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제가 전무가 되기 전에 퇴사하십시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몇 가지 청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번 공략의 결과로 대현공략이 가져가는 몫에서 1할을 제게 주십시오.”
“뭐라고?”
강주혁의 말에 박종근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이런 날강도 같은 놈을 봤나.”
권대호는 웃으면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딱히 나무라는 투는 아닌 것 같았다.
대현공략과 태원공략은 이번 공략의 결과물을 7대3으로 나눠 가지기로 합의했다. 대현공략이 7이고 태원공략이 3이다.
강주혁은 달라는 1할은 전체의 0.7퍼센트인 셈이다. 만약 마석 매장지에서 1조의 매출이 나온다면, 그중 7백억을 달라는 소리였다.
“통이 정말 크군.”
하지만 박종근 회장은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만큼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공략에서 제가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알게 되시면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박종근 회장은 강주혁의 공략기여도가 95퍼센트 이상이라는 손자의 말을 떠올렸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강주혁은 박종민의 생명을 여러 차례 구했다. 처벌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냥 손자도 아니고 가업을 물려주기 위해서 애지중지하면서 키운 장손이다. 그 장손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자신의 무지와 오해로 인해 생겨났다. 박종근은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했다.
“알겠네. 다른 요청은 뭔가?”
“태원그룹 쪽 회사들의 주식을 일부 가지고 계신 걸로 압니다.”
신태원과 박종근은 상대방 회사에 대한 주식을 일부 가지고 있었다. 회사의 위기가 닥쳤을 때 도움을 받고자 넘긴 것도 있고 상대의 몫을 빼앗기 위해 모은 것도 있었다.
값어치는 꽤 나가지만 전체에 비하면 티끌 정도라서 경영권을 위협할 정도는 안 되었다.
“거 보게. 뼛속까지 다 털어먹을 거라고 했잖아.”
권대호가 킬킬 웃었다. 박종근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강주혁을 바라보았다.
“그걸 달라고?”
“네. 회장님.”
“그걸로 뭘 어쩌려고?”
“태원그룹을 차지하고 싶습니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수십 년 동안 태원을 뛰어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지만, 그룹 순위에서 대현은 항상 태원의 뒷자리에 있었다.
근데 일개 팀장이 그 그룹을 차지하겠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한 줌밖에 안 되는 지분을 넘겨준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최고의 공략회사를 이끄는 헌터가 되고 싶습니다.”
“허허.”
박종근은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내심 강주혁의 당찬 포부가 마음에 들었다. 젊은 후배들의 패기를 지켜보는 건 대선배에게 늘 즐거운 일이니까.
그리고 강주혁이 음지에서 세상을 뒤엎으려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는 대신 양지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하는 것도 좋았다.
“태원공략이 지금은 최고이나 항상 그렇지는 않을 걸세.”
“제가 그렇게 만들면 됩니다.”
“자네 실력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실력 발휘를 꼭 태원공략에서만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신 씨 집안은 저희 집안을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처벌할 거면 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대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그 일로 저는 아버지를 잃고, 가족들은 오랫동안 고통받았습니다.”
“그래서 태원그룹을 빼앗겠다는 건가?”
“네. 집안을 망하겠으니 저도 그렇게 하려고요.”
“으하하하.”
박종근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웃긴가?”
“아이고 죄송합니다, 형님. 지금 상황이 너무 우스워서 그랬습니다. 태원 형님이 말년에 욕 좀 보시겠군요. 태원 형님도 이 친구가 이런 뜻을 품고 있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이 녀석이 벌어다 주는 돈이 너무 많아서 못 자르는 거겠지. 잘라도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셈이고. 이 녀석 부르는 곳도 많아.”
“말 나오는 김에 나도 베팅을 한번 해보겠네. 대현공략에 올 생각은 없나? 태원그룹의 주식은 물론이거니와 이번 공략에 대한 자네 몫을 두 배로 올려주겠네. 이사로 진급시키고, 대우도 그만큼 해주겠네. 나랑 함께 태원을 꺾어보세. 어떤가?”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딴 소리를 하는 건가?”
가만히 듣고 있던 권대호가 갑자기 불호령을 내렸다.
“무슨 상관입니까? 형님은 태원공략을 나오셨잖습니까?”
박종근도 지지 않고 맞불을 놓았다.
“이 양반아, 내가 태원맨으로 살아온 인생이 수십 년이야. 태원 형님이 정신 차리기를 바라면서 뛰쳐나오긴 했지만, 난 이미 거기다가 내 뼈를 묻어놨네. 이 친구를 밀어주는 것도 다 회사를 위해서야. 제대로 된 놈이 물려받아야지 회사가 잘 굴러갈 거니까.”
박종근은 역정을 내는 권대호를 보면 쓴웃음을 지었다. 권대호가 태원공략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박종근은 경영인이었다. 의리와 실리가 상충하면 언제나 후자를 따른다.
“답변할 권리는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박종근의 말에 권대호는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주혁에게 눈치를 주지는 않았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태원에 남겠습니다.”
강주혁은 예상외로 고민을 하지 않았다.
“혹시 이번 일 때문이라면 내가 다시 한번 사과하겠네. 내 불찰이었네.”
“아닙니다. 회장님. 사과는 충분합니다.”
“그럼 이유가 뭔가?”
“대현공략에서 제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위치는 박종민 팀장을 보좌하는 자리 정도겠죠. 하지만 저는 머슴이 아니라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음…….”
박종근은 강주혁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도 2년 전쯤, 신태원 회장이 송년회 자리에서 했던 폭탄선언을 들었다.
최고의 헌터에게 회사를 통째로 물려주겠다는 그 선언은 한동안 업계를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 때문에 대현공략의 몇몇 에이스들이 태원공략으로 옮겨가기도 했고.
하지만 박종근은 차마 신태원을 따라할 수 없었다. 아끼는 손자에게 그런 리스크까지 감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지금도 푸시를 많이 하고 있고, 손자가 버거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정도 압박감은 견딜 필요가 있지만, 그 이상 밀어붙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다.
박종민이 반드시 최고의 헌터가 될 필요는 없다. 아주 뛰어난 헌터정도만 되어도 회사를 이끌어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강주혁이라는 상식 밖의 존재가 나타난 이상,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절대 최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자네 뜻은 알겠네.”
머리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했지만 마음은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또?”
강주혁의 말에 박종근뿐만이 아니라 권대호까지 황당해했다.
“이번 공략에서 나온 방패를 가지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요구한 것에 비해 너무 하찮은 것이라서 한순간 귀를 의심했다.
“방패?”
* * *
강주혁은 이번 공략에 대한 보상으로 태원공략으로부터 인센티브 50억을 받았다.
공략에 참여한 모든 헌터들이 강주혁의 공략기여도를 95퍼센트 이상이라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강주혁이 공략 도중 겪었던 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미 없던 일로 하기로 합의를 봤기 때문에 공략 보고서에도 쓰지 않았다.
박종근 회장과 만나고 이틀이 지나자 강주혁이 요청했던 물건이 도착했다.
“이야, 좋겠다. 대현에서 준 거예요?”
유덕현을 포함한 공략 1부 사람들이 강주혁의 자리로 몰려들었다.
“네. 부장님.”
피라미드의 보스인 제왕의 석상이 사용하던 청동 방패. 원형에다가 별다른 문양도 없어서 상당히 심심해 보였다.
회귀 전에는 <태양의 방패>라는 이름으로 불린 아티팩트.
마력을 주입하는 즉시. 전방을 향해 강렬한 빛을 내뿜는다. 비슷한 계열의 마법이나 기술과는 달리 준비시간이 아예 없다.
이 빛은 언데드 몬스터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다. 다른 대상에게는 섬광탄을 사용했을 때처럼 일시적으로 시각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다.
효과의 지속시간도 짧고, 눈을 감으면 통하지 않지만,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는 그렇게 해서 생기는 찰나의 순간에 승패가 결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효과를 알고 있는 상대도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빛을 경계하느라 움직임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심리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퉁퉁.
“꽤 튼튼한 것 같은데.”
유덕현은 방패 표면을 두들겨 보면서 말했다.
이 방패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섬광을 뿜어내는 효과가 아니라 무식한 방어력이었다.
아무리 튼튼한 방패도 막지 못하는 공격이 하나쯤은 있는데 강주혁이 알기로 이 방패는 그런 게 없었다. 잠깐이지만 <용의 길> 끝에 있는 블랙 드래곤의 숨결을 막아내기도 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보스가 쓰던 방패거든요.”
강주혁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게다가 이 방패는 데몬의 마검처럼 리스폰이 안 된다. 아마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흔쾌히 방패를 내어준 박종근 회장도 배가 좀 아플 것이다.
“그런 귀한 걸 너한테 주는 걸 보니 이번에도 네가 다 해치운 모양이네.”
유덕현이 강주혁을 대견스러워하면서 등을 두들겼다.
태원공략이 적게 가져올 수밖에 없는 공략에서 보스의 전리품까지 받아 오는 걸 보면 그만큼 활약이 대단했다는 얘기였다.
“남들보다 살짝 더 기여했을 뿐이죠.”
강주혁은 씩 웃어 보였다.
띠리링.
그때, 강주혁의 책상에 있는 전화기가 울렸다. 강주혁이 전화를 받았다.
“공략 1부 2팀 팀장 강주혁입니다.”
“김재후 부사장이네. 할 얘기가 있으니 잠깐 올라오게.”
강주혁은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사장실로 올라갔다.
공략 끝나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이제야 연락이 온 것이다.
“어서 오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재후 부사장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강주혁도 냉랭한 얼굴로 인사했다.
“앉게.”
강주혁은 김재후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내 사과를 바란다고 했지?”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미안함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강주혁도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남의 목에 칼을 들이댄 대가치고는 싸지 않습니까?”
김재후는 강주혁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강주혁도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모든 걸 보여주지는 않고 담담히 그 시선을 견뎠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곳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죽어야 할 놈을 죽이려 했을 뿐이다. 박종근 회장님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은 못 속일 거다.”
강주혁은 코웃음을 쳤다.
“제가 누구의 손자인지 알기도 전부터 저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정의의 사도 행세를 하시니 웃기는군요. 왜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쓰고 그러십니까?”
“입조심 해라.”
“다들 블랙 헌터와 조금만 관련이 있어도 죽일 듯이 구는 게 참 이상하네요. 블랙 헌터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 공략회사 부사장으로 버젓이 있는데도 말이죠.”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저도 마지막 경고입니다.”
누가 먼저 칼을 뽑아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사과를 못 하겠다면 어쩔 텐가? 이미 박종근 회장님한테 받을 거 다 받아놓고 다시 뒤집게?”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신태원 회장님께 개인적으로 요청을 드릴 수는 있겠죠.”
이번 일에서 이윤철은 강주혁에게 주의를 주고 그를 지키려고 했다. 신 씨 집안 내에서도 강주혁에 대한 의견이 갈린 것이다.
정황상 박종근의 제안에 호응한 사람은 신대승뿐일 것이다. 신태원도 신대성도 비급의 위치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강주혁을 죽이지 못한다. 이번에도 신대승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것이다.
신태원이 이 일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강주혁이 문제를 제기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강주혁을 처리할 살수를 직접 뽑은 김재후는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꽈득.
김재후가 어금니를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이가 참 튼튼하시군요.”
“언젠가 네놈을 죽일 것이다.”
김재후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흥분하지 마시고 잘 판단하십시오. 부사장님 명줄은 제가 쥐고 있으니까요.”
김재후는 눈을 꾹 감았다. 화를 다스리느라 온 힘을 쏟고 있는 것 같았다.
“좋다. 어떻게 사과하면 되겠나?”
김재후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강주혁을 주저앉혀야 했다.
“필요 없습니다.”
“뭐?”
“마음에도 없는 사과 따윈 필요 없습니다. 저한테 뭘 해줄 수 있는지나 생각하시죠.”
김재후의 얼굴이 주전자처럼 달아올랐다.
“우선.”
말문이 막힌 김재후를 대신해서 강주혁이 입을 열었다.
“내년에 저를 이사로 만들어주십시오.”
“뭐?”
김재후는 화를 내기보다는 놀라워했다.
“임원이 되는 데에 나이 제한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실적이랑 실력인데, 실적은 이미 넘쳐나고, 실력은 간접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양준기 전무를 죽였으니 아무리 못해도 제가 부사장님 바로 밑인 것 같은데, 안 됩니까?”
“전례가 없는 일이다.”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고, 저는 돈을 아주 많이 벌어다 줬죠. 그 자리에 오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리더로서의 경력이 부족해서 안 된다.”
“안 되면 되게 만드십시오.”
“뭐?”
“같은 회사 직원을 죽일 생각도 하시면서 그거 하나 못하십니까?”
김재후는 나직이 침음을 토해냈다.
“……알겠다.”
“일단은 이 정도로 하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강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적수인 김재후에게 재갈을 물렸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김재후는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강주혁은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발걸음을 멈췄다.
“아, 그리고 웬만하면.”
강주혁은 자신의 격을 전부 드러내면서 김재후를 내려다봤다.
좀 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에 김재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제가 전무가 되기 전에 퇴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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