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끈기가 중요합니다
“당했다!”
“힐러!”
“여기 좀 도와줘요!”
샌드 레이스에게 포위당한 일행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한심하긴.’
강주혁은 그들을 보면서 혀끝을 찼다.
최석도, 장하민, 박종민, 김재현은 상대적으로 젊으니까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네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정도 경력이면 샌드 레이스 정도는 가볍게 퇴치할 수 있어야한다.
“으아아악!”
강주혁은 저들이 자신에게 실력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샌드 레이스에게 얻어맞으면서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구자연을 보고는 저들의 공포와 혼란이 진짜라는 걸 깨달았다.
“무기에 물을 적셔요!”
강주혁이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외쳤다.
샌드 레이스의 육신은 모래 그 자체. 물리 공격이 거의 안 통한다.
내공을 실어서 공격을 하더라도 내공의 매개인 칼날이 상대에게 닿아야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샌드 레이스의 육신은 칼로 베는 순간 흩어져 버리기 때문에 칼에 실린 내공만이 미약한 피해를 준다.
공격력에서 물리 공격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샌드 레이스에게 줄 수 있는 피해가 적어지는 것이다.
심장부 역할을 하는 마석도 몸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파괴하기 어렵다.
서걱!
하지만 물을 부어서 모래에 점성이 생기게 만들면 얘기가 달라진다.
덩어리져서 더 이상 흩어지지 못하는 샌드 레이스는 그저 그런 하급 몬스터에 지나지 않는다.
스걱!
“꺼져! 이 쓰레기들아!”
강주혁이 시키는 대로 한 일행들은 무난하게 샌드 레이스를 잡아내기 시작했다. 애초에 전투력으로는 샌드 레이스에게 당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잠시 후, 모래폭풍이 지나가면서 전투가 끝났다.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있어서 그렇지 심하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여러 차례 공격을 허용한 것 치고는 피해가 경미했다. 샌드 레이스의 공격력은 상급 헌터들에게 위험한 수준이 못 되기 때문이다.
“다들 샌드 레이스는 처음이신 모양이군요.”
유일하게 멀쩡한 강주혁이 입 한쪽을 올리면서 말했다.
“이놈들 이름이 샌드 레이스였나요? 저는 처음 보는군요.”
박종민이 변명조로 말했다.
“저도 싸워본 건 처음입니다.”
“그럼 어떻게?”
“아카데미에서 배웠습니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도 사실이지만 회귀 전에는 직접 싸워보기도 했다.
그때도 아카데미에서 배운 내용을 떠올려서 제대로 대처했었다.
“아, 맞아. 아카데미 수업 때 들었지.”
“나도 기억난다.”
박종민과 김재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싸워본 몬스터들만 잘 잡는다. 발견된 모든 몬스터들을 상대해 보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경험의 부족함을 보충해 주는 건 이론이다. 하지만 취업해서 일에 치이다 보면 학교에서 배운 걸 쉽게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강 팀장님에게 한 수 배웠네요.”
대처법만 제대로 알면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몬스터 때문에 호들갑을 떨었던 헌터들은 얼굴을 붉혔다.
그날 저녁.
“구 팀장님. 우리 차례입니다.”
강주혁이 잠들어 있던 구자연을 깨웠다. 불침번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아, 네. 고마워요.”
구자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강주혁은 이미 무장까지 갖춘 상태였다. 언제 봐도 빈틈이 없는 사람이다.
나이는 장하민 다음으로 젊은데 일행들 중 가장 노련한 것 같았다.
“그럼 부탁할게요.”
“잘 자요.”
앞 차례였던 장하민과 이성일은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강주혁이 구자연에게 물었다.
“나쁘진 않아요.”
“다행이군요.”
강주혁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구자연은 원래부터 김재후 부사장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입사했을 때 김재후 부사장이 그녀의 팀장이었다.
거칠고 야비한 구석이 있지만 유능하고 부하를 아낄 줄 아는 리더였다. 구자연은 김재후를 따르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부사장이 된 후로도 김재후는 구자연을 각별히 아꼈고 그녀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강주혁을 처리해 주게.’
그런 김재후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한 건 이번 공략에 참여하는 게 결정된 직후였다.
구자연은 이유를 물었다.
‘그놈은 블랙 헌터의 자식이야.’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최강의 블랙 헌터가 있었고, 그자의 손자가 강주혁이다. 김재후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꼭 도시 괴담 같았다.
하지만 강주혁의 비정상적인 강함과 성장 속도를 알고 있는 구자연에게 그 이야기는 꽤나 그럴듯하게 들렸다.
‘블랙 헌터의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인다고요?’
‘그놈은 자기 할아버지의 검술을 계승했어.’
그러면서 그 검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설명해 주었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동시에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궁극의 검술.
‘그럼 정부에 알려서 공식적으로 대처를 하면 되잖아요.’
‘아직 법적으로 문제 될 만한 짓을 안 해서 그건 어려울 거야. 감시 정도만 할 수 있겠지. 그리고 회장님도 문제야.’
‘회장님이요?’
‘회장님뿐만이 아니라 사장님도 강주혁을 아껴. 회사에 큰돈을 벌어다 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두 사람 모두 그놈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지.’
‘이걸 저한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알면서도 묻는 거지?’
구자연의 아버지는 블랙 헌터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들에 대한 뿌리 깊은 적개심을 품고 살았다.
그건 실체가 없는 증오심이기도 했다. 블랙 헌터들은 이미 몰락해 버렸으니까. 고수들은 모두 감옥에 있고, 잔챙이들은 범죄자로 전락해 음지에서 숨어 지냈다.
블랙 헌터들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죽일 가치도 없을 만큼 비루한 놈들이니까. 그래도 만약 그런 놈들 중 하나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반드시 찢어죽이고 말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다.
‘일이 잘못되면 제 인생도 끝나는 거네요.’
회장의 비호를 받고 있으며, 법적으로 아무 잘못도 없는 헌터를 죽인다?
그럼 구자연이 범죄자가 된다.
‘걱정 마.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대현그룹의 박종근 회장의 생각이니까.’
‘박종근 회장이요?’
‘그래. 강주혁의 조부와 싸우고 살아남은 다섯 사람 중 한 명이지. 강주혁이 위험해지기 전에 처단하자는 건 그 사람 생각이야.’
‘설마 이번 합동 공략도?’
‘맞아. 강주혁을 잡기 위한 덫이지. 대현공략 측에서 만반의 준비를 할 거야. 구 팀장은 가서 숟가락만 얹으면 돼.’
그래도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이게 도의적으로 옳은지, 정말로 뒷감당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강주혁이 자기 할아버지랑 비슷한 수준이 되면 아무도 못 막아. 서른에 별호도 있는 전무를 죽인 놈이잖아. 그리고 그놈뿐만이 아니라 블랙 헌터들도 문제야. 강주혁이 이름을 떨치면 그놈을 중심으로 다시 뭉치려 하겠지. 그럼 또 전쟁이 일어나는 거야.’
김재후는 계속해서 구자연의 마음을 흔들어댔지만, 그녀는 그가 별로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김재후가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아마 자기 자리가 위태롭기 때문일 것이다.
신대성의 퇴진과 양준기의 죽음으로 이득을 본 건 신대승이 아니라 신대길이었다.
신대길은 부회장으로서의 지위를 탄탄히 다져가고 있었다. 장애로 인해 헌터가 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그를 대신해서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이윤철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윤철을 손을 잡고 태원공략에 들어온 강주혁이 훗날 이윤철의 뒤를 이어 신대길을 보좌할 거라는 추측을 내놓곤 했다. 아니면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한 신대길의 외동딸이 그 역할을 하거나.
어느 쪽이든 신대승과 김재후에게 미래는 없다. 특히, 김재후의 경우 바로 밑에 있던 양준기 전무가 강주혁에게 죽어 나가면서 더 큰 위협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를 위해서 강주혁을 죽이자는 대현그룹의 제안은 김재후에게 새로운 돌파구로 여겨졌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죠?’
‘한 명은 내가 설득할 수 있어. 강주혁 때문에 고생을 좀 한 놈이거든.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어려울 거야.’
구자연은 김재후가 회유하지 못한 사람을 잠시 내려다봤다. 장하민은 침낭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이윤철 사장이 마석 매장지 발견 경험자가 강주혁 외에도 한 사람 정도 더 있는 게 좋다면서 붙여준 사람.
김재후나 신대승하고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고, 강주혁하고도 꽤 가깝게 지내는 것 같아서 설득이 불가능했다.
김재후는 자신이 못한 일을 구자연에게 맡겼다. 그녀는 강주혁을 처단하기 전에 장하민을 가담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면 입을 막기 위해서 그녀를 죽여야 한다. 구자연은 그렇게 될 경우 자신이 블랙 헌터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직 결정된 건 없어.’
김재후에게는 알겠다고 했지만 구자연은 선뜻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 * *
일행은 이틀 동안 건빵과 육포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우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가장 큰 어려움인 더위와 식수는 제단의 힘을 이용해서 해결할 수 있었기에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방향을 알려준 건 나침반이었다. 나침반은 지구에서처럼 던전 안에서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기에 안전한 길잡이가 될 수 있었다.
강주혁은 대현공략의 정찰팀이 지도에서 특이사항이 있다고 표시를 해둔 곳부터 우선적으로 살펴보자고 했다.
“다 왔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에 벽돌을 깔아서 만든 단이 있었다. 단 한복판에는 꼭 세숫대야처럼 생긴 석판이 솟아 있었다.
“모래 폭풍이 이쪽으로는 안 온 모양이군요.”
주변에는 땅이 파헤쳐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딱 봐도 뭔가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 오는 곳. 대현공략의 정찰팀이 삽질을 열심히 했지만 안타깝게도 나오는 건 없었다.
강주혁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세숫대야처럼 생긴 석판을 향해 걸어갔다.
“장 대리님.”
“네. 팀장님.”
“이거 기억나요?”
“음. 글쎄요.”
장하민은 볼을 긁으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으나 답을 내놓지 못했다.
“두 번째 제단이 있는 곳에는 마석 매장지가 감춰져 있었습니다. 제단의 힘을 이용해야지만 들어갈 수 있던 곳이었죠.”
“오! 맞아요! 그때도 이런 게 있었어요. 물을 넣으면 비밀 통로가 나오는. 와, 역시 팀장님! 어떻게 한 번 보고 아셨어요? 2년이나 지난 일인데.”
“수수께끼 푸는 걸 좋아하거든요.”
강주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석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물을 생성해서 흘려보냈다. 물은 세숫대야의 하수구(?)부분으로 흘러들어 갔다.
“거기다가 물을 집어넣는 건 우리 쪽 헌터들도 해봤습니다.”
박종민이 말했다.
세숫대야처럼 생기고 물이 빠지는 구멍까지 있으니 누구나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었다. 그가 건넨 지도에도 물을 흘려 넣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양이 충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양이요?”
“사막에서 가장 필요한 건 물입니다. 대현공략의 헌터님들도 여기까지 오는 데 꽤 많은 물을 소모했을 겁니다. 돌아가는 걸 염두에 둔다면 더 쓰기 어려웠을 겁니다.”
“물을 충분히 붓지 않았다는 건가요?”
“네. 기껏해야 미량이었겠죠. <용의 길>에서 다음 제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전 제단의 힘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이 사막 한복판에서도 무한한 물을 만들어낼 수 있죠.”
“물을 더 많이 부으면 된다는 겁니까?”
“그럴 겁니다. 두 번째 제단의 힘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니까요.”
일행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물도 넘쳐나는데 한번 해볼까요? 세 분만 저 좀 도와주시죠. 나머지 분들은 경계를 서주시고요.”
일행은 강주혁을 명령에 따랐다.
박종민, 이성일, 곽도운 팀장이 강주혁을 돕고 나머지 사람들은 경계를 섰다.
네 사람은 석판에다가 물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맞을까요?”
10분이 경과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박종민의 얼굴에 불신의 표정이 떠올랐다.
“조금만 더 해보죠.”
강주혁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 후로도 다시 10분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에게 이 힘이 없었다면 팀원 전부에게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을 겁니다.”
강주혁의 고집을 부리자 이성일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이 힘이 있어서 내린 결정입니다.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계속해 보시죠.”
다시 10분의 시간이 흘렀다.
“바보짓은 이 정도로 충분…….”
참다못한 곽도운이 성질을 부리려는 순간, 땅에서 강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뭐, 뭐지?”
일행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모두 조심해!”
일행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강주혁은 느긋하게 반응을 기다렸다.
쏴아아!
단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모래가 볼록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파도처럼 흘러내렸다.
“저건 뭐야?”
땅속에서 거대한 피라미드가 솟아올랐다.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와 비슷한 수준의 크기였다.
“맙소사.”
일행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던전에서는 말입니다.”
강주혁이 손에 있는 물기를 털어내면서 덧붙였다.
“끈기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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