는 짓인 것 같았다.
프리미어 리그 우승팀의 주전선수가 조기축구회에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석이가 고수라고 인정한 사람이야. 그럼 서열상 내가 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
“그건 그렇죠.”
“형이랑 정석이 형도 차이가 좀 나잖아요.”
“너 조심해. 정석 오빠한테 맞는다.”
김종수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걸 무시한 채 강주혁에게 눈짓했다.
“직접 확인해 보는 건 어때요? 제가 경산마존의 별호를 계승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그러죠.”
제안을 승낙한 강주혁은 윤정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윤정석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이었다.
“정석 씨, 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네. 팀장님. 물론이죠.”
윤정석은 자신의 망나니 칼을 빼내서 손잡이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강주혁은 칼을 몇 번 휘둘러본 후 앞으로 나섰다. 검을 주력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도(刀)도 배웠다.
“시작해 볼까요?”
김종수는 슬슬 기세를 끌어올렸다. 강주혁은 미간을 좁혔다.
‘저건?’
강주혁을 경악하게 만든 건 김종수가 가진 힘의 크기가 아니라 힘의 성질이었다.
김종수가 기세를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몸에서 피어난 검붉은 연기는 김동훈의 것과 똑같았다.
주변 사람들을 김종수가 풍기는 기운에도 불구하고 놀라지 않았다. 저런 기운이 일반적인 내공이랑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저런 기운을 뿜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놀랐어요?”
김종수가 강주혁의 경직된 표정을 보고는 히죽거렸다.
“놀랍군요.”
“자신만만하게 도발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당황한 겁니까?”
“경산마존을 자칭하는 사람이 이것밖에 안 되어서 놀랐습니다.”
윤정석이 말했었다.
자신이 속한 그룹이 풋내기들의 놀이터인 건 사실이지만 그룹의 리더는 대형공략회사의 헌터하고도 싸워서 이긴 고수라고.
김종수가 이런 길거리 싸움꾼치고는 강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주혁이 싸워본 블랙 헌터하고 비교하면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블랙 헌터랑 관계는 있지만 발을 깊숙이 담그고 있지는 않다.’
강주혁은 최근의 경험을 바탕으로 알 수 있었다.
블랙 헌터들에게는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수의 고수들을 양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아하니 김종수는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경산마존을 입에 담는 걸로 봤을 때 블랙 헌터와 관련이 있으나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뭐요?”
강주혁의 도발에 김종수가 눈을 치켜떴다.
“경산마존의 존재를 알려준 어른들이 뭐라고 안 합니까? 그 사람들에게는 교주나 마찬가지였을 텐데요. 제가 그 사람들이었다면 종주 씨 싸대기를 때렸을 겁니다.”
“허.”
김종수가 코웃음을 쳤다.
휙!
그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강주혁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촤아악!
검붉은 기운을 머금은 검이 강주혁의 목을 노렸다. 대련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위험한 검로였다.
김종수에 대한 공격 수위를 고민하던 강주혁은 덕분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서걱!
김종수는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검이 무언가를 벨 때 나는 소리가 울렸다.
강주혁은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검은 그에게 닿기 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푹!
잠시 후, 사라졌던 검이 땅에 꽂혔다. 손이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손의 주인은 한참 떨어진 곳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김종수는 땅에 꽂혀 있는 검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손을 보고는 손목 아래가 깔끔하게 잘려나간 걸 알았다.
“으아아아악!”
김종수가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았다. 그제야 손목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싸움의 과정과 결과 양쪽에 충격을 받아서 완전히 얼어있던 관중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종수 형!”
“힐러! 빨리!”
관중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김종수를 에워쌌다. 힐러들이 잘려나간 손을 손목에 갖다 댄 후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힐러들의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완전히 상실된 신체를 재생시키는 게 아니라 일종의 접합수술이었기에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영력도 많이 필요 없었고.
“정석 씨.”
“네. 팀장님.”
“잘 썼어요.”
강주혁은 윤정석에게 칼을 돌려줬다. 윤정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피가…… 안 묻었네요.”
윤정석의 말대로 사람의 손목을 잘랐는데도 칼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빨리 베면 됩니다.”
“빨리 벤다고요?”
“네. 아주 빨리.”
강주혁은 어이가 없어 하는 윤정석을 남겨놓고는 김종수에게 다가갔다. 강주혁이 다가오자 몰려있던 사람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괜찮아요?”
다행히 김종수의 손목은 제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패거리 앞에서 체면을 구긴 것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강주혁이 손을 내밀었다.
“칼이 닿지도 못했는데요.”
“닿지는 못했지만 꽤 훌륭한 검격이었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김종수는 강주혁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정석이 말이 사실이었군요. 덕분에 한 수 배웠습니다.”
김종수는 강주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 * *
그룹 사람들은 뒤풀이 자리에 함께 가기를 권했지만 강주혁은 자기가 가면 윤정석이 불편해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빠졌다.
다음 주 월요일.
강주혁은 출근하자마자 윤정석을 옥상으로 데리고 갔다.
“그 날 잘 들어갔어요?”
“네. 팀장님도 같이 가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가면 불편해할 것 같아서요.”
“우린 그런 거 없습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떠나는 사람 안 붙잡는 주의거든요.”
“느슨한 조직이다?”
“네.”
“종수 씨는 괜찮아요?”
“다들 괜찮다고 하는데도 많이 우울해했어요.”
고만고만한 떨거지들 모아놓고 대장 노릇하다가 진짜 실력자에게 단칼에 깨졌으니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울 것이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유감이군요.”
“깨져도 한 번은 비벼보고 깨졌어야 했는데 너무 처참했죠. 이번 일로 그룹이 많이 변할 것 같습니다.”
“변해요?”
“다들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깨달은 거죠.”
윤정석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룹 친구들은 거의 다 공략회사 지원했다가 떨어진 놈들이에요. 안 가는 거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못 가는 거죠. 저도 이번에 스펙 안 보고 뽑지 않았다면 태원공략 문턱에도 못 왔을 거예요.”
“종수 씨는요?”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실력은 충분할 거예요. 팀장님한테는 탈탈 털리긴 했지만, 대형공략회사 다니는 다른 헌터들은 쉽게 이겼거든요. 그런 종수 형 중심으로 뭉쳐 다니면서 우리가 공략회사 다니는 꼰대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죠.”
“종수 씨가 패배해서 충격이 크겠군요.”
“팀장님께서 우물 안 개구리들을 강제로 바다에 방류해 버리신 셈이죠. 더 이상 안 나오는 친구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의도한 건 아닙니다.”
윤정석은 딱히 원망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마주한 현실에 씁쓸해하는 것 같았다.
“정석 씨.”
“네.”
“개인적인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부탁이요?”
부탁이란 말에 윤정석은 답지 않게 긴장한 것 같았다.
“네. 그룹 활동을 더 열심히 하면서 종수 씨를 감시해줘요.”
“……?”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