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지옥에서 기다려라
챙! 캉!
진유철과 구 공략 1부 3팀이 격돌했다. 3대1의 상황인데도 진유철은 굳건히 버텼다. 하지만 버티는 게 한계였다.
촤악! 촤악!
진유철이 검으로 굵직한 검강을 연달아 뽑아냈다. 스치기만 해도 살이 터져나가는 공격들이지만 강주혁 일행은 간발의 차이로 그것들을 모두 피해냈다.
쾅! 콰쾅!
검강이 지나가자 동굴의 석주들이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진유철은 지난 2년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부 3팀 사람들만큼은 아니었다.
진유철이 던전에서 산전수전을 겪기는 했지만 범죄자인 탓에 행동반경이 넓지는 못했다.
반면에 공략 1부 3팀은 출중한 실력 덕분에 위험한 지역에만 연달아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살아남아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
진유철은 계속해서 검강을 쏴댈 만큼 엄청난 내공을 갖게 되었지만, 강주혁 일행은 그걸 전부 피할 만큼 빨라졌다.
게다가 각자의 길을 가게 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어제까지 함께 싸운 사람들처럼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했다.
“어?”
때마침 공허진도 도착했다.
“허진아, 너도 공격해!”
“네! 부장님!”
네 사람이 파상공세를 펼치자 진유철도 빈틈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캉! 퍽!
“큭!”
무서운 기세로 진유철을 몰아세우던 강주혁이 그의 검을 쳐낸 후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갑옷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기세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너는…… 그때 그놈이구나.”
진유철은 강주혁을 기억해냈다.
“맞습니다.”
“실력이 늘었군.”
진유철은 강주혁과 검을 맞댄 후 얼얼해진 팔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대검이 아니라 한 손 검을 휘두르는데도 대검을 쓸 때보다 공격이 훨씬 더 묵직했다.
“부장님 때문에 살려드리는 겁니다. 항복하시죠.”
진유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혁아.”
“네. 부장님.”
“너랑 안 팀장은 먼저 가. 내가 허진이랑 마무리할게.”
“알겠습니다.”
이 동굴이 막다른 길이라면 양준기 전무도 함께 나타났을 것이다. 추격자들을 처리해야지만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걸로 봐서 다른 통로로 달아난 것 같았다.
“가시죠. 팀장님.”
진유철은 이미 자신이 뚫고 나온 벽에서 밀려난 상황이었다. 그는 강주혁과 안다정을 막지 않았다. 그럴 수 없을뿐더러 양준기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강주혁과 안다정은 환영의 벽을 뚫고 반대편으로 들어갔다. 안도 바깥처럼 깜깜했다.
“이쪽에서 바람이 부네요.”
강주혁은 한쪽 끝을 가리켰다. 그곳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비좁은 통로가 있었다.
“제가 앞장설게요.”
통로를 따라서 한참을 걸어가니 동굴의 반대편으로 나오게 되었다. 안다정은 경계 태세를 취한 상태로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쾅!
“악!”
안다정이 완전히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 강렬한 내공파를 맞은 그녀는 옆으로 날아갔다.
“팀장님!”
강주혁은 호신강기를 전개하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망할 계집 같으니…….”
밖에 나가보니 양준기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빠져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특기인 쌍장을 날린 것이다. 좁은 틈에서 나오자마자 공격이 쏟아져서 안다정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양준기는 한 번에 내공을 많이 소모해서 그런지 강주혁까지 공격하지는 못했다. 강주혁은 경계 태세를 취한 상태로 안다정에게 다가갔다.
“쿨럭!”
안다정이 피를 토해냈다.
별호까지 있는 헌터가 상대를 죽일 생각으로 날린 장법이다. 제아무리 안다정일지라도 치명상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안다정은 대답 대신 얼굴을 찡그렸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딱 봐도 내상이 심한 것 같았다.
스스로 물약을 마실 만한 상태는 아니다. 강주혁이 떠먹여 줘야 하는데 양준기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골든타임이 지나기 전에 공허진이 오거나 양준기를 처리해야 한다.
“도망칠 줄 알았는데 의외군.”
강주혁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솟구쳤다. 동시에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양준기를 죽이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거슬리는 적을 제거한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안다정의 모습을 보니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이지혜 때문에 맹독 구울이 있는 공동에 갇힌 이후로 안다정이 이토록 심하게 다친 적은 없었다.
강주혁의 머릿속에 있던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그의 내면에서 그조차도 모르고 있던 기운이 눈을 떴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네놈이 왔다는 걸 알고 계획을 바꿨지.”
양준기는 진유철이 강주혁 일행과 싸우는 동안, 벽 뒤에서 엿듣고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통해 추격자들 중에 강주혁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강주혁에 대한 증오심이 또 한 번 양준기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것이다.
“잡힌다고 하더라도 네놈만큼은 내 손으로 찢어죽이고…….”
강주혁이 자신을 향해 돌진했기에 양준기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양준기는 곧장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멍청하긴!”
장법은 내공 소모에 비해 공격력이 떨어진다. 그 대신에 광범위한 영역을 동시에 타격할 수 있다. 광역 공격을 한다는 점에서는 마법과 비슷하지만, 마법보다 준비시간이 훨씬 짧다.
그래서 장법을 피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양준기의 경우,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내공 덕분에 공격력도 결코 약하지 않았다.
펑!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내공파가 전방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음!”
하지만 내공파를 맞고 나가떨어져야 할 강주혁은 그곳에 없었다.
쉬이익!
섬뜩한 살기가 정수리에서 느껴졌다. 양준기는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강주혁이 검이 더 빨랐다.
촤아악!
양준기가 뒤로 빠지기 전에 강주혁의 불타는 검이 그의 호신강기를 찢어놓았다.
‘어, 어떻게…….’
양준기의 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아는 강주혁은 절대로 그의 호신강기를 찢을 수 없었다. 내공의 차이 때문에 불가능하다.
게다가 아주 잠깐이지만 양준기는 강주혁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쳤다. 정면 돌격을 하는 걸 보고 내공파를 날렸는데 강주혁은 그걸 뛰어넘어서 양준기의 머리를 노렸다. 양준기는 그 과정을 따라가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 머리에서 어떻게 라는 질문이 떠오를 거다.”
강주혁은 살기를 피어올리면서 말했다.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소름이 그 기운이 결코 범상치 않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네놈은 신대성의 측근이니 내가 누구의 손자인지 알고 있지 않나?”
“…….”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군.”
강주혁은 악마처럼 웃으면서 양준기에게 다가갔다.
“안 팀장님에게 감사해라. 시간만 충분했다면 네놈을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였을 테니까.”
“건방 떨지 마라. 애송이!”
양준기가 강주혁에게 덤벼들었다.
투지를 불태우니 불가해한 압박감도 어느 정도 가시는 것 같았다.
양준기는 강주혁이 아무리 경산마존의 혈통이라 하더라도 아직 과장 나부랭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했다.
위축될 필요가 없다.
캉!
양준기의 손이 강주혁의 검과 충돌하자 강렬한 섬광이 터졌다.
내공과 내공의 싸움. 하지만 강주혁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어째서?’
양준기는 자신이 뿜어낸 살기보다 강주혁의 살기가 더 무서웠다는 김한솔의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자신을 자극하기 위한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강주혁이 불세출의 천재라고 해도 그와 양준기 사이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있다. 무술의 기예는 재능에 따라 따라잡을 수도 있다 하더라도 시간과 비례해서 쌓이는 내공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다. 다른 헌터들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강주혁을 죽여야 한다.
팡! 팡!
양준기가 손바닥을 내밀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터져 났다.
하지만 강주혁은 그때마다 손바닥 안쪽으로 파고들어서 내공파를 등 뒤로 흘려버렸다.
“이 새끼가!”
양준기는 내공을 뿜어내는 대신 근접전용 초식을 펼쳐서 강주혁을 압박했다.
양준기가 원거리에서 내공파를 쏘는 대신 난투를 벌이려고 하자 강주혁은 오히려 살짝 거리를 벌렸다.
캉! 캉!
그리고는 양준기가 손바닥을 내밀 때마다 칼끝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극한에 이른 금강불괴 덕분에 양준기의 손바닥은 어떤 강철보다 튼튼했다. 강주혁의 검으로도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초신성의 전설도 여기까지다!”
강주혁의 검이 자신의 피부를 뚫지 못한다는 걸 확인한 양준기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는 더욱 맹렬하게 강주혁을 몰아세웠다.
평범한 사람이 봤다면 양준기의 팔이 순간적으로 수백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만큼 공격이 빨랐다.
캉! 캉! 캉!
하지만 그 공격들은 모두 강주혁의 몸이 아니라 그의 칼끝에 닿았다. 양준기가 손바닥을 내밀 때마다 칼끝으로 그것을 찔러댄 것이다.
“윽!”
갑자기 오른 손바닥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양준기는 공격을 멈췄다. 손바닥을 보니 한복판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그의 피부가 뚫린 것이다.
“아무리 단단한 방패도 계속해서 찌르면 뚫리기 마련이지.”
강주혁은 검이 붉게 달아오르자 칼끝에 맺혀 있던 양준기의 피가 증발해 버렸다.
양준기는 그제야 다른 곳에는 상처가 없음을 깨달았다. 공격에만 몰두하느라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강주혁은 줄곧 한 곳만 찔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라.”
강주혁은 양준기에게 덤벼들었다.
“으아아아!”
강주혁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양준기는 통증을 참으면서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콰쾅!
손바닥을 중심으로 내공파가 기둥처럼 솟구치면서 양준기을 감쌌다. 양준기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두르려던 강주혁은 그 내공파에 휩쓸렸다.
‘해치웠다!’
공격 범위는 좁아도 공격력만큼은 발군인 기술. 이걸 직격으로 맞았으니 강주혁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콰르르.
그때, 갑자기 강주혁의 두 다리에서 화염이 터져 나오더니 양준기의 내공파에 섞여들었다. 두 기운이 충돌하면서 일어난 파동이 강주혁의 몸을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뭐지?”
양준기는 강주혁의 신형을 눈으로 쫓았다.
척!
강주혁은 멀쩡한 상태로 바닥에 착지했다. 어깨에서 연기가 피어올랐으나 어디에도 부상의 흔적은 없었다.
양준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보법이었나?’
양준기는 강주혁이 어떻게 자신의 기술을 파훼한 건지 깨달았다. 발밑에서 솟구친 내공파를 보법을 통해 다리에서 뿜어낸 화기로 상쇄해버린 것이다.
양준기는 강주혁의 엄청난 반응 속도와 전투 센스, 그리고 자신의 공격 기술을 무위로 돌려버린 보법의 위력에 절망했다.
특별한 혈통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은 이미 수천 년을 살아온 고목처럼 보였다.
‘경산마존의 재림인가.’
양준기는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땅을 짚었다. 진유철이 가지고 있던 영약으로 간신히 끌어올렸던 내공도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 마지막 공격에 자신의 헌터 인생 전부를 걸었다.
“와라.”
강주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양준기를 향해 달려왔다.
“으어어어어!”
양준기는 자신이 가진 모든 내공을 손바닥으로 끌어올렸다. 그건 단순한 내공이 아니라 그가 헌터로서 쌓아 올린 세월이었다.
“하!”
양준기는 기합과 함께 쌍장을 출수했다.
콰쾅!
전방의 공간 자체를 지워버릴 것처럼 강력한 내공파가 터져 나왔다.
콰르르!
하지만 눈앞을 가득 채웠던 내공의 파도는 이내 양쪽으로 갈라져 갔다. 그리고 그 틈에서 불타는 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익!”
양준기는 앞으로 뻗은 쌍장을 재빨리 거둬들인 후 손목을 교차시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양준기의 호신강기는 어떤 방패보다도 두껍고 금강불괴는 어떤 갑옷보다도 튼튼하다.
콰직!
하지만 강주혁의 검은 그 모든 걸 뚫고 양준기의 손목에 박혔다.
“으아아악!”
양준기는 재빨리 팔과 함께 몸을 빼냈다. 칼에 꿰뚫린 상태에서 억지로 뺐더니 왼쪽 손목의 절반이 잘려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두 손목을 뚫고 들어온 칼이 이마까지 뚫어버렸을 것이다.
“크윽!”
상처가 타들어 갈 것처럼 아팠고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왼쪽 손목 아래로는 아예 감각이 없었다.
상처가 있는데도 계속해서 사용했더니 오른손도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 상태로 전투를 지속하는 건 불가능했다.
콰르르.
강주혁이 디디고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커다란 불길이 퍼져나갔다. 넘실대는 화염이 주변의 풀들을 태우고 바위를 검게 물들였다.
하지만 의지가 있는 것처럼 안다정이 누워 있는 곳은 침범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변은 불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남겨졌다.
“네, 네놈은 대체…….”
강주혁에게서 시작된 염화는 공포와 절망이 되어 양준기의 영혼에 옮겨붙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빠르게 번져오는 불을 피해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강주혁은 자신이 만든 불지옥의 한복판에 오만하게 선 채 양준기에게 서리처럼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양준기 전무가 여기에 있다!”
양준기가 소리를 질렀다.
죽음의 공포가 강주혁에 대한 증오심과 호승심, 그리고 수치심까지 모두 지워버렸다.
다른 헌터들이 온다면 강주혁도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다.
일단은 살고 봐야 한다.
“추하군.”
강주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푹!
“컥!”
강주혁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검은 양준기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지옥에서 기다려라.”
강주혁이 속삭였다.
푸아악!
강주혁의 검이 양준기의 몸을 뚫고 나왔다.
“신대성도 곧 보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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