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이사님이 망을 봐주십시오
강주혁은 양준영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를 천천히 따라갔다. 투명화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이상 알아차리기 힘들 것이다.
양준영은 한 나무 앞에 멈춰서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주변의 뾰족한 돌을 이용해서 땅을 팠다.
그리 깊이 파지는 않았다. 대충 삽질을 끝낸 양준영은 소매 안쪽에 숨겨놨던 팔찌를 꺼내서 땅에 묻었다.
‘역시.’
강주혁은 순간적으로 안력을 돋우어 팔찌의 외양을 포착했다. 그의 예상대로 그건 아공간 보관함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팔찌였다.
보관량에 따라 가격이 다른데, 가장 보관량이 낮은 팔찌도 5억이 넘는다. 만들기는 어렵지만 활용도는 엄청 높기 때문이다. 태원공략 같은 회사에서도 팀별로 하나씩만 지급한다.
그런 비싼 물건을 양준영은 땅에 아무렇게나 묻어버렸다. 그리고 흙을 대충 덮은 후 땅을 팔 때 썼던 돌을 그 위에 얹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마석 채취용 칼로 앞에 있는 나무에다가 흠집을 내놓았다.
‘곧바로 처넣을까.’
강주혁은 저 팔찌로 생성할 수 있는 아공간 보관함에 좀 전에 검사할 때 누락 되었던 마석이 있다고 확신했다. 지금 잡으면 공금 횡령으로 양준영을 징계를 먹일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꺼림칙한 느낌이 강주혁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회귀 전에도 양준기 전무는 회사의 마석을 야금야금 빼돌리곤 했었다. 아마 그게 신대성 패거리의 주요 자금줄이었을 것이다.
걸리면 쇠고랑을 차게 되는 위험한 일인 만큼 양준기 전무는 항상 꼬리를 자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놨다. 유덕현의 상사인 진유철 역시 그렇게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회귀 전에는 몇 번 더 걸리긴 했으나 양준기가 책임을 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들 뿌리가 양준기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중간에서 다 뒤집어쓰는 식으로 일이 마무리되어서 양준기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이걸 아들에게 시킨다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됐다. 아들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니까.
회귀 전, 그 일을 주로 맡아서 하던 건 1부 1팀이었다. 그때도 양준영이 소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일을 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부자가 원수지간일 수도 있지만, 양준기, 양준영 부자는 사이가 꽤 좋은 편이다. 그게 아니라면 양준영이 그동안 공략 1부의 황태자 노릇을 못 했을 것이다.
게다가 양준영이 걸릴 경우, 아버지이자 회사의 중역인 양준기 역시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내가 타깃이군.’
강주혁은 양준기 같은 능구렁이가 어째서 이런 악수를 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의도적으로 횡령 사건을 일으킨 다음에 강주혁에게 그걸 덮어씌우는 것이다. 양준영이 한 일을 강주혁이 했다는 식으로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이다.
강주혁이 결백하다는 걸 증명한다 하더라도 진범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커리어에 오점이 생길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1부 2팀에서 횡령 사건이 터진 거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양준영밖에 없다.
‘우리 팀원들은 못 건드린 모양이군.’
강주혁은 양준기가 아들을 시켜서 자신을 흔들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다른 팀원들에게도 마수를 뻗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위험한 일을 다른 팀원이 아니라 아들에게 시켰다는 건 팀원들을 회유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얘기다.
‘이제 내가 공격할 차례군.’
강주혁은 이번 기회를 역으로 이용해 양준영뿐만이 아니라 양준기까지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준기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저벅. 저벅.
강주혁은 양준영이 다가오기 전에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가 팀원들에게 돌아가는 걸 확인한 후 반대편으로 돌아가 팀원들과 합류했다.
친구를 만나고 왔다고 하니 양준영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부장님.”
강주혁은 회사로 복귀한 후 유덕현을 찾아갔다.
“어서 와라. 공략은 잘 끝냈어?”
“네. 무사히 잘 끝냈습니다.”
“수고했다. 근데 어쩐 일이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강주혁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주변을 잠시 살폈다.
“괜찮아. 일부로 큰소리로 말하지 않는 이상 밖에까지 안 들려.”
강주혁은 그래도 말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양준영 대리가 마석을 빼돌리는 것 같습니다.”
“뭐? 확실해?”
유덕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강주혁은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팔찌를 묻었다고?”
“아공간 보관함 팔찌인 것 같습니다.”
“돈도 많은 놈이 왜 그러는 거지?”
“아버지가 시키지 않았을까요?”
“양준기 전무가 손버릇이 안 좋긴 하지.”
유덕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곧장 덮치지 않았냐?”
“마석 몇 개 훔친 걸로는 큰 처벌을 받기 힘들 겁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일이 커지면 너랑 나한테도 불똥이 튀어.”
강주혁은 양준영의 책임자고 유덕현은 강주혁의 책임자다. 양준영이 범죄를 저지르면 강주혁과 유덕현의 리더십에도 타격을 입는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준기가 마석 몇 개 빼돌리려고 아들에게 이런 일을 시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러네. 무슨 꿍꿍일까?”
“아마 저를 겨냥해서 벌인 일일 겁니다.”
강주혁은 자신의 추측을 얘기했고, 유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대성과 강주혁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양준영을 굳이 1부 2팀으로 보낸 것도 그렇고.
“일리가 있군.”
“그래서 말인데, 이걸 역으로 이용해서 양준기 전무를 노려보는 건 어떨까요?”
유덕현이 흠칫하고 놀랐다. 그는 강주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강주혁의 눈은 몬스터를 잡을 때처럼 예기가 번뜩였다.
유덕현 역시 양준기에게 맺힌 게 많은 사람이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상사를 범죄자로 만들어놓고는 떵떵거리면서 잘살고 있으니까.
“어떻게?”
예상대로 유덕현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단은 이걸 임재경 이사님께 가져가는 겁니다.”
임재경은 오랫동안 양준기를 위해 일했다. 그만큼 양준기가 하는 짓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좋아. 내가 한번 연락해볼게.”
강주혁의 말뜻을 이해한 유덕현이 씩 웃어 보였다.
그날 저녁.
강주혁은 유덕현, 임재경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임재경은 얼굴에 화색이 가득했다.
사장 라인으로 옮겨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대길이 부회장으로 등극했다. 이윤철 사장은 힘을 되찾았고 자신을 지지해 준 임재경에게 이사 자리를 선물했다.
꿈에도 그리던 임원이 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이야, 강 팀장. 팀장 달더니 신수가 아주 훤해졌어. 으허허허.”
임재경은 자신이 임원이 되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해준 유덕현과 강주혁을 격하게 반겼다.
“일단, 한 잔씩 받아.”
“네, 이사님.”
술이 한 잔씩 돌고 배를 채운 후 임재경이 본론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쩐 일이냐? 니들이 나한테 밥을 다 사달라고 하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뭔데?”
강주혁은 유덕현에게 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했다.
“그 양반, 또 시작이네.”
임재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강주혁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게 기뻤다.
이윤철 사장의 도움으로 회사에 들어왔고 양준기 전무, 김재후 부사장하고는 껄끄러운 사이라서 다들 강주혁이 이윤철을 지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주혁은 한 번도 자신이 누구 라인이라는 걸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었다. 임재경은 그게 아쉬웠다.
그래서 이렇게 민감한 사항을 공유하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도 했었나요?”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마 1부 1팀 놈들이 그동안 좀 해먹은 게 있을 거다.”
1부 1팀은 양준영을 데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온갖 혜택을 누렸다. 팀원 전원이 양준기 전무의 충성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양준기 전무가 단지 아들을 잘 돌봐주는 대가로 1부 1팀을 그렇게 밀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이사님께는 언질을 안 해줬습니까?”
“나중에는 발바닥도 핥을 것처럼 굴기는 했지만, 나도 양준기 전무 밑에 들어가는 게 좀 늦은 감이 있었거든. 그래서인지 나랑 모든 걸 공유하지는 않았다.”
양준기는 임재경보다 오히려 진유철을 더 신뢰했다. 임재경이 본격적으로 양준기를 따른 것은 진유철이 도망자 신세가 된 후였다.
그래서인지 양준기에게 임재경은 언제나 차선으로 대했다. 양준기는 진유철을 시켜 강주혁을 공격한 것에 대해서도 임재경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대성과 강 씨 집안에 관한 것도 임재경은 몰랐다.
“그리고 나는 나한테 불똥 튀는 걸 엄청 싫어했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서 나한테 얘기를 안 했을 거야.”
만약 1부 1팀이 마석을 빼돌리다가 적발이 되면 당시 공략 1부의 수장이었던 임재경도 무사하지 못한다. 양준기는 임재경이 반발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를 건너뛴 것이다.
“그럼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모르시죠?”
“정확히는 모르지. 하지만 우리 회사에서 빼돌리는 건 어려울 거야.”
아공간 보관함 팔찌에다가 빼돌린 마석을 보관하더라도 그것을 게이트 바깥으로 가지고 나와야지만 팔아먹을 수가 있다.
하지만 게이트를 통과하는 모든 사람은 엄격한 소지품 검사를 받는다. 마력이 깃든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백 퍼센트 걸린다.
마석을 빼돌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게이트를 관리하는 직원을 매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략회사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이를 방지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태원공략의 경우, 감사실과 인사팀 양쪽 직원을 배치했다. 감사팀과 인사팀 내에서도 로테이션을 돌리기 때문에 감사실과 인사팀 전부를 매수하지 않는 이상 빼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감사팀은 신대성 라인, 인사팀은 신대승 라인이 강세이기에 자연스럽게 서로 견제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신대길 라인 쪽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런 상황이니 양준기도 태원공략 쪽으로 마석을 빼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광공략 쪽이 아닐까요?”
“영광공략은?”
유덕현이 물었다.
“양준기 전무의 아카데미 동문이 임원으로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맞아. 이진욱 상무라고 있어.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아냐?”
임재경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주워들었습니다.”
강주혁은 대충 둘러댔다.
이진욱 상무는 회귀 전, 양준기 전무의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종종 언급되던 사람이어서 알고 있었다.
‘요놈 봐라.’
강주혁의 변명에 임재경은 웃음을 지었다.
회사에서의 정보력은 인맥에서 나온다. 그리고 인맥이란 건 대개 직급이 높아질수록 넓어지기 마련이다.
인턴 때부터 그랬지만 강주혁은 자기 나이나 직급에 비해 정보력이 지나치게 뛰어났다. 딱히 발이 넓거나 직급이 높은 사람과 교류를 하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그리고 그 정보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헌터뿐만이 아니라 이런 쪽으로도 타고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현장에서 처리하지 않고 나한테까지 이걸 가지고 온 이유가 있겠지?”
임재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걸 역이용해서 양준기 전무를 날리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임재경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과장의 입에서 전무를 날린다는 말이 나왔으니까.
“그 양반을 잘못 건드리면 네가 봉변을 당할 수가 있다. 조심해야 돼.”
아무리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양준기는 엄연히 회사의 실세다. 그를 사냥하는 일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임재경도 양준기에게 맺힌 게 있지만, 섣불리 건드리기는 어려웠다. 이사가 되어 가까이서 본 양준기의 권력은 부장 시절 봤을 때보다 더 견고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주혁은 간덩이가 부은 사람처럼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이미 당할 만큼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건은 마석 유출이 아니라 저를 공격하는 게 목표입니다.”
강주혁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말했다.
“네가 타깃이란 건 나도 동의한다. 마석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아들한테 시킬 필요가 없겠지. 근데, 양준영이 독단으로 저질렀을 가능성은 없어? 너한테 맺힌 게 많을 거 아니야?”
“그럴 만한 배짱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
임재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양준기의 몰락은 곧 임재경에게는 기회가 될 테니까.
이윤철도 눈엣가시 같은 양준기를 몰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임재경이 강주혁을 도와 그 일을 해낸다면 그만큼 임재경의 주가도 올라갈 것이다.
“이사님이 망을 좀 봐주십시오.”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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