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죽더라도 허락받고 죽어
“으악!”
“김 팀장님!”
비명소리와 전투의 소음이 기절해있던 박종민을 깨웠다.
“으, 으윽…….”
정신을 차린 박종민을 가장 먼저 맞이한 건 뒤통수의 통증이었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뒤통수가 욱신거렸지만 덕분에 몽롱한 정신을 털어낼 수 있었다. 그는 이내 자기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재현아!”
김재현은 박종민 앞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의식은 없었지만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분명히 가슴팍이 뚫렸었는데 지금은 멀쩡했다. 제때 치유를 받은 것이다.
안도의 숨을 내쉰 박종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는 최석도가 쓰러져 있었다. 그 역시 기절한 상태. 전투복의 무릎 아래쪽이 전부 뜯겨져 나가서 꼭 반바지를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리가 멀쩡한 걸로 봐서 절단이 되었다가 회복한 것 같았다.
챙! 캉!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전투가 한창이었다. 강주혁이 검은 복면을 쓴 헌터들과 10대 1로 싸우고 있었다.
‘맙소사.’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주혁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열 명을 압박하고 있었다. 장하민이 근처에서 알짱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큰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았다.
벽 한쪽 구석에는 구자연이 살수 삼인방을 치료하고 있었다. 다들 절단이나 그에 준하는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구자연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치유를 하고 있었으나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다. 영력이 고갈되었는지 치유가 더디고 효과도 약했다.
자신과 김재현을 한 방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던 석상은 몸통이 부서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좀 전에는 저 보스와 싸우고 있었다. 보스와의 전투가 끝났을 때를 노려 강주혁을 공격한다는 게 박종민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강주혁을 잡기 위해 동원된 삼인방은 전투 불능이 된 상태고, 강주혁은 정체불명의 괴한들과 싸우고 있었다.
뻑!
“꺄악!”
그때, 강주혁을 돕기 위해 복면인들에게 덤빈 장하민은 그들 중 한 명에게 걷어차였다. 그녀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박종민 바로 앞에 떨어졌다.
“끄윽…….”
장하민은 복부를 잡고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괜찮아요?”
장하민은 찡그린 얼굴로 박종민을 바라보았다.
“으으, 정신 차렸으면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요.”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사람들은 뭐예요?”
“블랙 헌터들이에요.”
“예?”
박종민은 혼란스러웠다.
블랙 헌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강주혁을 죽이려고 했는데 정작 강주혁은 블랙 헌터와 싸우고 있었다.
‘차라리 잘된 건가.’
박종민은 처음부터 이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강주혁은 썩 괜찮은 사람 같았으니까.
여기까지 오는 내내 이 일의 정당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편집증적인 증오와 두려움을 꺾지 못한 걸 후회했다.
강주혁의 활약을 보면 볼수록 불안감과 공포감은 더해졌다. 정당성조차 의심스러운 일인데 가능성까지 희박해지니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강주혁이 블랙 헌터와 싸웠으니 이 일을 포기할 명분이 생겼다. 박종민은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팀장님도 빨리 도와요. 여기서 죽기 싫으면.”
“알겠습니다.”
박종민은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하민 역시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
박종민의 손에 맺힌 마나가 살을 에는 듯한 냉기를 띠었다. 그는 그것을 예리한 창으로 만들어서 블랙 헌터에게 던졌다.
장하민도 함께 투척했다. 둘이 말을 맞춘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한 사람에 공격이 집중되었다.
캉!
하지만 타깃이 된 블랙 헌터는 보지도 않고 아이스 스피어와 내공이 잔뜩 담긴 단검을 검으로 쳐내버렸다.
여러 개의 석상을 단번에 무너뜨린 아이스 스피어가 얼음 조각이 되어서 흩어졌다.
‘강하다.’
멀리서 보고 있어서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블랙 헌터 하나하나가 엄청난 고수였다. 할아버지가 붙여준 세 명의 살수들보다 더 강한 것 같았다.
저들에게 제대로 피해를 주려면 더 강력한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강주혁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 게다가 블랙 헌터들이 그걸 기다려줄지도 의문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박종민은 저런 고수들을 상대로 혼자서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강주혁을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어디서 저들이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강주혁이 무너지는 순간 여기에 있는 모두가 학살당할 거라는 점이다.
어떻게든 강주혁을 도와야 했다.
“에잇!”
단검 공격이 통하지 않자 장하민은 다시 한번 블랙 헌터에게 달려들었다. 박종민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무모한 행동 같았다.
* * *
“물러서요!”
강주혁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장하민에게 외쳤다. 그녀는 멈춰 섰다.
예전에 비해서 실력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 블랙 헌터들과 싸울 정도는 아니다.
실력 차이가 워낙 커서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좀 전에도 강주혁이 제때 방해하지 않았다면 블랙 헌터가 장하민을 죽였을 것이다.
‘귀찮게 됐네.’
강주혁은 얼굴을 굳혔다.
블랙 헌터들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방심한 틈을 이용해 리더로 보이는 자의 손모가지를 날려버리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나머지 아홉 명이 파상공세를 퍼붓자 강주혁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 사이에 리더는 치유 물약을 이용해서 잘려 나간 손을 재생시킨 후 합세했다.
아마 블랙 헌터들 역시 답답한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럿이서 맹공을 퍼붓는데도 강주혁의 철옹성 같은 방어를 뚫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방어를 뚫지 못하는 게 아니라 강주혁에게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한 명이라도 그렇게 했다가는 동료들이 위험해진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강주혁이 적들에게 묶여있는 것처럼 적들도 강주혁에게 묶여 있는 것이다. 덕분에 일행들은 대부분 전투 불능 상태임에도 안전할 수 있었다.
‘구 팀장님도 한계인 것 같군.’
블랙 헌터들의 수준은 대현공략 삼인방보다 살짝 높은 정도였다. 삼인방이 합세해 준다면 금방 우세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삼인방은 강주혁에게 입은 부상이 너무 심해서 쉽게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치명상을 연달아 치유한 탓에 구자연의 영력도 바닥이 났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건 불구가 되지 않도록 응급처치를 해주는 정도. 다시 싸울 수 있도록 활력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부상이 덜했던 김한수는 물약으로 상처를 치유한 후 강주혁을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상처가 덜 아물어서 그런지 금방 빈틈을 노출했고, 부상을 입고 다시 나가떨어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수준 차이가 워낙 커서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딱 한 명, 조건부이긴 하지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있었다.
‘센스가 있기를 바라야지.’
강주혁은 홀 한구석에 있는 문을 확인했다. 원래는 쇠창살로 막혀 있었지만 제왕의 석상이 파괴된 후 쇠창살이 없어졌다.
저 방안에는 제단이 있다.
제단이 품고 있는 것은 대지의 힘. 바람의 힘이 청룡검을 강화시켜 준 것처럼 대지의 힘은 동류인 백호검을 강화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플랜 B다. 제단의 힘을 함부로 받아들였다가 지난번처럼 폭주할 가능성도 있다. 내공의 양이 적을 때도 미쳐 날뛰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일행은 또다시 강주혁을 경계하고 불신하게 될 것이다.
강주혁이 생각하는 플랜 A에는 일행의 기지가 필요했다.
“장 대리님, 여긴 제가 맡을 테니까 전부 데리고 저 방으로 가요!”
강주혁은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면서 장하민에게 외쳤다.
“네?”
“시키는 대로 해요! 어서!”
“알겠어요!”
장하민이 먼저 쇠창살이 사라진 문으로 들어갔다. 부상자들을 끌고 들어가기 전에 확인을 하려는 것이다. 강주혁이 기억하기로 문 안에는 어떤 위험 요소도 없었다.
블랙 헌터들은 그녀를 보고도 따라갈 생각을 못했다. 조금만 공세를 늦췄다가는 강주혁에게 죽게 될 테니까.
잠시 후, 다시 나온 장하민은 박종민, 구자연과 함께 부상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용쓰는군. 네놈 다음엔 저놈들 차례가 될 거다.”
블랙 헌터의 리더가 말했다. 강주혁은 대답 대신 리더에게 파고들었다.
캉!
“크윽!”
강주혁과 검을 맞댄 리더는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곧바로 부하들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강주혁은 무리하지 않고 뒤로 빠졌다.
그런 식으로 치고 빠지고를 반복하면서 슬금슬금 문 쪽으로 이동했다. 일행은 이미 부상자들까지 데리고 문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강주혁 역시 일행을 따라서 문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촤아악!
바로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블랙 헌터들이 동시에 검강을 뽑아내 강주혁에게 날렸다. 붉은빛의 칼날 열 개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마침 문틈을 지나가고 있던 강주혁은 피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그런 척을 했다.
“큭!”
강주혁은 검강을 동시에 맞고는 뒤로 날아갔다. 사실, 때맞춰 백호금강갑을 사용했기에 피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강주혁은 일부러 큰 피해를 입은 척을 하면서 뒤로 나뒹굴었다.
“쳐라!”
블랙 헌터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방안으로 몰려들었다.
콰콰콰!
바로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끝이 뾰족한 우박들이 쏟아져 내렸다.
박종민이 시전한 블리자드 스톰이었다.
준비 시간도 길고 마나도 많이 들기 때문에 탁 트인 곳에서 쓰면 맞추기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비좁은 통로 앞에 깔아놓으면 맞을 수밖에 없었다.
블랙 헌터들이 강주혁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트릭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제기랄!”
블랙 헌터들은 호신강기를 이용해 우박을 막거나 검으로 그것들을 쳐냈다.
강원설귀의 손자가 전력을 기울여 만들어낸 서리 폭풍조차 그들의 방어를 완전히 뚫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우박은 새하얀 냉무(冷霧)가 되어 그들을 집어삼켰다. 차디찬 한기가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강주혁은 박종민을 향해 눈짓을 했다. 박종민은 마나의 과용으로 파리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사인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해줄 거라고 믿고 미끼를 자처한 건데 다행히 제대로 호응해줬다.
강주혁은 우왕좌왕하고 있는 블랙 헌터들에게 달려들었다. 박종민은 시전을 중단했다.
쾅! 콰르르.
강주혁이 발을 구르자 방 내부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으윽!”
“뭐야!”
백호지진보가 흔들어놓은 세상에서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강주혁뿐이었다. 그는 그 상태에서 백호맹돌격을 사용했다.
총알처럼 쇄도한 강주혁이 신형이 블랙 헌터를 덮쳤다. 이전이라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블리자드 스톰과 백호지진보로 인해 굳어버린 몸으로는 피할 수가 없었다.
컥!
블랙 헌터를 방패로 들이받은 강주혁은 그대로 벽을 향해 돌진했다.
콰직!
“컥!”
벽과 강주혁 사이에 끼어버린 블랙 헌터의 몸이 으깨져 버렸다. 강주혁은 곧장 다음 타깃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컥!”
여전히 블리자드 스톰과 백호지진보의 영향 아래에 있는 블랙 헌터들이 강주혁의 무자비한 칼날에 쓰러져갔다.
열 명이 있어야지만 간신히 대적할 수 있는 강적이다. 한 명이 죽자마자 블랙 헌터들은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스걱!
“으아아아악!”
최후의 2인 중 한 명이 피를 뿜었다. 남은 건 리더뿐.
“네 할아버지가 저세상에서 통탄할 거다.”
리더는 최후의 발악을 위해 검을 들었다.
하지만 강주혁은 그게 자신을 향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강주혁은 들고 있던 검을 집어던졌다.
휙!
리더는 자신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검이 없었다. 강주혁이 던진 검이 손목을 또 한 번 날려버린 것이다.
“어?”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으아아, 읍! 끄읍!”
뒤늦게 비명을 지르려고 하는데 목이 막혔다. 단번에 리더의 복면을 벗겨낸 강주혁이 그걸 목구멍에 쑤셔 넣은 것이다.
그래서 혀를 깨물지도, 입안에 숨겨놓은 독약을 사용하지도 못했다.
“죽더라도 허락받고 죽어.”
강주혁은 이놈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