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치유 물약 챙겨왔습니다
‘와, 씨, 졸라 세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윤정석이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강주혁이 때리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그저 눈을 한 번 깜빡하고 나니 벽에 처박혀 있었다.
‘모, 몸이…….’
강주혁은 일으켜 주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윤정석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쿨럭!”
목에서 자꾸만 피가 올라왔다. 어떻게 때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속이 완전 진탕이었다.
“컥!”
뒤늦게 격통이 몰려왔다. 너무 아파서 정신을 혼미해졌다.
“공 대리님.”
“네! 팀장님!”
강주혁의 부름에 공허진이 달려왔다.
“움직이지 마요.”
공허진은 윤정석의 가슴에 손을 댄 후 눈을 감았다.
뒤집혀 있던 속이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오면서 통증이 가셨다. 육체의 통증이 사라지자 굴욕감과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난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윤정석의 집안은 가난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가난에 대한 원망으로 잠시 엇나가기도 했다. 친구들과 싸움질을 하고 다녔더니 문제아로 찍혀서 생활 기록부가 엉망이 되었다.
집에 돈이 없었기에 헌터 아카데미를 가려면 전액 장학금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생활 기록부가 원인이 되어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결국, 윤정석은 아카데미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프리랜서 헌터로 활동했다. 남들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가르침을 받을 때 윤정석은 생사를 넘나들며 헌터 일을 배워나갔다.
프리랜서 헌터들 중에는 윤정석처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카데미와 공략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가난하고 젊은 헌터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그룹을 만들었다. 비슷한 처지였던 윤정석도 그룹에 몸을 담았고, 뛰어난 실력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룹은 홍대와 신촌 등에서 길거리 싸움을 하면서 실력을 기르고, 우정을 나눴다. 다른 동네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그룹과 대련으로 우열을 가리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윤정석과 그의 그룹은 꽤나 유명세를 떨쳤다. 대련을 할 때마다 인터넷 방송으로 생중계를 했는데 반응이 꽤 괜찮았다. 잘 될 때는 그룹 전체가 먹고살 만한 돈이 나오기도 했다.
“아카데미 다니는 놈들은 전부 샌님들이야.”
윤정석의 우상이었던 그룹의 리더가 말했다.
리더는 실제로 대기업 급 공략회사를 다니는 헌터들을 대련으로 박살 내기도 했다.
실력도 한 수 위고 돈도 잘 벌고 있으니까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심심한데 도장 깨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어느 날, 태원공략이 스펙을 따지지 않고, 실력만으로 헌터를 뽑는다는 소식을 접한 리더가 윤정석에게 제안했다.
“뭐 별거 있겠어요? 한번 해보죠.”
실력을 인정받아 그룹의 2인자까지 올라간 윤정석은 자신감이 넘쳤다.
예상대로 입사시험은 무난하게 통과했다. 연수원에서 치른 시험들도 우스운 수준이었다.
강주혁이 팀장이라고 해봤자 자기랑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니까 비슷한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었음에도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윤정석은 공격은 너무나도 쉽게 파훼 되었는데 반해, 강주혁의 공격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이게 대기업의 진정한 힘인가?’
윤정석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강주혁을 올려다보면서 오해를 하고 말았다.
강주혁이 태원공략 내에서도 괴물 소리를 듣는 천재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윤정석은 그를 평균적인 팀장이라고 생각했다.
강주혁을 팀장의 평균이라고 생각하니 그 위에 있는 임원들은 신화에나 나올 법한 반신반인으로 생각되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실력도 없으면서 쓸데없는 지식만으로 으스대는 샌님들. 윤정석이 생각하는 대기업의 헌터들은 그런 자들이었다.
하지만 진짜 대기업의 헌터를 겪어보니 자신이 그저 우물 안의 개구리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후회와 함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좀 괜찮아졌어요?”
강주혁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윤정석은 그 손을 잡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어나는 대신, 강주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쿵!
그리고 이마로 땅을 찧었다.
“팀장님! 평생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검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 * *
‘이제야 자리가 좀 잡히는군.’
강주혁은 팀장 자리에 앉아서 1부 2팀 파트를 쭉 훑어보았다.
감히 팀장의 권위에 도전했던 양준영은 조용히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1부 1팀 시절에는 자기 일을 다른 사람한테 떠넘긴 후에 사무실 안을 어슬렁거렸다. 예쁘장한 여직원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남 직원들에게는 시비를 걸었다. 자기보다 직급이 높든 낮든 상관이 없었다.
양준기 전무와 임재경 부장을 등에 업고 있던 양준영은 공략 1부의 황태자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그를 대놓고 적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강주혁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역시 대련이 최고지.’
첫날부터 까불거리면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윤정석도 얌전해졌다.
강주혁이 상사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윤정석은 곧장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특한 녀석.’
회귀 전에도 그랬다.
1년 넘게 속을 썩이다가 강주혁이 확실한 우위를 보여주자 그를 형님으로 모시겠다면서 오른팔을 자처했다.
그 후 두 사람은 태원공략 최고의 콤비로 맹활약을 펼쳤다.
“계획서 작성은 해당 지역에 대한 기존의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윤정석은 공허진의 설명에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데미도, 공략회사도 제대로 거치지 않았던 탓에 공략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근데 대리님, 리스폰은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거 아닌가요?”
“그렇죠.”
“그럼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대개는 그렇게 해요. 하지만 우리 팀에 변화가 생겼잖아요.”
“변화요?”
“정석 씨가 들어왔잖아요.”
“아.”
윤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기에 맞춰서 공략 방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죠. 정석 씨 능력에 맞춰 포지션의 변화가 생길 거예요. 보급품의 수량도 달라지겠죠. 우리가 매번 계획서를 작성하는 이유는 공략을 좀 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예요.”
강주혁은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는 공허진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여전히 맹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처음 봤을 때 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던전에서도 사무실에서도 그녀는 헌터다웠다.
“공략을 효율적으로 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보급품을 적게 쓰면서 좀 더 빨리 공략을 끝내는 거죠.”
“근데 여기 대기업 아닌가요?”
“그렇죠.”
“그럼 보급품이 넘쳐나는 거 아닌가요? 돈 많잖아요.”
대기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 하지만 대기업일수록 돈이 새어나갈 만한 구멍을 더 철저하게 관리하는 법이다.
공허진은 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강주혁을 바라봤다.
‘이 사람을 어떻게 하죠?’
공허진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강주혁은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강주혁이 공허진에게 윤정석을 맡긴 건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지만 온순한 성격은 그대로였다. 유덕현과 마찬가지로 공허진은 남에게 쓴소리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반드시 좋은 직장인이 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원치 않더라도 악역을 맡아야 할 때가 많이 생긴다. 강주혁은 공허진에게 그걸 가르쳐 주고 싶었다.
지금이야 강주혁 앞이라서 잠잠하지만 윤정석은 본바탕이 반항적인 인간이다. 공허진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분명 대드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런 윤정석을 길들여보는 게 공허진에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푸.”
강주혁이 외면해버리자 공허진은 입을 비죽이 내밀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윤정석이 저런 상태인데도 태원공략에 들어온 건 강주혁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만약 몇 년 전이라면 서류에서 탈락했을 사람이니까.
회귀 전에도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넘어온 강주혁이 준수한 모습을 보이자 스펙을 우선시하는 서류전형을 폐지하고 필기시험 커트라인도 대폭 낮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단순히 성실한 모습을 보인 게 전부였지만 이번에는 아예 회사의 역사를 새로 써 내려가고 있었다.
강주혁이 들은 소문에 따르면, 신대길이 부회장이 되면서 힘을 되찾은 이윤철 사장이 입사시험을 전면 재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윤정석은 아마 그런 변화의 수혜자일 것이다.
“후우.”
낮게 한숨을 쉬는 사람은 공허진뿐만이 아니었다. 주선우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원래 직급으로 따지면 윤정석을 가르치고 관리하는 건 주선우의 몫이어야 했다. 하지만 주선우에게는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선우 씨, 숙제는 잘하고 있어요?”
옆 파트에서 이정인 과장이 이쪽을 보고 말했다.
“네. 과장님.”
“7시까지예요. 알죠?”
“알고 있습니다.”
이정인은 강주혁과 안다정의 부탁을 받아들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주선우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강주혁은 주선우의 실력을 단기간에 향상시키기 위해서 그를 업무에서 빼주었다.
하지만 그만큼 이정인이 엄청난 양의 숙제를 내주는 바람에 주선우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없는 날이 없었다.
“강 팀장님이 밥 사주시는 거죠?”
이정인 과장이 강주혁에게 물었다.
“밥은 강 팀장님이 아니라 제가 사줄 거예요. 다른 팀 팀장이랑 밥 먹는 건 이적행위예요. 허락할 수 없어요.”
안다정이 끼어들었다.
“어떡하죠? 저도 과장님께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네요.”
강주혁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정인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강 팀장님.”
안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켰다.
“네?”
“우리 신입 정말 봐줄 거예요?”
주선우를 이정인 과장이 도와주는 대신, 신입사원을 지도해 주겠다는 강주혁의 약속을 떠올린 것이다.
“경호 씨요? 본인이 원하면요.”
강주혁은 불과 몇 주 전까지 자신이 쓰던 책상에 앉아 있는 이경호를 슬쩍 봤다. 그 역시 윤정석과 마찬가지로 회귀 직전, 강주혁을 끝장낸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복수의 시간이 왔다.’
강주혁이 1부 3팀의 신입사원까지 봐주겠다고 한 이유는 회귀 전,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후배들을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워낙 돈독한 사이였고,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갔기에 악감정은 없었다. 그래도 괘씸하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회귀 전에도 대련을 빙자해서 후배들 두들겨 패는 걸로 악명이 높았던 강주혁이었다.
‘맞다 보면 실력도 느는 법이지.’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이경호가 고개를 들었다. 강주혁은 그를 보면서 악마처럼 씩 웃어 보였다.
강주혁과 눈이 마주친 이경호는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입사원에게 자유가 어디 있어요. 하라면 해야죠. 경호 씨.”
“네! 팀장님!”
안다정의 부름에 이경호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답했다. 얼마나 갈군 건지 그 모습이 꼭 자대배치를 받은 신병 같았다.
“앞으로 퇴근하고 강 팀장님한테 한 수 배워요. 시간은 강 팀장님이 정해줄 거예요.”
“……네. 팀장님.”
“마침 잘됐네요. 오늘 저녁에 정석 씨랑 훈련하기로 했거든요.”
강주혁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퇴근 후. 훈련장.
퍽!
“끅!”
딱!
“커억!”
강주혁에게 얻어맞은 윤정석과 이경호가 사이좋게 나뒹굴었다.
둘이 동시에 덤비는데도 강주혁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다. 심지어 강주혁은 검을 쓰지도 않았다.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경호도 윤정석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뛰어난 헌터다. 둘 다 신입사원 평균 전투력을 상회하는 실력자인데도 불구하고 강주혁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가지고 던전에서 살아남겠어요?.”
강주혁은 두 사람을 보면서 킬킬거렸다. 그답지 않게 몹시 신나 보였다.
“헉, 헉.”
“으으.”
내공과 체력은 진즉에 바닥이 났다.
어떻게 때리는 건지 한 방 맞을 때마다 태어난 게 후회될 만큼 아팠다.
두 사람은 몸도 정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 바닥을 기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퍼져있을 거예요? 몬스터들은 여러분이 그러고 있는 걸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어서 일어나요.”
“사, 살려주세요. 팀장님.”
한계에 몰린 이경호는 갑자기 빌기 시작했다. 강주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몬스터 앞에서도 그럴 거예요? 살려달라고 빌면 그놈들이 살려줄 거 같아요?”
“으아아악!”
확실히 윤정석이 이경호보다 나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강주혁에게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다.
퍽!
“억!”
그래도 결과는 똑같았다. 강주혁의 주먹에 맞은 윤정석이 뒤로 날아갔다.
“좋은 자세입니다. 경호 씨도 저 정도 파이팅은 있어야죠.”
이경호는 하얗게 질렸다. 눈앞에 퇴사라는 단어가 자꾸만 어른거렸다.
“저, 팀장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그때, 훈련장 당직을 서던 힐러가 강주혁에게 다가왔다.
“네? 무슨 일이죠?”
“제 영력이 별로 안 남아서…….”
강주혁에게 두들겨 맞은 두 사람을 치료하느라 계속해서 치유기술을 사용했더니 영력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윤정석과 이경호의 눈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힐러가 더는 치유를 하지 못하면 훈련을 빙자한 구타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치유 물약 챙겨왔습니다.”
강주혁은 핏빛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보이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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