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그래도 하겠습니다
“오랜만이네. 부회장님.”
신대승이 룸으로 들어오면서 인사했다.
“잘 지냈어?”
신대길은 자리에 앉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잘 지내는 걸로 보여? 아주 죽을 맛이다.”
신대승이 툴툴거리자 신대길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신대승은 2년 반 전, 태원전자에서 태원미디어 사장으로 좌천된 이후 줄곧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에 신대길은 신대성과 신대승의 좌천 덕분에 부회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형은 안 오지?”
“아마 그렇겠지.”
“그 시커먼 양반은 산골에 틀어박혀서 도대체 뭘 하는 거야?”
“글쎄.”
신대길은 물로 목만 축일뿐, 말을 아꼈다. 자신을 불구로 만든 큰형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사람이니까.
작은형인 신대승과는 가끔 통화를 하곤 했지만 신대성하고는 일이 있을 때만 비서를 통해 연락하고 직접 말을 섞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것도 10년 전이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만날 일이 생기면 자리를 피해버렸다.
오늘도 신대성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나온 것이다.
“박종근 회장님이 왜 불렀는지는 알아?”
이번에는 신대길이 물었다.
아버지와 오랜 지기인 박종근은 삼 형제에게도 친근한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장성한 지금은 각자의 위치 때문에 예전처럼 살갑게 대할 수 없었다.
“몰라. 우리가 한가한 꼬맹이들이 아니라는 걸 알 테니까 얼굴 한번 보자고 부르진 않았겠지.”
그때, 룸 안으로 박종근 회장이 걸어 들어왔다.
“잘들 지냈나.”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신대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신대길도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박종근이 말렸다.
“됐네. 무리하지 말게.”
신대길은 앉은 채로 인사를 했다.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지. 자네들은?”
“저희도 잘 지냈습니다.”
“잘 지내기는. 서로 싸우느라 정신없지?”
박종근은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두 형제는 쓴웃음만 지었다.
“형님도 참 지독한 양반이야. 아무리 옥석을 가리기 위해서라지만 형제들끼리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들고 말이야.”
헌터 업계를 이끌어갈 천재 소리를 듣던 신대길이 큰형에게 패배했다. 싸움의 승패도 충격이었지만 그 여파만큼은 아니었다.
신대길이 불구가 되어 헌터를 그만둔다는 소식에 헌터 업계의 원로들은 하나 같이 신태원을 비난했었다.
“근데 어쩐 일이십니까?”
성격이 급한 신대승이 물었다.
“성격이 급한 건 여전하구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식사부터 하자꾸나. 여기 음식이 꽤 괜찮다.”
세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자신들의 근황이나 업계의 동향 같은 얘기를 나눴다.
박종근이 본론을 꺼낸 건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내가 남의 집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할 입장은 아니네만, 이건 자네들도 알아야 할 사항인 것 같네.”
신대승과 신대길은 술잔과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박종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박종근은 경선마존의 존재와 강주혁이 그의 손자라는 얘기를 했다. 그의 검술을 계승했다는 것도.
“그러니까 그놈이 우리 어머니를 죽인 인간의 손자라는 건가요?”
신대승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물었다. 신대길은 침통한 얼굴을 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네.”
“우린 그동안 그냥 블랙 헌터랑 싸우다가 돌아가신 줄만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죽었다는 얘기는 안 해주셨거든요.”
“나와 자네 아버지는 경산마존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겠다고 정부랑 약속했었네.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비밀로 한 거지.”
“그놈을 내버려 두면 안 되겠군요.”
강주혁을 건드렸다가 곤욕을 치른 일이 있는 신대승이 으르렁거렸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네.”
“연좌제를 적용하자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신대길은 찬물을 끼얹었다.
“나도 그 아이에게 할아버지의 죄를 물을 생각은 없네. 그 힘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을 때를 대비하자는 거지.”
“저희를 찾으신 걸 보면 아버지는 반대하셨나 보군요.”
“부정하진 않겠네.”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미래에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젊은이를 죽인다고요? 도의적으로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강주혁이 자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어서가 아니고?”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강주혁이 이윤철의 손을 잡고 태원공략에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네. 그리고 그 친구의 활약 덕분에 반사이익으로 자네가 부회장이 되었지.”
“그런 사사로운 이득에 연연할 정도로 속이 좁지 않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네. 이번 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전혀 없네. 잔악무도한 영감탱이라는 악명만 얻겠지. 그래도 나는 이 일을 해야겠네. 그 아이가 가진 위험성을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네.”
“지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강주혁을 건드리면 태원에 전쟁을 선포하시는 걸로 간주하겠습니다.”
“대길아!”
신대승은 막 나가는 동생에게 호통을 쳤으나 신대길은 듣지 않았다.
“저녁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신대길은 전동휠체어를 조정해 자리를 떴다.
* * *
신대길의 자택.
똑똑똑.
누군가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네.”
문이 열리고 신다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가도 돼?”
“아, 다은이구나. 들어와.”
“무슨 일이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고.”
신다은은 가지고 온 찻잔을 아버지에게 건넨 후 의자에 앉았다.
“미안. 많이 피곤하지?”
“오늘은 사무실에만 있어서 괜찮아.”
“회사 일은 어때?”
“좋아.”
“우리 딸 입에서 일하는 게 좋다는 말을 듣는 게 익숙해져 버렸네. 참 이상한 일이야.”
고지식한 성격 탓에 회사 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던 딸이다. 회사를 쓰레기통이라고 하면서 거친 말을 쏟아내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일이 할 만해졌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회사에서 일하는 게 즐겁다고 했다. 신대길은 그 변화가 강주혁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양준기 전무가 없어져서 정신없지?”
“딱히 그렇진 않아. 일이 좀 많아진 건 사실이지만 금방 괜찮아질 거야.”
“강주혁 팀장은 어때?”
“강주혁 팀장? 뭐 여전하지.”
회사 일이라면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는 딸인데 강주혁과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얼버무렸다.
아마 강주혁과 함께 지하공동에 추락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후였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강주혁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더니 그때부터는 이상하리만치 말을 아꼈다.
회사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들에 따르면, 누구보다도 강주혁과 가깝게 지낸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뻔했다.
“최근에 대현공략에 지원을 나갔다고 하던데.”
“나도 그게 궁금했어. 대현에서는 왜 부른 거야? 아빠는 알지?”
“강주혁 팀장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겠지. 거기서 혼자서 히드라를 5분 만에 잡았다고 하더라.”
“뭐? 나한테는 그런 얘기 안 했는데.”
“떠벌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 모양이지. 애초에 믿기 어려운 이야기기도 하고.”
“아빠는 어떻게 안 거야?”
“아빠는 부회장이잖아.”
그 말에 신다은은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부회장이면 다 아는 거야?”
“맞아. 부회장이면 다 알 수 있지.”
신대길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평소처럼 농담이나 주고받으려고 부른 게 아니었으니까.
“다은아.”
“응?”
“강주혁 팀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신다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건 왜?”
신대길은 선뜩 답하지 못했다. 그걸 보면서 신대길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꽃다운 나이에 검만 바라보고 살다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면서 일에 몰두하던 딸이다. 아비로서 딸이 다시 오지 않을 청춘을 그런 식으로 흘려보내는 게 늘 안타까웠다.
그래서 강주혁과 안다정 사이에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는 반가운 기분마저 들었다.
강주혁이 어떤 신입 헌터도 쌓지 못한 위업을 달성해 이름을 떨쳤을 때는 딸이랑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더 난감했다.
“그냥 사람 됨됨이가 어떤지 궁금해서.”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능력이야 불세출이란 걸 누구나 다 알잖아. 성격이나 인품은 어떨까 해서.”
“실력에서 그런 것처럼 인격적으로도 딱히 흠잡을 곳이 없어. 마냥 착한 것도 아니고 융통성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도를 걷는 사람이야. 지난 2년 반 동안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말이나 행동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이래저래 트러블을 많이 겪지 않았어?”
“미워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건 그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였지. 워낙 잘나다 보니 어디를 가나 시기하는 사람들이 꼬이더라.”
“성격은 어때?”
“사람에 따라서 좀 냉정하게 굴 때도 있지만 대개 친절하고 예의 발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고.”
“너는 어때?”
“나?”
“너도 좋아해?”
“나, 나도 좋아하지.”
딸의 뺨이 발그레해지는 걸 보고는 신대길은 빙그레 웃었다.
시집을 보내도 될 나이가 되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아직도 소녀 같았다.
“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뭔데?”
“됐어. 얘기 안 해.”
딸은 혼잣말로 뭔가를 구시렁거렸고, 아빠는 그걸 보고 킬킬거렸다.
신대길은 강주혁의 혈통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려고 딸을 집으로 불렀다.
하지만 딸이 강주혁에 대해서 내린 평가를 들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 평가에 사심이 조금은 섞여 있겠지만 딸이 호감 때문에 없는 사실을 지어낼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딸이 내린 평가는 이윤철이나 다른 정보통을 통해 들은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강주혁은 실력뿐만이 아니라 인품도 괜찮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혈통을 문제 삼아서 처단할 수는 없었다.
강주혁의 할아버지에게 어머니를 잃은 건 원통하고 한스럽지만, 그 죄를 강주혁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이게 강주혁에 대한 신대길의 결론이었다. 박종근 앞에서는 정론에 따라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감이 있었으나 그때의 선택은 다시 생각해 봐도 옳았다.
“근데 강 팀장 얘기는 갑자기 왜? 아빠 사람으로 삼으려고?”
딸이 물었다.
신대길은 딸에게 강주혁의 비밀을 털어놓는 걸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괜한 편견을 심어주기 싫었으니까.
“글쎄. 네 생각은 어때?”
“불가능해.”
“어째서?”
“그 사람은 누구 밑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야. 그러기에는 그릇이 너무 커.”
강주혁에 대해서 좋게만 말할 줄 알았던 딸이 꽤나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라도 있니?”
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그 사람은 뼛속까지 헌터야.”
헌터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 신대길은 더 이상 강해질 수 없을뿐더러 헌터도 아니다.
“그래. 하지만 친구가 될 수는 있잖아.”
아버지의 대답에 딸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아빠가 다치지 않았다면 강주혁이 섬길 만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 * *
다음 날.
태원공략 사장실.
“대현공략에서 다음 제단이 있는 지역에 대한 합동 공략을 요청했네.”
이윤철이 강주혁에게 말했다.
“잘 됐군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이거 자네 작품이지?”
이윤철의 질문에 강주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대현공략의 박종민 팀장에게 넌지시 운만 띄어봤습니다. 제단과 관련된 정보는 조금도 노출하지 않았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잘했네. 회장님이 비밀 엄수를 명하신 것도 2년이나 지났네. 그렇게 하고도 원하는 물건을 못 샀으니 이렇게라도 돌파구를 만들어야지.”
강주혁의 우려와는 달리 이윤철은 오히려 그의 판단을 반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표정은 밝지 않았다.
“후.”
이윤철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강주혁은 호기심을 품은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부회장님이 자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네.”
강주혁은 놀라지 않았다. 박종근 회장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순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제가 할아버지의 검술을 계승한 것은 사실이나 저는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 말게. 조부의 죄를 자네에게 물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주혁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네.”
“적어도 박종근 회장님은 아니시겠죠.”
“알고 있었나?”
“할아버지랑 싸웠던 사람들 중 한 명이니까요. 아마 양준기 전무 일로 저에 대해서 알게 되신 것 같습니다. 지원 요청으로 제가 할아버지의 검술을 이어받았다는 걸 확인하셨겠죠.”
“가서 좀 자제를 하지 그랬나.”
이윤철도 강주혁이 대현에 가서 원맨쇼를 펼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
“힘을 숨기고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네 검술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얘기를 들었네. 박종근 회장님은 그걸 경계하고 계시네. 이번 합동 공략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겠지?”
“네. 사장님. 아마 저를 처단하기 위한 덫이겠죠.”
“잘됐군. 그러니 이번 공략에는 빠지게.”
“제가 가지 않는다면 합동 공략 자체를 취소할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유 부장, 안 팀장, 공 대리 모두 빠질 거야. 공략 1부에서 핵심 전력을 차출할 상황도 아니고 다른 부서에도 기회를 줘야 한다는 여론이 너무 강했네.”
현재 이윤철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고 그걸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은 김재후 부사장뿐. 강주혁은 이를 통해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 박종근 회장이 신대승과 신대길과 접촉했다. 태원공략의 동의도 없이 강주혁을 처단할 인물이 아니니 미리 얘기를 했을 것이다.
둘째, 신대길은 강주혁을 지키는 쪽으로, 신대승은 강주혁을 죽이는 쪽으로 선택을 내렸다. 그동안의 행보를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제가 태원과 대현 양쪽의 헌터들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태원공략에서 합동 공략을 위해 차출될 헌터들이 신대승에게 매수된다면 던전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모른다.
강주혁을 죽인 다음, 사고를 당한 걸로 말을 맞추면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윤철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하겠습니다. 보내주십시오.”
강주혁은 그런 이윤철을 보고는 오히려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