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실현적 예언.
예언의 실현을 피하기 위해 한 행동이 오히려 예언을 실현하게 만드는 경우를 말한다.
강주혁을 블랙 헌터로 매도하는 행위가 오히려 강주혁을 블랙 헌터로 만들 수 있다는 손자의 지적에 박종근 회장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강주혁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빠져서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강주혁이 아직 블랙 헌터는 아니었지만, 이번 일로 블랙 헌터가 되기로 결심해 버리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강주혁 팀장이 블랙 헌터가 될 수도 있겠죠.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그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박종민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박종근은 자신 앞에서 처음으로 반대 의견을 개진한 손자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원히 어린아이일 줄 알았던 손자는 어느덧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견실한 청년이 되어있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강주혁 팀장이 블랙 헌터가 아니라 우리 편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놈이 블랙 헌터가 되느냐 마느냐 뿐만이 아니다. 놈의 검술, 그걸 다스리지 못한다면 이러나저러나 괴물이 될 거야.”
“강주혁 팀장은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치열한 접전을 벌였습니다.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분명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지쳤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성을 잃거나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죠. 그는 자신의 검술뿐만이 아니라 주변 상황도 완벽하게 통제할 줄 알았어요.”
손자의 열변이 박종근의 완고한 마음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번 공략에서 기여도를 따지면 강주혁 팀장이 최소 95퍼센트는 차지할 겁니다. 그가 없었으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공략이었어요. 설사 그게 가능했다 하더라도 블랙 헌터들에게 모두 죽었겠죠.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강주혁 팀장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강주혁 팀장에게 사과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겁니다.”
박종근은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박종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강주혁 팀장이 이걸 문제 삼으면 우리는 태원공략과 전쟁을 벌여야 할 겁니다. 그전에 제가…… 감옥에 가겠죠.”
박종근은 여전히 강주혁을 제거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계획한 대로 강주혁을 처리하고 완전 범죄로 덮어버렸다면 굳이 할 필요도 없었을 고민이었다.
하지만 계획했던 일은 실패했고 지금은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였다.
“그 녀석에게 연락해서 한번 보자고 전해라.”
* * *
강주혁은 초대를 받고도 뭉그적거렸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람의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박종근 회장은 뜻을 굽히고, 고급 한정식집으로 장소를 바꿨다. 그제야 강주혁은 나타났다. 부르지도 않은 사람을 대동한 채.
룸 입구에서 개량 한복차림에 산신령처럼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나타나자 박종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호 형님!”
“박 회장. 오랜만일세. 그동안 잘 지냈나?”
권대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키가 크고 영화배우처럼 얼굴이 잘생긴 청년이 그를 따라 들어왔다.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지만 가까이에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초대도 안 했는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네. 이 녀석이 하도 졸라대서 말이야.”
권대호는 강주혁을 툭 치면서 말했다.
“제가 언제 졸랐다고 그러십니까? 비싼 밥 얻어먹겠다고 따라나선 건 스승님이잖아요.”
“스승님?”
박종근은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얘기하자면 좀 기네. 일단, 앉지.”
권대호는 초대한 사람이 권하지도 않았는데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은 넓었지만, 세팅이 된 자리는 둘밖에 없었다. 권대호는 박종근의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태원공략의 강주혁 팀장입니다.”
강주혁은 박종근 회장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박종근은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권대호가 눈치를 주자 마른기침을 했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네. 어서 앉게.”
박종근은 직원을 불러서 테이블 세팅을 하나 더 해달라고 했다.
“박 회장이 쏘는 거지?”
권대호가 물었다.
“공짜 밥 좋아하시는 건 여전하시군요.”
“남이 사주는 밥을 먹으니 더 건강해지는 것 같아. 장수의 비결이지.”
“근데 강주혁 팀장하고는 무슨 관계입니까?”
“박 회장이 들은 대로야. 이 녀석이 나한테 주먹질하는 법을 배우고 있지.”
박종근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이 친구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
“그걸 알고도 권법을 가르치신 겁니까?”
“물론이네.”
박종근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아는 권대호는 누구보다도 블랙 헌터들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뭐가 그리 급한가. 오랜만에 얼굴을 봤는데 밥도 먹고 술도 한 잔 걸치면서 느긋하게 얘기하세. 주문부터 하지.”
권대호는 식당에서 제일 비싼 코스 요리를 골랐다.
“너는?”
“저도 그걸로 하겠습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른들이랑 맞먹으려고 하는구나. 내가 너만 할 때는 김밥 한 줄로 때우고 그랬다.”
“여기는 그런 거 없잖아요. 저도 이걸로 주세요.”
박종근은 얼이 빠진 얼굴로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루이틀 알고 지낸 사이로 보이진 않았다.
전채로 나온 요리들을 몇 점 먹을 때까지 권대호는 의도적으로 강주혁에 대한 얘기를 피하면서 신변잡기를 늘어놓았다.
박종근도 궁금증을 억누른 채 근황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박 회장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잘 아네. 나 역시 그 점을 우려하고 있지.”
권대호가 본론에 들어간 건 술을 한 잔씩 마신 후였다.
“본인도 걱정하고 있고. 그래서 내게 도움을 청한 거야.”
강주혁은 말없이 음식만 먹고 있었다.
“네가 얘기할 테냐?”
“무슨 얘기요?”
“무슨 얘기긴. 네 할아버지 얘기지.”
“제가 얘기하면 모양이 빠지잖아요. 이왕 오신 거 저 대신 해주세요.”
“쯧, 시건방진 녀석 같으니.”
권대호는 혀끝을 차면서도 강주혁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권대호는 경산마존이 지방으로 내려간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차근차근 얘기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과거를 저주스러워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힘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는지를.
경산마존은 자식에게 검술을 전수해주되 그것을 극복할 방법으로 곁가지들을 창안해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하지만 끝끝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아들은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촌구석에 처박혀있어야 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까?”
박종근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저 얘기를 해준 사람은 강주혁일 것이다. 강주혁의 말만 듣고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일단 끝까지 한번 들어보게.”
권대호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야기는 신대성이 블랙 헌터의 꾐에 넘어가 강 씨 집안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대목에 이르렀다.
“대성이가? 정말로 대성이가 그랬다는 겁니까?”
박종근은 화들짝 놀랐다.
경산마존이 죽은 후에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로 강 씨 집안이 쫄딱 망했다는 얘기는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을 신대성이 벌였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그래. 대성이는 그렇게 사고를 쳐서 어수선한 틈을 타서 경산마존의 검술이 담겨있는 비급을 빼돌렸지. 그걸 익혀서 대길이를 그렇게 만든 거야.”
박종근은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면서 그림이 만들어진 기분이었다.
신대성이 신태원의 아픈 손가락이라는 건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어릴 때부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버지의 반만 해도 욕을 먹지는 않았을 텐데 신대성은 업계의 평균 수준에 간신히 미칠 정도의 둔재였다.
그랬던 신대성이 아버지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천재 신대길을 꺾었다. 다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전까지의 행보만 놓고 보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신대성이 경산마존의 검술을 익혔다면 설명이 된다.
“신태원 형님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네.”
“도대체 왜?”
“경산마존의 검술에 대한 욕심 때문이겠지. 못난 자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아비의 심정일 수도 있고.”
박종근은 강주혁을 처단해야 한다고 했을 때 신태원이 보인 반응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형님이 회사를 떠난 것도 그 일 때문이었습니까?”
“그래. 아버지와 아들 둘 다 단단히 미쳐서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더군.”
“그랬군요.”
“어쨌든 이것보다 중요한 얘기는 따로 있네.”
권대호는 강주혁의 아버지 강민혁이 집안이 몰락한 후 어떻게 살았는지를 얘기했다.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아버지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수를 포기했던, 그렇게 쌓인 한을 견디지 못해 화병으로 죽어간 남자의 이야기.
박종근은 강주혁을 힐끗 봤다. 계속해서 가벼운 모습을 보이던 그는 어두운 낯빛으로 음식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놈은 다르네.”
권대호가 무심한 듯 강주혁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다르다고요?”
“경산마존의 검술을 어렸을 때부터 쓰고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작용을 경험한 적이 없네. 이 녀석의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준비를 해 온 것 같아. 부작용이 생길까 봐 검술도 아주 천천히 가르쳤지.”
박종근의 눈을 치켜떴다.
“경산마존과 이 녀석 아버지의 평생 과제는 그 검술을 안전하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었네. 비록 두 사람은 성공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대신 이 녀석의 안에 싹을 심어놓는 데에는 성공했지.”
“그랬군요.”
“이 녀석이 블랙 헌터가 될 수도 있다는 걱정도 안 해도 되네. 누구보다도 그놈들을 증오하니까.”
박종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진실을 듣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녀석의 힘이 꼭 필요하네.”
“대성이 때문입니까?”
“그래. 물증이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네만, 그놈은 분명 블랙 헌터랑 놀아나고 있을 거야.”
“그 녀석이 제2의 경산마존이 될 수도 있겠군요.”
“맞아. 그놈들이 바라는 게 그거지.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될 존재. 그리고 그놈은 경산마존과는 달리 스스로를 억제할 생각도 안 하겠지.”
박종근은 침음을 흘렸다. 그 역시 신대성이 마음속에 어떤 어둠을 품고 있는지 잘 알았다.
아버지의 명성과 주변의 과도한 기대 때문에 일그러진 삶을 살았다. 동생들과 비교를 당하면서 마음속에 열등감과 분노를 쌓아왔을 것이다. 신대성이야말로 블랙 헌터가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도 큰 사람이었다.
“대성이는 절대 그 검술을 다스리지 못할 거야. 재능도 미천할뿐더러 마음도 맑지 못하지. 안타깝지만 사실일세.”
“근데 왜 하필 대성이일까요? 경산마존의 그릇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대성이가 물려받을 태원그룹의 재력과 영향력이 탐났던 거겠지. 녀석의 뒤틀린 마음도 그렇고. 대성이의 재능이 미천하기는 해도 이미 대길이를 꺾지 않았나. 어쩌면 놈들이 우리가 못 본 걸 봤을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대성이가 괴물이 되었을 때 그놈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녀석뿐이라는 거야.”
권대호가 강주혁의 등을 두드렸다.
박종근은 죄책감과 자괴감 탓에 강주혁을 보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그릇을 가진 사람이었다.
“강주혁 팀장.”
“네. 회장님.”
박종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강주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하네. 자네에게 몹쓸 짓을 했네.”
“괜찮습니다. 회장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주혁은 든든한 우군이 생긴 걸 기꺼워했다.
“내 손자 녀석을 살려줘서 고맙네.”
강주혁은 블랙 헌터들을 처단함으로써 박종민의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그를 사회적으로 끝장내버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보상을 받고 싶다고 했었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모두 해주겠네. 한번 말해보게.”
다시 자리에 앉은 박종근 회장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박 회장.”
갑자기 권대호가 끼어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지금 한 말 후회하게 될 거야.”
박종근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이놈이 얼마나 지독한 날강도인지 알게 될 걸세.”
권대호의 말에 박종근 회장의 시선이 강주혁에게 향했다. 그는 마치 보상 얘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씩 웃어 보였다.
박종근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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