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가 되었다-117화 (117/202)

117화 거길 저랑 들어가시죠

‘종민아.’

‘네. 할아버지.’

‘네가 어디에 있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현그룹의 박종근 회장은 손자에게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자식들끼리 다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장자 승계 원칙을 고수했지만, 장자라고 해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자리에 앉히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아들에게, 더 나아가 손자에게 자격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할아버지. 너무 힘들어요.’

‘종민아. 너는 장차 대현그룹을 이끌어 나가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해.’

박종민은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박종민은 순종적이고 성실한 아이였기에 어른들의 말을 잘 따랐다.

나이를 먹은 후에는 살인적인 커리큘럼으로 악명이 높은 아이비리그 헌터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기라성 같은 유망주들 사이에서 박종민은 당당히 수석을 차지했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박종근은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했다. 박종민은 할아버지를 기쁘게 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길에 만족감과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 길이 무척 힘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너한테 특혜를 줄 생각은 없다.’

대현공략에 취업했을 때, 사장인 아버지가 말했다.

직원들이 알아서 눈치를 봤기에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실적에서도 최고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나중에 공략회사의 사장이 되었을 때 헌터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역시 그렇게 했었다.

공략회사에서 실적을 쌓으려면 일단, 던전에 많이 들어가야 했다. 박종민과 그의 TF팀은 거의 던전에서 살다시피 했다.

반복된 일상 속에서 서서히 지쳐 간 박종민은 문득 헌터가 자신의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힘들다.’

재능이 모자라지도, 노력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꽤 괜찮은 성취를 이루었으나 자신이 이 길을 택한 적도 고민한 적도 없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돌처럼 박혀 있었다.

실적에 대한 압박으로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누적되자 일에 대한 회의감이 짙어졌고 열정도 사그라져갔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가 싸우는 걸 보니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쾅!

히드라의 등에 올라탄 남자가 검으로 비늘을 찌르는 순간, 괴수의 몸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으윽!”

폭발의 여파는 멀리서 지켜보던 대현공략의 헌터들에게까지 미쳤다. 땅이 흔들리고, 뜨거운 바람이 몸을 밀어냈다.

박종민은 폭발과 함께 날아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보호막 전개해!”

힐러가 재빨리 전방에 보호막을 펼쳤다.

툭! 투둑!

독성이 가득한 히드라의 살점과 핏덩이들이 역장 위에 우박처럼 쏟아졌다.

“……해치웠어.”

김재현이 말했다. 폭발이 사라진 자리에는 히드라의 거대한 사체만 남아 있었다. 머리가 이어지는 부분이 통째로 소멸해 버렸다. 바닥에는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붙어 있던 아홉 개의 머리는 모두 몸통에서 분리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완전히 생명이 빠져나간 것인지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S급 몬스터 히드라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절명했다.

척!

사라졌던 강주혁이 지상에 착륙했다. 사방으로 비산했던 히드라의 독성 혈액은 그에게 닿기도 전에 산화해 버렸다.

강주혁은 옷을 대충 털고 TF팀 쪽으로 걸어왔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걸음걸이로.

“와.”

다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의 한 장면이래도 믿겠다.”

김재현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저건 발리우드야.”

박종민이 말했다.

“뭐?”

“주인공을 폼나게 만들기 위해서 개연성을 포기했잖아. 넌 저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긴.”

“저 사람은 피하지도 않았어.”

박종민의 말대로 강주혁은 히드라를 향해 직진만 했다.

거대 몬스터와의 전투에서는 싸우는 시간보다 피하는 시간이 더 많은 법이다.

하지만 강주혁은 옆으로 피하지도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직진으로 갔다 직진으로 돌아온 것이다.

히드라의 머리통이 자신을 노릴 때는 맞불을 놓았다. 중간에 잠시 멈춰서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공격을 위한 준비에 가까웠다.

“노빠꾸 직진남이지.”

“발리우드니까 우리는 춤이라도 춰야 하나.”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는 있지만, 박종민의 마음은 한없이 진지했다.

‘예술이다.’

강주혁의 공격은 실용적일 뿐만이 아니라 미학적이기도 했다. 그의 검과 몸이 그렸던 유려한 곡선은 아름답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투박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꼭 회장님을 만나야겠다.”

박종민은 들뜬 기분으로 말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TF팀이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박종근 회장이 강주혁의 사냥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태원그룹 회장실.

“오랜만입니다. 형님.”

“어서 오게. 그동안 잘 지냈나?”

“저야 늘 잘 지내죠. 형님은 못 본 사이에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에끼, 이 사람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두 회장이 웃으면서 악수를 나눴다.

몬스터가 세상을 위협할 때, 타락한 헌터들이 세상을 어지럽힐 때, 전우로서 함께 싸웠다. 그 후에는 선의의 경쟁자가 되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

손을 뒤덮은 굳은살만큼이나 두 사람의 우정은 두터웠다.

“앉게.”

신태원이 박종근에게 자리를 권했다. 비서가 차를 준비해 주었다.

“어쩐 일인가?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오고.”

신태원은 알면서도 질문했다.

“회사에 이무기를 한 마리 품고 계시더군요.”

박종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태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기를 거두었다.

“몇 년 전부터 이름이 자꾸 들려오기에 기억은 하고 있었습니다. 양준기 전무 소식은 솔직히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박 회장이 강주혁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는 건 나도 아네. 직접 보니까 어떤가?”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더군요.”

강주혁이 불타는 검으로 히드라의 공격을 쳐내면서 접근할 때까지만 해도 경산마존의 무맥이 끊어진 줄 알았다. 경산마존은 그런 검술을 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히드라의 등에 올라타 놈의 몸통을 통째로 날려버렸던 그 기술은 분명 경산마존의 것이었다.

박종근은 전율감에 몸을 떨었다. 경지에 오른 이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가 마음을 짙게 물들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할아비의 죄를 손자에게 묻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하네.”

“그 아이가 자기 할아버지처럼 안 될 거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도 없지.”

“할아비의 기술을 고대로 사용하더군요.”

신태원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몬스터들 때문에 세상이 멸망할 뻔했던 시절도 있었지. 박 회장도 기억하겠지. 그때부터 나랑 함께 싸웠으니까. 이제 우리는 늙었네. 만약 다시 한번 그런 시대가 도래한다면 누가 그걸 막겠나?”

“그래서 경산마존의 힘을 보존하겠다는 겁니까?”

“그래. 그 힘이 제대로만 사용된다면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몬스터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입니다. 지금 헌터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1세대 헌터들이 지구에서 몬스터들을 몰아낸 후, 몬스터들의 기세가 꺾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언론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했다.

몬스터들의 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같은 기간 동안 헌터들이 몬스터를 압도할 만큼 강해진 덕분에 상대적으로 약해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각성자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면서 각성자를 양성하는 시스템도 날이 갈수록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변했다.

던전에서 발견된 비급을 바탕으로 마법과 전투기술을 발전시켰고, 영약을 이용해 능력을 향상시켰다.

그렇게 해서 강해진 헌터들은 좀 더 쉽게 몬스터들을 꺾을 수 있었다. 공략회사가 자리를 잡은 3세대뿐만이 아니라, 헌터들끼리 편을 갈라서 싸우던 2세대 때에도 몬스터들은 1세대 때만큼이나 강했다.

1세대 때의 몬스터 대침공은 그 시절에만 있었던 대사건이 아니라, 매해 한 번씩 있는 웨이브 데이를 제때 막지 못해서 생겨난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몬스터들 때문에 경산마존의 힘을 보존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 위험한 힘이 없더라도 인류는 몬스터와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하다.

“경험이 지나치면 그걸 절대화해 버리는 게 늙은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지.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그 아이가 훗날 제2의 경산마존이 된다면 어쩔 셈입니까?”

“안타깝지만 그 친구의 생명을 거둬야겠지.”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십니까? 고작 서른의 나이로 자기 아버지뻘인 전무를 죽인 녀석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그럼 아무 죄도 없는 젊은이를 단지 악명 높은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이유로 죽이라는 얘긴가? 그럼 우리가 블랙 헌터들이랑 다른 게 뭐가 있는가?”

“경산마존은 죗값을 치르지도 않았습니다. 그자를 벌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형수님한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신태원의 눈이 처음으로 살기를 드러냈다. 박종근도 지지 않고 신태원을 노려보았다.

“내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이러는 게 아니네. 대의를 위해서지.”

“부디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박종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태원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주혁은 우리 회사 직원이야. 그 친구를 건드리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네.”

박종근은 대답 없이 떠났다.

* * *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강주혁은 형이 직접 만든 가라아게를 박종민과 김재현에게 권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음?”

“맛있는데요?”

“다행입니다.”

예의상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강주혁은 형의 요리 솜씨가 부잣집 도련님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켰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다.

“강남 디지털 단지에 이런 곳이 있다니 신기하네.”

“맞아. 이런 가게는 홍대나 연남동에나 있을 법한데.”

박종민과 김재현은 가게를 두리번거리면서 신기해했다.

히드라 공략이 싱거울 정도로 일찍 끝난 후 박종민은 강주혁에게 회식을 제안했다. 공략이 끝나면 의례적으로 하는 회식이었기에 강주혁도 거절하지 않았다.

내일도 평일이었기에 저녁만 먹고 끝날 줄 알았는데 박종민은 팀원들을 먼저 보낸 후 김재현과 셋이서 2차를 가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강주혁은 두 사람을 형의 가게로 데리고 왔다. 형의 요리 솜씨가 부잣집 도련님에게도 먹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으니까.

“안주도 맛있고, 맥주도 시원하니 딱 좋네요. 한잔 하시죠.”

이미 취기가 잔뜩 오른 박종민은 어쩐지 신나 보였다.

강주혁은 박종민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회귀 전에도 접점이 없어서 이름만 알고 있는 정도였다.

막상 알고 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로열패밀리답지 않은 소탈함도 마음에 들었고. 강주혁을 시기할 만큼 마음이 좁지도 않았다.

“강 팀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싸우세요?”

“제가요? 저는 제가 잘 싸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나친 겸손은 오만함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죠.”

강주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좋은 교육을 받고,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그런 건 우리도 다 했어요.”

김재현이 말했다.

“제가 남들보다 조금이나마 나은 게 있다면 이 일을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점일 겁니다. 두 분은 어떠세요?”

“저요? 음…… 싫어하진 않죠. 재현아, 너는 어때?”

“나는 엄청 싫어해. 돈 때문에 하는 거야.”

“미안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일만 시켰네.”

“괜찮아. 돈 많이 주잖아. 그럼 됐어.”

질문을 던져 놓고 자기들끼리 킬킬거리는 두 사람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은근히 웃긴 듀오인 것 같았다.

“강 팀장님만큼 좋아하면 강 팀장님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

나이는 강주혁보다 두 살 많았으나 박종민에게는 약간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근데 팀장님한테는 헌터 일이 가업이 아닌가요?”

“가업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아할 수는 없죠.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시키셔서 별 고민도 없이 했었거든요.”

박종민은 좀 씁쓸해하는 것 같았다.

“적성에 안 맞으시는 건가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강 팀장님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잘 해왔거든요. 적성에 안 맞았으면 그만큼도 못했겠죠.”

“너 인마, 그냥 번아웃이야. 회장님이랑 사장님이 일 너무 많이 시켜서 그런 거라니까. 너 휴가만 제대로 다녀왔어도 헌터 그만두고 싶다는 얘긴 안 했을 걸.”

“야, 내가 언제 헌터 그만둔다고 했어?”

“이제 와서 밑장 빼기냐? 너 헌터 때려치우고 영화감독 하겠다는 소리를 최소 천 번은 들은 것 같은데?”

또다시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면서 삼천포로 빠졌다.

“어쨌든, 강 팀장님.”

“네.”

“사랑합니다.”

“미친놈아, 도대체 왜 그래?”

“야, 진짜야. 난 강 팀장님 팬이라고. 오늘 사냥은 정말이지 아트였어. 아트 헌팅. 그걸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김재현이 박종민의 입을 틀어막았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이놈이 술이 들어가면 약간, 아니, 많이 맛이 가거든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강 팀장님, 혹시 우리 회사로 넘어올 생각 없어요?”

김재현의 손을 뿌리친 박종민이 말했다.

“종민아, 그건 좀…….”

지원 요청을 해서 헌터를 보내줬는데, 그 헌터에게 이직 제안을 한다? 상도덕이 없다는 소리 듣기에 딱 좋다.

“제안은 할 수 있잖아. 태원에서 얼마를 받든 따블로 드리죠. 따블.”

“태원공략에 애정이 있어서 그건 어렵겠지만 팀장님 실적 부담을 덜어드릴 수는 있을 것 같네요.”

“어떻게요?”

박종민과 김재현이 눈을 부릅떴다.

“대현공략이 담당하는 지역들 중에 공략 불가 지역으로 분류된 곳이 하나 있습니다. 거길 저랑 들어가시죠.”

강주혁은 은근슬쩍 속내를 드러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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