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이걸로는 부족합니다
“왜, 왜 이러세요. 형님.”
강주혁이 살기를 살짝 누그러뜨리자 숨통이 트인 최기홍이 말했다.
그건 그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배짱 하나 두둑하네. 아직도 같잖은 연기를 할 생각을 다 하고. 이봐요. 기홍 씨. 당신한테 이 일을 시킨 사람도 헌터지만 나도 헌터야.”
최기홍이 두려워하는 건 그에게 이 일을 시킨 높으신 분의 보복일 것이다.
헌터들은 은원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걸 갚는 수단은 항상 합법적이지만은 않다. 그 높으신 분이 배신의 대가를 죽음으로 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강주혁은 최기홍에게 돌려서 말했다. 나 역시 은원을 중요하게 여기며 너를 죽일 수도 있다고.
높으신 분은 멀리 있고 강주혁은 바로 앞에 있다. 그리고 공포는 언제나 가까이에 있을 때 좀 더 직접적이다.
최기홍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좀 전에 살기에 압도당한 기억이 떠오르는지 다시 한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금만 더 압박을 가하면 오줌이라도 지릴 기세였다.
“누구야? 이 일을 시킨 사람.”
강주혁이 재차 물었다.
“……바, 박영훈 과장입니다.”
최기홍은 덜덜 떨면서 입을 열었다. 그는 입을 열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이었다.
홍세인 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개소리.”
하지만 강주혁은 딱 잘라서 말했다.
“정말입니다.”
“고작 과장이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지. 당신도 과장 말만 믿고 이런 짓을 했을 리가 없고. 그 양반은 당신한테 직접 지시를 내린 사람이겠지. 하지만 분명 누군가의 이름을 팔았을 거야. 당신이 인생을 걸어도 될 만큼 지위가 높은 사람을.”
갑자기 최기홍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옆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강주혁의 바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당황한 홍세인 팀장이 말리려고 했지만 최기홍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선배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선배님을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학교 후배는 맞잖아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안 돼.”
“제발요.”
“남의 인생을 망칠 생각이면 당신 인생도 걸었어야지.”
강주혁은 다시 살기를 담은 눈으로 최기홍을 노려보았다.
“빨리 불어. 죽기 싫으면.”
최기홍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 * *
“어떻게 됐나?”
강주혁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이윤철 사장이 물었다.
“최기홍 인턴의 입에서 이진욱 상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역시나 그 이름이 나오는군.”
이윤철도 양준기 전무가 영광공략의 이진욱 상무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입을 연 건가?”
“협박 반, 회유 반으로 했습니다.”
강주혁의 답변에 이윤철이 빙그레 웃었다.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는 건 봐주겠다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강주혁은 그 말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함부로 이런 짓을 벌이면 인생이 완전히 끝장난다는 걸 업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감옥에 넣을 수 있는지는 변호사를 만나봐야 알겠지만 그게 안 되면 피해 보상금이라도 엄청 뜯어낼 생각이었다.
“홍세인 팀장은 뭐라고 하던가?”
“곧장 회사로 연락했습니다. 이진욱 상무를 잡아넣으라고 하더군요.”
“홍세인 팀장이 그쪽 라인이 아니어야 할 텐데 걱정이군.”
아무리 이윤철이라도 영광공략 내부의 권력 관계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만약 홍세인이 이진욱 상무 라인이라면 그냥 쇼를 하고 유야무야 넘어가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표정을 보니 아닌 것 같았습니다.”
“표정?”
“최기홍의 입에서 이진욱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거든요.”
“천만다행이군.”
“이걸로는 부족합니다.”
양준기 전무의 아들이 훔친 마석을 양준기 전무의 동문인 이진욱 상무가 게이트 밖으로 빼돌리려고 했다.
이를 통해 양준기 전무와 이진욱 상무의 커넥션을 밝히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마석 횡령 미수와 강주혁에 대한 명예 훼손밖에 안 된다.
회사 차원에서 징계를 받고 벌금을 무는 정도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강주혁은 그걸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정말로 끝장을 보려면 그동안 양준기가 벌였던 일들까지 끄집어내야 한다.
“사장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뭘 말인가?”
“양준기 전무가 마석을 빼돌려왔다는 걸요.”
이윤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양준기 전무가 자기 라인의 사람들을 시켜서 마석을 빼돌리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진유철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도 다들 알고 있었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황과 심증만 있을 뿐, 한 번도 감사실의 칼끝이 양준기 전무를 향한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감사실 직원들이 신대성과 양준기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럴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지”
“아마 그동안 공략 1부 1팀을 이용해서 모은 마석을 영광공략 쪽으로 빼냈을 겁니다.”
이윤철은 강주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네는 정말 거침이 없군.”
“모두가 알고 있지만 양준기 전무가 무서워서 쉬쉬하고 있던 사실입니다. 양준기 전무와 이진욱 상무의 커넥션이 드러난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물증이나 증인 없으니까 어려울 걸세.”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
“이진욱 상무한테 양준기가 전무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불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아니, 양준기 전무보다는 1부 1팀이 낫겠군요. 양준기 전무가 입을 열었다는 걸 믿지는 않아도 아랫사람이 실토했다고 하면 끝장났다고 생각할 겁니다. 양준기 전무한테는 이진욱 상무가 다 털어놓았고 하고요.”
한 마디로 무죄 추정이 아니라 유죄 추정으로 접근하자는 얘기였다.
“그렇게 단순한 방법이 그런 능구렁이들한테 먹힐 것 같나?”
“단순하지 않습니다. 양준기 전무의 힘은 신대성 전 부회장에게 나옵니다. 신대성 전 부회장은 물러난 지 2년이나 지났죠. 그 힘이 예전 같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로 감사실 내에 이윤철의 지지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진욱 상무가 양준기 전무의 부탁을 들어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맞아. 신대성 전 부회장의 오른팔이기 때문이겠지.”
“그것 때문에 마지못해 도와주기는 했지만 이진욱 상무의 입장에서는 이번 부탁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한테 위험할뿐더러 실질적인 이득도 없으니까요. 분명 불만이 많았을 겁니다.”
신대성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이진욱의 불만은 쌓여 있다. 원치 않은 일에 가담했는데 자신에게 불똥이 튄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양준기와 갈라서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양준기 전무는 폰도 빼앗기고 억류된 상태입니다. 메시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말을 맞출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려울 겁니다.”
이윤철은 자신이 점점 강주혁에게 설득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가 이미 다 불었다고 말하는 동시에 수사에 협조하면 살길을 마련해준다고 회유하는 겁니다.”
“양준기 전무에게 그렇게 하는 건 가능하네. 하지만 이진욱 상무한테 그렇게 하라고 지시할 수는 없네.”
“협조를 구하실 수는 있지 않습니까. 영광공략 내에도 분명 이진욱 상무의 적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자기네들 출입구가 마석 횡령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좋아할 회사는 없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 일을 매듭짓고 싶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입을 열지 못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곤란해지네.”
아마 곤란해지는 건 우리가 아니라 이윤철 사장뿐일 것이다. 강주혁도 이윤철의 입장을 이해했기에 무리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냥 마석 횡령 미수와 명예 훼손 선에서 끝내시죠.”
하지만 정작 이윤철은 선뜻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 역시 이번 일이 양준기 전무를 도려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네를 믿고 도박을 한번 하기로 하지.”
한참을 고민하던 이윤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강주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정말이지 자네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군.”
이윤철이 강주혁을 보면서 씩 웃었다.
헌터로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재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혜안도 뛰어나다. 곁에 두고 싶은 동시에 절대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제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으면 이런 일을 겪지도 않았겠죠.”
강주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 *
영광공략.
감사실 내부에 있는 취조실.
“하이고.”
이진욱 상무는 의자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어려워하면서도 이것저것 따져대던 감사팀 풋내기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망할 새끼.’
터무니없는 부탁을 해서 자신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양준기 전무를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강주혁이? 그놈은 왜?’
양준기 전무가 술자리에서 강주혁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어리둥절했었다.
이진욱 상무도 강주혁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다.
인턴으로 들어와 2년 반 만에 팀장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마석 매장지를 연달아 두 개나 찾아내고 2년 연속 실적 1등에 오른 기록 제조기, 사원 신분으로 S급 몬스터인 데몬을 단신으로 잡아낸 괴물.
영광공략에서도 태원공략의 초신성에 대한 소문을 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부 거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양준기 전무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는 경악스러웠다.
‘그러니까 전부 진짜라는 거야?’
‘그래. 이대로 두면 신태원 회장을 능가하는 헌터가 될 거야.’
‘그런 녀석을 왜 쫓아내려고 하는 건데?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거 아니야?’
‘이미 거절했어. 신대성 전 부회장이랑 그놈이랑 안 좋은 일이 좀 있었거든.’
양준기는 신대성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이진욱에게도 듣는 귀가 있었다.
양준기의 아들인 양준영이 강주혁의 팀원이며 팀장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개 패듯이 두들겨 맞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출중한 놈이면 끼고 도는 인간들도 많아. 그놈을 건드렸다가 그 인간들하고도 한 판 붙어야 할 걸.’
이진욱 상무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그래서 양준기가 아버지로서 느끼는 치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실익은 없는데 위험하기만 한 일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양준기 전무의 말에 이진욱 상무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대꾸하지는 못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동기이긴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확실한 위계가 있었다. 이진욱은 한 번도 양준기를 넘어선 적이 없었으니까. 양준기는 항상 이진욱을 아래로 생각했다.
젊은 시절 생겨난 위계는 나이를 먹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진욱도 나름 잘 나갔지만, 양준기는 언제나 이진욱보다 한발 앞서 있었고, 부와 권력에 좀 더 가까이에 있었다. 그 사실이 이진욱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알았어.’
이진욱은 양준기가 빼돌린 마석을 외부로 반출해 주는 대가로 엄청난 돈을 챙길 수 있었다. 그 돈 덕분에 이진욱과 가족들은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양준기는 신대성이 이진욱의 노고를 잊지 않았다면서 영광공략에서 밀려나면 태원공략에서 한자리를 주겠다는 말도 했다.
그러니 거절할 수 없었다.
철컥.
그때, 취조실 문이 열리더니 영광공략의 하성호 사장이 들어왔다.
“사장님!”
사장이 직접 올 줄 몰랐던 이진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 한심한 인간아, 어쩌자고 그런 일을 벌인 거야!”
하성호는 이진욱을 보자마자 호통을 쳤다. 하성호는 영광그룹 하진호 회장의 동생으로 이진욱보다 연배가 훨씬 높은 대선배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진욱은 사장 앞에서까지 발뺌할 생각이 없었다. 취조실에 끌려온 순간, 어느 정도는 체념하고 있었다.
“내가 이 상무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우리 회사가 무슨 암시장이야! 마석 빼돌리는 창구로 쓰게!”
“면목 없습니다.”
이진욱은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도대체 얼마나 해 먹은 거야?”
“네?”
이진욱은 당황했다. 그가 걸린 건 어디까지나 강주혁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려던 일뿐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태원공략에서 마석 빼돌리던 놈들이 다 불었어.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놔. 그래야 내가 자네 목을 치든가 말든가 결정할 거 아니야.”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진욱은 머릿속이 꼬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도 갑자기 끌려오는 바람에 양준기 전무에게 아무런 소식을 못 들었다.
“그쪽 공략 1부 1팀 놈들 말이야. 그놈들이 빼돌린 마석을 우리 쪽에서 빼냈다면서? 양준기 전무랑 이 상무랑 몇 년 동안 그걸로 해 먹은 거 아니야?”
이진욱은 뺨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발.’
어떤 일이 있어도 드러나서는 안 되는 비밀이 드러났다.
양준기가 실토한 건지 아니면 태원공략 감사팀이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기까지 갔으면 끝장이다.
‘그래서 태원공략에서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이진욱의 마음속에서 양준기에 대한 살심이 들끓었다.
강주혁을 쫓아내고 싶으면 태원공략 내에서 해결하라고 했지만 양준기는 굳이 영광공략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강주혁의 범죄를 좀 더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이진욱은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마석 횡령 루트가 드러날 수 있음을 경고했지만 양준기는 그럴 일이 없다면서 듣지 않았다.
‘네 놈도 여기까지밖에 안 되는구나.’
이진욱이 아는 양준기는 교활하고 철두철미한 인간이었다. 평소의 양준기라면 절대로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굴욕을 당한 아들 때문에 분별을 잃어버렸다.
‘그놈의 신대성도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이진욱은 신대성이 2년 전 부회장 자리에서 쫓겨난 후 두문불출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후계 경쟁이 한창일 때, 2년의 공백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어쩌면 양준기가 제시했던 미래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쾅!
“빨리 말해! 얼마나 해 먹었어?”
사장이 취조실 책상을 주먹으로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우, 우리 거는 안 해 먹었습니다.”
이진욱 상무는 비굴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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