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이게 내가 이어받은 유지다
양손으로 들어도 버거워 보이던 곽도운의 도끼가 앙증맞은 크기로 변했다.
엄밀히 말하면 도끼는 그대로인데 덩치가 두 배로 커지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도끼가 작게 보이는 것이다.
곽도운은 등에 메고 있던 도끼 하나를 더 꺼내 쌍도끼로 강주혁을 압박했다. 덩치가 커진 만큼 도끼를 더 쉽게 다뤘다.
챙! 캉!
거대한 배틀 엑스를 마치 손도끼처럼 휘두르는 거인의 맹공을 강주혁은 검 한 자루로 모두 막아냈다.
탁탁탁!
곽도운이 강주혁을 묶어놓는 사이, 늑대인간으로 변한 이성일이 빙 돌아서 강주혁의 뒤를 노렸다.
차고 있던 갈퀴는 벗어버린 후 갈퀴보다 더 크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강주혁을 노렸다.
휘릭!
하지만 강주혁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옆으로 굴러서 손톱을 피했다. 갑자기 강주혁이 빠지는 바람에 곽도운과 이성일은 서로 부딪칠 뻔했지만, 제때 멈춰 섰다.
옆으로 굴러간 강주혁은 제왕의 석상이 사용하던 방패를 주워들었다. 그러곤 방패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번쩍!
“큭!”
방패에서 뿜어져 나간 강렬한 빛이 곽도운과 이성일을 잠시 움츠리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성급하게 공격을 시도하거나 막무가내로 반격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어?”
빛에 익숙해진 눈으로 다시 공격에 들어가려는 찰나, 이성일은 뭔가가 허전한 걸 느꼈다. 오른팔이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었다.
“크르륵.”
이성일이 신음을 흘렸다.
강주혁은 피가 묻은 검을 한 바퀴 돌려서 피를 털었다. 잘려나간 오른팔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장 대리, 물러서요!”
“조심하세요!”
구자연과 장하민은 안개로 변한 김한수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강주혁을 공격하려던 김한수는 구자연이 계속해서 보호막으로 강주혁을 지켜주자 타깃을 바뀌어 그녀를 노렸다.
안개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육화해서 공격해 들어오는 김한수를 상대로 구자연과 장하민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난감하게 됐네.’
원래는 구자연을 포함해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상대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지 않고 굴복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검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구자연의 변절로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꼬여버렸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렇게 되면 강주혁의 의도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혹시나 구자연과 장하민이 김한수에게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저쪽이 좀 바쁜 것 같아서 그런데 빨리 끝내시죠.”
강주혁이 곽도운과 이성일을 도발했다.
이성일의 잘려나간 팔이 빠른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곽도운과 이성일이 동시에 쇄도해왔다.
합을 나눠본 결과, 두 사람은 확실히 양준기에 비해서 한수 아래였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둘만으로는 강주혁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강주혁은 오른발을 들어서 내공을 모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땅을 힘껏 디뎠다. 다리를 훑고 내려간 내공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쾅!
돌바닥이 박살나면서 돌무더기가 치솟았다.
사신무극검 1형 3식.
백호지진보(白虎地震步).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지면에 소규모 지진을 일으킨다.
범위 내에 있는 적들은 자세를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게다가 몸으로 전해진 진동은 적의 내상을 유발하고 몸을 느려지게 만든다.
콰르르.
강주혁은 두 사람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홀 전체가 뒤흔들렸다.
곽도운과 이성일은 곧바로 비틀거렸다. 자세를 잡기 위해 멈춰선 채 다리에 힘을 실었다. 간신히 넘어지는 것은 피했지만 강주혁의 움직임은 놓치고 말았다.
서걱! 스걱! 서걱!
싸움의 기본은 어떻게 발을 디디느냐에 있다. 바닥을 흔들어 하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니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방어를 할 수가 없었다.
강주혁은 종횡무진하면서 무방비상태의 두 사람을 난도질했다.
“젠장!”
“죽어라!”
두 사람은 마구잡이로 팔과 무기를 휘두르면서 저항을 했으나 디디고 있는 지면이 불안정한 탓에 공격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크윽.”
다리를 타고 전해진 진동이 몸을 흔들어 대서 움직임도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장기들이 비명을 질러대었다.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거인의 힘도 야수의 속도도 무의미해졌다. 강주혁은 여유 있게 피하면서 두 사람은 농락했다.
“컥!
“크헉!”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파상공세를 당하는 것 같았다. 강주혁은 빈틈이 생겼다고 마구잡이로 베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상처를 쌓아갔다.
상처는 피부가 상대적으로 연하고, 약한 부분에만 생겼고,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싸우지 못할 만큼 깊었다.
거인과 야수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무너져내렸다.
서걱! 스걱!
“으아아악!”
거인의 팔과 다리가 하나씩 날아갔다.
두꺼운 피부도 강주혁의 참격을 버틸 수는 없었다.
퍽!
“큽!”
재생 능력이 있는 야수에게는 발차기를 날렸다. 백호지진보의 힘이 담긴 발차기는 속을 진탕시키는 동시에 그를 벽에 처박아 버렸다.
“쿠억!”
극심한 내상을 입은 이성일은 피를 왈칵 쏟아내면서 허물어져 내렸다.
힘이 빠지자 몸에서 털이 사라지고 머리도 인간 형태로 돌아왔다.
“으으으.”
팔과 다리를 잃은 곽도운도 원래의 체격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건 안개로 변하는 능력이 있는 김한수뿐. 그는 만신창이가 된 구자연과 장하민을 내버려 두고는 안개 상태로 강주혁에게 접근했다.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강주혁은 자신을 에워싼 안개를 보면서 말했다. 섬뜩한 살기가 사방에서 느껴졌다. 모든 방향에서 살기가 느껴져서 어느 쪽으로 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안개 상태로는 공격할 수도 없다. 공격을 하려면 몸의 일부나마 인간 형태로 돌아와야 한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강주혁은 공기의 미묘한 떨림을 감지하고는 그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크아아악!”
허공에 떠 있는 팔에서 피가 왈칵 솟구쳤다. 손과 검만 고체화시켜 강주혁의 뒷목을 베려고 했는데 강주혁이 갑자기 돌아서면서 손목을 그어 버린 것이다.
주변을 둘러싼 안개가 빠르게 한 지점으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농밀하게 뭉쳐진 안개가 사람의 형상을 취하려는 찰나, 강주혁이 검을 내질렀다.
푹!
“큭!”
김한수는 사람으로 변하자마자 어깨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비, 빌어먹을…….”
왼쪽 어깨와 오른손목에 심한 자상을 입은 김한수는 무기를 제대로 휘두를 수도 없었다.
강주혁의 대처법은 특별하지 않았다. 구자연도 장하민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속도의 차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들이 반응하는 속도는 김한수가 안개 상태에서 인간 상태로 변신하는 속도보다 느렸다. 하지만 강주혁은 반대였다.
구자연과 장하민이 김한수에게 속도로 압도당한 것처럼 김한수는 강주혁에게 속도로 압도당한 것이다.
“이제 그만하시죠.”
강주혁이 김한수에게 말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동료들을 살폈다. 곽도운과 이성일 모두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것 같았다.
김한수 혼자서 싸워봤자 결과는 뻔했다.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는 괴물에게 이런 상태로 덤비는 건 자살 행위다.
“죽여라.”
김한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를 죽이려고 한 놈은 반드시 죽인다는 게 저의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를 두려고요.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좋은 뜻에서 이러시는 거라고 믿습니다.”
김한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강주혁은 구자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두 사람부터 부탁드립니다.”
강주혁은 특히 상태가 안 좋은 곽도운과 이성일을 가리켰다.
“알겠어요.”
구자연이 그들에게 달려갔다. 강주혁은 김한수에게 다가가 치유 물약을 건넸다.
“저는 블랙 헌터가 아닙니다. 앞으로 될 일도 없고요. 제 할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검술의 위험성도요.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김한수는 굳은 얼굴로 강주혁을 바라보기만 했다.
“빨리 치료해요. 손님들이 있으니까요.”
“뭐? 손님?”
강주혁은 김한수의 손에 치유 물약을 얹어놓고는 그를 지나쳤다.
“구경만 하지 말고 슬슬 나오시지.”
승강기 쪽의 어둠 속에서 일행을 지켜보고 있던 열 명의 헌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전투복에 검은색 복면. 전형적인 블랙 헌터의 복식이었다.
피라미드로 들어오기 전부터 강주혁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자들이었다.
“누, 누구?”
일행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들은 저들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수준이 높다는 뜻이다. 다들 부상이 심해서 강주혁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과연 마존의 혈통이군요. 어떻게 우리가 있다는 걸 알아본 겁니까?”
복면인들 중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이 말했다.
“블랙 헌터 특유의 악취를 풍기는 데 모를 리가 있나.”
“당신도 우리랑 같은 냄새를 풍깁니다. 알고 있습니까?”
강주혁은 대답 대신에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기운을 끌어올렸다.
“보아하니 출신 성분 때문에 곤란을 겪으신 것 같군요. 마침 잘 됐습니다.”
복면인은 강주혁의 기세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향해 걸어왔다.
광활한 광야에서 강주혁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탐색 범위를 이 사막에만 국한시켜도 어렵다. 만약 사막에 진입할 때부터 미행을 했다면 진즉에 눈치를 챘을 것이다.
김동훈 때도 그렇지만 블랙 헌터들에겐 강주혁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방법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강주혁은 그게 몹시 거슬렸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면 이런 일을 더 자주 겪게 될 겁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랑 손을 잡는 게 어떻습니까?”
복면인이 강주혁 바로 앞까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 세상을 당신 같은 존재를 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편협하고 좁습니다. 저런 소인배들은 절대로 거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랑 함께 조부님의 유지를 이으시죠.”
강주혁은 복면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강주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김동훈은 블랙 헌터였다.
그놈은 자신이 신대성에게 먼저 접근했다고 했다. 강 씨 집안을 망하게 하고 비급을 빼앗자고 꼬드긴 것이다.
강주혁의 가족들이 겪은 비극의 뿌리는 신대성이 아니라 블랙 헌터다. 할아버지의 정체를 알게 된 후 강주혁은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마존의 재림.
그들은 할아버지처럼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구심점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마존으로 활동했던 과거를 후회하고 저주스러워했다.
블랙 헌터들은 김동훈을 보내서 아버지를 꼬드겼다. 아버지는 숱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유지를 이어갔다. 심지어 힘이 있으면서도 복수조차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업보를 짊어지고 사그라지는 걸 택했다.
블랙 헌터들은 강주혁에게는 접근하지 않았다. 어쩌면 주작검 하나만 알고 있다는 걸 알고는 내버려 둔 것인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들은 신대성을 새로운 마존으로 만들 생각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블랙 헌터들이 신대성과 함께 반드시 멸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네놈들과 한통속이었다는 걸 평생토록 저주스러워하셨지.”
둘 사이에 섬광이 번쩍였다.
서걱!
선혈이 낭자하면서 강주혁에게 내민 복면인의 손이 날아올랐다.
“으, 으아아악!”
복면인이 손이 잘려나간 오른팔을 보면서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이게 내가 이어받은 유지다.”
강주혁이 피가 묻은 칼을 들어 보이면서 악마처럼 웃어 보였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