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기회를 드리죠
전투가 끝났다.
일행은 계속되는 전투로 치유 물약이 고갈되었지만 블랙 헌터들이 가지고 있던 걸로 보충할 수 있었다.
상처는 모두 치유되었고, 의식을 잃었던 사람들은 모두 깨어났다.
퍽! 퍽! 퍽!
“큭! 끄윽!”
의식을 차린 이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된 건 블랙 헌터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있는 강주혁이었다.
“배후는?”
입에 복면을 쑤셔 넣어 놓은 탓에 블랙 헌터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대신, 강주혁은 메모지와 펜을 꺼내 그의 앞에 던져놓았다. 손을 풀어놓기는 했지만 그는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블랙 헌터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퍽!
강주혁은 블랙 헌터의 복부에 사정없이 발차기를 날렸다.
“크윽!”
블랙 헌터가 배를 움켜잡고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강주혁이 블랙 헌터를 고문하는 동안 장하민은 깨어난 사람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공격했다고요? 강 팀장님을?”
보스와의 전투가 끝나자마자 살수 삼인방이 강주혁을 공격했다는 말에 김재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 알고 있으니까 시치미 떼지 마세요. 과장님도 한통속이잖아요.”
장하민이 쏘아붙였다.
김재현은 굳은 얼굴로 박종민을 바라보았다. 박종민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강주혁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고, 살수들은 행동에 옮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실패했고 오히려 강주혁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강 팀장님.”
박종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박종근 회장이다.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이곳에 온 박종민은 이 일의 책임자나 마찬가지였다.
강주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얼굴에 튄 피를 쓱 닦았다.
박종민은 그 모습에 공포심을 느꼈다.
‘진짜 무지막지하구나.’
석상, 보스, 살수, 블랙 헌터. 다른 사람들이 중간에 돕기는 했지만 거의 혼자서 다 처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쉬지도 않고 강적들과 싸웠지만 강주혁은 다치기는커녕 지치지도 않았다. 그사이에 대다수의 일행은 한 번씩 치명상을 입었다.
박종민은 강주혁이 명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을 적대시하지 않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팀장님에 대해서 오해를 했습니다.”
박종민은 강주혁에게 허리를 굽혔다.
강주혁은 싸늘한 눈빛으로 박종민을 노려보았다. 박종민은 죄인의 심정으로 그 시선을 견뎠다. 다른 사람들도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살려는 드리죠.”
이제 다들 알고 있었다.
강주혁이 혼자서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다는 걸.
“하지만 법적인 책임은 지셔야합니다.”
강주혁의 말에 장하민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던전에서의 살인 미수는 중죄다. 형량이 어떻게 되는지를 떠나서 헌터 업계에서는 영구제명이다.
“……알겠습니다.”
박종민은 답했다.
블랙 헌터들에게도 나름의 정의가 있다. 헌터와 블랙 헌터를 나누는 기준은 세상의 질서 즉, 법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블랙 헌터 타도를 외치면서 법을 따르지 않는 건 자가당착이다. 일행은 강주혁을 매도한 것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져야만 했다.
“장 대리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저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강주혁의 물음에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싸우면서 나눈 대화 때문에 이미 들통이 났다. 더 이상 발뺌할 수가 없었다.
“저는 아닙니다.”
최석도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부사장님한테 얘기 다 들었으니까 헛소리하지 마요.”
구자연이 힐난하자 최석도는 하얗게 질려서는 강주혁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 일은 공식적으로 문제 삼을 테니 다들 그렇게 아세요. 일단 공략부터 마무리하시죠.”
강주혁은 제단으로 다가갔다. 그의 우려와는 달리 제단을 그를 폭주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내공이 아찔할 정도로 치솟기는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현상이 없었다.
“이번 제단은 무슨 능력일까요?”
장하민이 물었다.
강주혁은 대답 대신 주변에 쌓여 있는 모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잘게 빻은 가루 같던 모래가 뭉쳐지더니 색깔이 변하면서 딱딱한 덩어리가 되었다.
“물체를 더 딱딱하게 만드는 능력 같군요.”
강주혁은 모래를 뭉쳐서 만든 돌멩이를 집어 보이면서 말했다.
“엥? 딱히 써먹을 때가 없을 것 같은데요?”
장하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래폭풍과 눈보라를 밀어낼 정도로 강한 바람을 만드는 능력이나, 언제 어디서든 신선한 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비하면 쓸모없어 보이긴 했다.
“석화의 저주로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메두사나 바실리스크처럼?”
둘 다 눈을 마주치는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을 가진 몬스터였다. 이 능력을 사람에게 쓰면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 한번 시험해 볼까요?”
강주혁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블랙 헌터를 보았다.
“읍! 끄읍!”
강주혁이 다가오자 블랙 헌터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저주는 회사에서 풀어 주도록 하죠.”
“끄윽!”
강주혁은 블랙 헌터를 산 채로 석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행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이제 마석 매장지를 찾아볼까요?”
제단이 있는 방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일행은 일단 그곳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계단은 그리 깊지 않았고 그 끝에는 그들이 찾던 마석 매장지가 있었다.
“마석 매장지예요!”
앞장서서 가려던 장하민을 강주혁이 붙잡았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과 마석 매장지로 보이는 지역 사이에는 모래사장이 있었다.
“왜 그러세요?”
강주혁은 대답 대신에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땅에 떨어져 있는 돌덩이를 집어서 모래사장에 던졌다.
사사삭.
모래가 마치 늪처럼 돌덩이를 빨아들였다.
“뭐죠?”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들어가면 꼼짝없이 빨려 들어갈 겁니다.”
강주혁은 모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래가 뭉쳐지면서 딱딱한 돌로 변했다. 그 돌을 이어가니 일종의 돌다리가 되었다.
“와.”
일행은 강주혁의 임기응변에 탄성을 자아냈다.
“갑시다.”
강주혁은 일행을 마석 매장지로 이끌었다.
마석 매장지는 설원 한복판에 있었던 마석 매장지보다 규모가 컸다.
하지만 기뻐하는 사람은 강주혁과 장하민뿐이었다.
* * *
돌아가는 길은 순탄했다.
피라미드로 갈 때는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을 지나야 했는데 이제 그것들을 딱딱한 돌바닥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일종의 포장도로가 생긴 덕분에 이동속도가 배로 향상되었다.
일행은 차분하면서 침울한 분위기 속에 행군을 계속했다. 농담은커녕 제대로 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조 단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마석 매장지를 발견했으면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굴어야 하는데 다들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라도 된 것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석상이 된 블랙 헌터는 최석도가 짊어졌다.
“박종민 팀장님.”
사막을 벗어나기 직전 강주혁이 박종민을 불러 세웠다.
“네?”
“기회를 드리죠.”
“기회요?”
다들 초조한 눈빛으로 강주혁을 바라봤다.
“제가 이번 일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으면 다들 쇠고랑을 차야 할 겁니다. 팀장님은 회장님이 손을 써서 처벌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다른 분들은 어려울 겁니다. 구자연 팀장님도 중간에 저를 돕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번 일을 알리지 않았으니 문제가 될 겁니다.”
다들 침통한 표정으로 강주혁을 봤다.
“여러분에게 개인적인 악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 혈통과 검술 때문에 그러셨겠죠. 그래서 한 번만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여러분들에게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의 주동자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적절한 보상을 해야겠죠.”
강주혁이 말한 주동자란 박종근 회장을 뜻한다. 할아버지의 뜻을 꺾어 강주혁에게 사과하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도의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박종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원공략 쪽에도 주동자가 있겠죠.”
강주혁은 구자연을 바라봤다.
“그, 그건…….”
“이유와 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부사장님은 자기 회사의 헌터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팀장님을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기는 하겠지만 부사장님의 사과와 보상은 받아야겠습니다.”
“……알겠어요.”
구자연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보상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박종민이 물었다.
“그건 주동자들과 얘기하도록 하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가 이 일을 문제 삼지 않더라도 장하민 대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 안 그럴 거예요. 걱정 마세요.”
당황한 장하민은 고개를 저었다.
“장 대리한테도 침묵의 대가가 필요하겠죠.”
강주혁은 박종민과 구자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대, 대가요?”
장하민은 그제야 강주혁이 말하는 의도를 깨달았다. 이번 일을 함구하는 대가로 챙길 수 있는 건 챙기라는 얘기였다.
장하민은 유일하게 매수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전투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었지만, 그녀의 존재는 구자연의 변심에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강주혁을 죽이고 사고로 처리하려면 장하민도 같이 죽여야 했으니까.
강주혁이 보기에 구자연은 타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양심과 정의감은 있었으니까. 아마 이번 일도 악을 미리 처단한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가담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강주혁을 죽이기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장하민을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자신들의 명분이 퇴색되어 버리니까.
강주혁은 의도치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장하민에게 나름의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박종민과 구자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석도 대리.”
“네?”
“이번 일과 별개로 명령 불복종에 대한 징계는 피할 수 없을 겁니다.”
* * *
박종근 회장의 저택.
“어떻게 된 거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들어온 박종민에게 박종근 회장이 물었다.
이미 공략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강주혁에 대해서도.
“죄송합니다.”
박종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일단, 앉거라. 다친 곳은 없고?”
“네. 피곤한 것 빼고는 괜찮아요.”
박종민은 자리에 앉았다.
“어려운 공략이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나도 소식은 들었다. 마석 매장지가 그렇게 크다며?”
“네. 어림잡아도 1조는 넘을 것 같아요.”
회사 입장에서는 엄청난 희소식. 하지만 박종근 회장의 굳은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강주혁은 어떻게 된 거냐?”
“애초에 불가능한 작전이었어요.”
“뭐?”
“할아버지가 붙여준 세 사람도 전혀 상대가 안 되더군요.”
“너랑 재현이는?”
“그 전에 보스랑 싸우다가 기절하는 바람에 돕지도 못했어요. 근데 저희가 합세를 했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태원공략 놈들이 초를 치지만 않았다면…….”
박종근은 분노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미 구자연과 장하민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다.
“구자연 팀장이 중간에 뒤통수를 치기는 했지만 그것도 변수가 되지는 못했어요. 제가 장담하건대, 태원공략 사람들까지 모두 합세했어도 강주혁 팀장을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박종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는 게냐?”
“우리와 교전했던 블랙 헌터는 하나하나가 할아버지가 붙여준 세 사람보다 강했어요. 강주혁은 그런 자들과 10대 1로 싸우고도 전혀 밀리지 않았어요. 제가 거들기는 했지만 아마 장기전으로 들어갔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박종근은 굳은 얼굴로 듣기만 했다.
“그리고…….”
박종민은 말을 뱉으려다가 삼켰다.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건 그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에라도 잘못을 바로잡아야 했다.
“이 임무는 처음부터 잘못된 거 같아요.”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아니요. 저도 판단할 수 있어요.”
박종근은 놀랐다. 매사에 순종적이었던 손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뜻에 반대했으니까.
“강주혁 팀장은 블랙 헌터랑 싸웠습니다.”
“우릴 속이기 위한 자작극일 수도 있다.”
“자작극이요? 우리가 싸운 블랙 헌터가 하수들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은 하나하나가 공략회사에서 최소 부장 자리에 앉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작극을 위해 그런 인재를 희생시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블랙 헌터가 인원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말문이 막힌 박종근은 복잡한 표정으로 손자를 바라보았다.
“블랙 헌터는 강주혁 팀장을 회유하거나 죽이기 위해 파견된 거예요. 강주혁 팀장은 단칼에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고, 한 명 빼고 모두를 죽였죠. 아무리 생각해도 강주혁 팀장이 블랙 헌터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딱 한 가지 경우 빼고요.”
“한 가지 경우?”
“우리가 낙인을 찍어서 계속해서 블랙 헌터랑 엮으면 정말로 그렇게 할 수도 있겠죠.”
박종근은 놀란 눈으로 손자를 바라보았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