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어쩐 일이야? 구두쇠로 유명한 이 사장이 술을 다 사고?”
남궁천 사장은 이윤철 사장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면서 물었다.
“구두쇠? 신입사원 시절부터 나한테 얻어먹고 다닌 사람이 할 소린가?”
“내기했다가 져서 사준 거지. 그냥 사준 것처럼 쪼잔하게 굴지 마.”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면서 히죽거렸다.
옆자리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으나 두 사람은 개의치않았다.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는 곳은 젊은 시절부터 자주 찾았던 싸구려 고깃집. 가격이 저렴해서 젊은 헌터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대형 공략회사의 사장쯤 되면 룸이 있는 고급식당을 찾기 마련이지만 두 사람은 가끔 이곳을 찾았다.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다보면 옛 시절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차리게 된 격식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대길이 놈이 없는 게 아쉽군.”
“부를까?”
“됐어. 이미 늦었잖아.”
“여기서 한잔하고 그놈 집에 쳐들어가는 건 어때?”
돈이 궁하던 젊은 시절에 자주 하던 짓이다. 부자 아버지를 둔 신대길은 그때부터 고급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았다. 술을 마실 때면 항상 마지막 장소는 신대길의 오피스텔이었다.
남궁천과 이윤철 둘이서 술을 마신 후 잔뜩 취해서 쳐들어간 적도 많았다. 빈손으로 가지만 않으면 신대길도 내쫓지 않았다. 오히려 자다가도 일어나 라면을 끓여주곤 했다.
“연희한테 쌍욕 들을 걸?”
“오랜만에 그 찰진 욕 좀 들어보고 싶은데.”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킬킬 웃었다.
세 사람의 방탕한 생활은 신대길이 주연희와 결혼하면서 끝이 났다.
눈치도 없이 신혼집에 술을 사 들고 찾아갔다가 주연희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난 이후로는 밖에서만 술을 마셨다.
오늘도 찾아가면 도도한 귀부인이 된 주연희가 소싯적처럼 걸쭉한 욕을 쏟아내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용건이 뭔데? 또 마석 매장지 얘기는 아니지?”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금세 가라앉았다.
“맞아.”
“그 얘긴 끝났잖아.”
“신광도 손을 못 쓰고 있잖아. 안 그래?”
이윤철의 지적에 남궁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태원과 대현이 공략 불가 지역에서 마석 매장지를 찾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만큼 신광의 공략 불가 지역에서 마석 매장지가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마석 매장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몬스터도 강했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지역의 환경이었다. 중간에 화산이 있고, 땅의 대부분이 용암으로 덮여 있어서 이동이 어려웠다.
간신히 다닐만한 길을 찾아도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용암 탓에 길이 없어지곤 했다.
“거긴 강주혁도 어쩔 수 없을 걸?”
남궁천도 강주혁 팀장이 대현공략과의 합동공략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용암을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 팀장이 해낸 일들 중에 쉬운 건 하나도 없었네. 그 친구 없이는 불가능한 프로젝트야. 대현도 그걸 인정했지.”
남궁천의 고민이 깊어졌다.
강주혁이 대단한 걸물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 한 사람 때문에 조 단위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마석매장지를 나눠가지긴 싫었다.
“내 대답은 지난번과 같아.”
“그럼 이건 어떤가?”
“뭐?”
“태원이랑 대현이 합동 공략 할 때 난입한 블랙 헌터들이랑 싸운 건 알지?”
“나도 들었어.”
“강 팀장이 한 놈을 포로 잡아왔는데 재미있는 얘기를 하더군.”
“무슨 얘긴데?”
“신광공략이 관리하는 지역에 자기네들 근거지가 있다는 거야.”
“뭐?”
남궁천이 입으로 가져가려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윤철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광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그 블랙 헌터들이 신광의 공략팀을 공격해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반드시 찾아내서 뿌리를 뽑아야한다.
“어딘데?”
“맨입으로 알려달라고?”
“아니, 이 양반이, 블랙 헌터는 얘기가 다르지.”
“그놈 입 여는 데 열흘이 걸렸어. 감사팀 친구들이 고생 좀 했지. 그걸 공짜로 받아 가려고? 성의 표시도 없이?”
남궁천은 이윤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윤철도 자기가 한 말이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누구야? 옆에서 바람 잡은 놈이?”
“하하, 역시 남궁 사장은 못 속이겠군.”
남궁천이 아는 이윤철은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다. 그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
이윤철은 블랙 헌터 타도와 같은 대의 앞에서 자기 회사의 이득을 따질 만큼 잇속에 밝은 사람이 아니었다.
“강주혁 팀장이라면 믿겠나?”
“그 친구는 팀장이잖아. 팀장이 사장한테 그런 얘기를 해?”
“말도 마. 얘기하는 거 보면 지금 임원 자리에 앉아 있는 양반들보다 나아. 내 복심이지.”
이윤철은 강주혁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남궁천은 속이 쓰렸다.
2년 반 전, 강주혁에게 러브콜을 보냈다가 퇴짜를 맞았던 것이 떠올랐다. 강주혁은 호의를 보이면서도 신광이 아직 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제안을 거절했다.
그 후 태원공략은 정말로 신광공략을 앞질렀고 그 중심에는 강주혁이 있었다. 남궁천은 속이 쓰리다 못해 구멍이 날 지경이었다.
제안을 했던 날, 강주혁은 신광의 정보력이 뛰어났다면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았을 거라고 말했다.
이제 남궁천도 강주혁의 혈통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만약 그때 그걸 알았더라면 강주혁의 마음을 얻었을지도 몰랐다.
“강주혁 그 친구, 누구 손자인지는 알지?”
남궁천은 이윤철을 슬쩍 떠보았다.
“알지. 나도 많이 놀랐어.”
“괜찮은 거 맞아?”
그냥 블랙 헌터도 아니고, 블랙 헌터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하는 인물의 손자다.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맞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내가 지켜본 바로는 그래. 그리고 사실.”
“사실?”
이윤철은 말을 멈추었다. 생각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감추기만 할 거야?”
이윤철은 빙그레 웃었다.
“대현공략이랑 합동 공략할 때도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공략이 끝나고 박종근 회장님이 나한테 따로 연락이 왔었어.”
“뭐래?”
“강주혁에 대해서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하더군.”
“그 공략에 종민이 녀석도 들어갔었지?”
“맞아. 강주혁 팀장이 없었다면 블랙 헌터들에게 죽었을 거야.”
“그럼 확실히 이쪽을 고른 건가?”
“그래. 이 바닥에서도 충분히 거물이 될 수 있는데 굳이 망해 버린 음지의 무리에 속할 이유가 없겠지.”
“그건 그렇지. 근데 그놈 블랙 헌터만 아니지, 속은 완전 시커매. 블랙 헌터에 대한 정보랑 마석 매장지로 딜을 하려는 건 경찰한테 범죄자의 위치를 알려줄 테니 돈 달라는 거랑 마찬가지잖아.”
“신광공략이 경찰이야?”
“정보의 성격이 그렇다는 거지. 공익을 위한 정보잖아.”
“싫으면 없던 일로 하지.”
“변했어. 이 사장. 고고한 선비 같던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됐나? 음흉한 놈을 곁에 둬서 때가 타버린 건가?”
“나더러 쓸데없이 꼬장꼬장하다고 욕하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이윤철이 물러날 줄 모르자 남궁천은 난감했다.
신광의 영역 안에 있는 블랙 헌터들이 헌터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공략 일정에도 차질이 생긴다. 그럼 회사의 주가도 같이 덩달아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마석 매장지를 찾기 위한 시도들이 번번이 실패로 끝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이윤철의 말대로 강주혁에게 해법이 있는지도 몰랐다.
“8대2.”
남궁천은 갑자기 능구렁이처럼 변한 이윤철을 째려보면서 말했다.
“8이 신광이겠지?”
“물론.”
“7대3.”
“곤란해.”
“나도 마찬가지야.”
“8대2. 대신 그쪽 헌터들 인센티브는 우리가 챙겨주지. 지급기준은 당연히 공략기여도고.”
“7.5대2.5. 대신 블랙 헌터 소탕 작전에 한 팔 거들지.”
“설마 블랙 헌터 한두 놈 가지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아마 자네와 내가 나서야 할 거야.”
“뭐? 그 정도야?”
“강 팀장이 죽인 놈들 전부 부장급이야. 그런 놈들이 수십은 있다고 하더군.”
“그게 말이 돼? 그놈들 전력에?”
“말이 안 돼지.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상대의 전력이 예측이 안 될 때는 무리를 해서라도 최고 전력으로 맞서는 게 정답이다. 태원의 지원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잠시 고민을 하던 남궁천이 결론을 내렸다.
“좋아. 7.5대2.5로 하지. 태원공략 헌터들은 알아서 챙기고. 그리고 조건이 하나 더 있네.”
“뭔데?”
“블랙 헌터 정리할 때 강주혁도 데리고 와.”
“강주혁 팀장은 왜?”
“우리 꼰대도 손도 못 댄 괴물의 손자라면서. 실력 좀 보자고.”
신태원과 동급의 실력자 아홉 명이 한꺼번에 덤벼서 겨우 한 방을 먹였다. 그 한 방을 위해 다섯 명이 죽어야했다.
남궁천은 그런 존재가 정말로 있다는 것조차 의심스러웠다. 강주혁이 할아버지의 검술을 물려받았다고 하니 그가 싸우는 걸 보면 대충 가늠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지.”
이윤철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 회사의 자랑거리를 보여줄 수 있어서 기뻐하는 것 같았다.
* * *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강주혁이 남궁천을 향해 인사했다.
“여어, 오랜만이군.”
남궁천이 손을 내밀었다. 강주혁은 정중한 태도로 손을 마주잡았다.
“젊은 사람이 늙다리 아저씨들 사이에 껴 있어서 답답하지?”
“아닙니다.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태원공략에서 다섯 명, 신광공략에서 다섯 명. 블랙 헌터 소탕 작전에 투입된 인원이다.
이 중 임원이 아닌 사람은 강주혁뿐.
블랙 헌터들의 전력이 파악이 안 된 상황이라서 공략회사의 최고전력인 사장까지 총출동한 것이다.
강주혁은 전무를 죽인 팀장으로 명성이 자자하기는 했지만, 소문만으로는 실력을 증명할 수 없었다.
강주혁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윤철과 남궁천과는 달리 다른 임원들은 강주혁의 참전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나도 잘 부탁하네.”
인사를 나눈 사람들은 곧장 웨이 포인트를 이용해 작전 지역으로 이동했다.
신광공략이 관리하는 지역들 중 최전방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앞장 서.”
문제의 지역에 들어선 후로는 포로로 잡아온 블랙 헌터가 길을 안내했다.
제법 강단이 있어 보이는 사내였지만 어째서인지 강주혁이랑 눈만 마주쳐도 귀신을 본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네. 팀장님. 이쪽입니다.”
블랙 헌터는 강주혁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일행은 블랙 헌터의 인도에 따라 미개척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조금만 헛디뎌도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가 펼쳐져 있었지만 블랙헌터는 지면이 단단한 곳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몬스터들도 종종 눈에 띄었지만, 임원급 헌터들이 뿜어내는 기세에 겁을 집어먹고는 모두 달아났다.
“다 왔습니다.”
반나절에 걸쳐서 늪지를 통과하니 야트막한 돌산이 나타났다.
“저기 위쪽에 보면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로 들어가면 됩니다.”
“다른 통로는?”
“그게 전부입니다.”
“확실해?”
“정말입니다.”
강주혁은 남궁천을 바라봤다.
신광공략 지역이기에 소탕 작전의 리더는 남궁천이 맡고 있었다.
“들어가지.”
“네. 사장님.”
일행은 블랙 헌터를 앞세우고 동굴로 들어갔다. 내부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일행은 야광석도 없이 청각과 촉각에 의존해 앞으로 나아갔다. 다들 마력을 감지하기 위해서 내공을 넓게 펼쳤다.
척!
선두에서 블랙 헌터를 앞세운 채 걷고 있던 강주혁이 블랙 헌터의 뒤로 잡아당기면서 발걸음을 멈췄다.
뒤에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멈춰 섰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공으로 서로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강주혁은 쪼그리고 앉더니 마석 채취를 할 때 사용하는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는 허공에다가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툭. 툭.
실이 끊어질 때나 들릴 법한 소리.
강주혁이 부비트랩을 작동시키는 끈을 제거한 것이다.
‘호오.’
남궁천은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아마 다른 임원들의 반응도 비슷할 것이다.
부비트랩은 사람과는 달리 마력이나 살기를 품고 있지 않다. 그래서 시각이 제한된 상황에서는 고수들도 놓칠 수가 있다.
하지만 강주혁은 이 어둠 속에서도 부비트랩의 존재를 정확하게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지 않으면서도 해체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인질로 잡힌 블랙 헌터 역시 부비트랩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았다.
척척.
작업을 끝낸 강주혁이 다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동굴을 따라서 한참을 들어가니 제법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횃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음?”
바닥에 여섯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엎드린 상태였다.
그 위에는 빨랫줄 같은 게 처져 있었고 구멍이 뚫린 천들이 널려 있었다.
강주혁은 다가가서 그것들 중 하나를 살펴보았다.
“인피면구입니다.”
바로 그 순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블랙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