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할 말 있으면 직접 나오라고 해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신대성이 강 씨 집안에게 저지른 짓을 알게 된 팀원들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신대성이 배후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안다정이 물었다.
“김동훈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왜 강 대리에게 그런 얘기를 했을까요?”
“저를 약 올리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요. 결국, 대가를 치렀지만요.”
“회장님도 알고 계세요?”
“아마 알고 계실 겁니다.”
“태원공략에 들어온 것도 신대성 때문이었군요.”
“네. 복수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막막하더군요. 일단은 원수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도 있었고요.”
안다정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무서워서 평생 피해 다녔을 것 같은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덕현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평범한 서민이 재벌을, 그것도 언제든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헌터 업계 재벌을 적대하는 건 미친 짓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강해지니까 공포를 잊게 되더라고요.”
“그래. 다른 사람한테야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너한테는 아닐 수도 있겠다.”
유덕현이 지금까지 강주혁이 보여줬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공허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허진 씨. 얘기해요.”
강주혁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경찰에 신고하거나 언론사에 제보하는 건 어때요?”
“저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뚜렷한 증거가 없어서 어려울 것 같아요. 법이나 여론으로 처벌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안타깝게도 당사자의 증언 빼고는 제시할 수 있는 게 없네요.”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나요?”
안다정이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고요. 게다가 신대성이 저를 노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처음이 아니라고요?”
강주혁은 마석 도마뱀 새끼를 잡으러 갔다가 양준기가 보낸 진유철과 싸웠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일행들에게는 감춰왔던 일이다.
“뭐? 진유철 선배랑?”
가장 놀란 건 역시나 유덕현이었다. 그에게 사수인 진유철은 태원공략에 자리를 잡도록 만들어준 은인이었으니까.
“네. 팀장님.”
“……선배는 어떻게 되었나?”
“그냥 물러가셨습니다. 저도 추격하지 않았고요. 팀장님 말씀대로 엄청 강하시더군요. 신유정 과장이랑 저도 죽을 뻔했습니다.”
유덕현이 안색이 파리해졌다.
“왜 진작 얘기 안 했어?”
“신유정 과장이 간곡히 부탁해서요. 팀장님을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유덕현은 침통한 얼굴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양준기 전무가 회장님께 박살이 났습니다.”
“그게 너를 건드렸기 때문이었구나.”
“네. 신유정 과장이 보고를 하자마자 회장님이 곧장 양준기 전무를 찾으시더군요. 덕분에 저도 양준기 전무가 배후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개새끼”
유덕현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자 세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유덕현이 분노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기 팀원인 강주혁을 위협했다는 거였고 둘째는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진유철에게 시켰다는 것이다.
사람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은 걸로도 모자라 계속 더러운 일을 시키는 양준기를 떠올리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정규직 전환 임원면접 때 양준기 전무가 혹시 태원공략에 들어온 다른 이유가 있냐면서 떠보더군요. 아마 신대성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맞아. 양준기 전무는 신대성의 오른팔로 알려진 사람이야. 너를 위협한 것도 아마 신대성이 시켰을 거다.”
“회장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양준기 전무를 처벌하신 걸로 봐서 완전히 묵과하고 계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안다정의 물음이었다.
“도의적으로는 자식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혈육의 정 때문에 차마 내치지 못하시는 게 아닐까요?”
강주혁을 대하는 신태원의 태도도 모호한 구석이 많았다.
아무리 회사에 큰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하더라도 강주혁이 나중에 자식들에게 큰 위협이 될 거라는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태원은 강주혁을 내치거나 위협하는 대신, 데리고 있는 쪽을 택했다.
어쩌면 정파 헌터 최고 원로라는 입장과 한 자식의 아버지라는 입장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 대리 계획은 뭐에요?”
“태원공략을 차지하는 겁니다.”
강주혁의 말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사람이 회사의 주인이 되겠다고 하면 다들 헛소리로 치부했겠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강주혁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신태원은 이미 머슴이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길도 제시해주었다. 대다수의 직원에게 그 길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겠지만 강주혁에게는 아니다.
“신대성에게 복수하는 방법으로요?”
“네. 신대성에게 가장 중요한 유산이니까요. 당연히 자신이 가져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가족도 아닌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면 속이 뒤집어질 겁니다.”
“그렇겠네요.”
안다정은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제가 세 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앞으로 저 때문에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회장님 계시는데도 살수를 보낼 정도로 막 나가고 있으니 나중에 회장님이 물러나시면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저랑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습니다.”
“주혁아.”
“네. 팀장님.”
“섭섭하게 왜 그러냐.”
“현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난 사실 겁쟁이라서 안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이 보이면 미리 피하자는 주의거든. 하지만 오늘부터는 예외를 둬야겠다.”
유덕현의 두 눈이 결의로 빛났다.
“그게 회장이든 사장이든 내 팀원을 건드리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는 거야.”
강주혁은 평소답지 않은 패기를 보여주는 유덕현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강주혁은 무엇이 평범한 소시민에 가까운 유덕현에게 저런 용기를 주었는지 잠시 생각해봤다.
그것은 수십억으로 불어난 재산일 수도 있고 그걸 벌게 해준 강주혁에 대한 고마움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진유철에 대한 안타까움일 수도 있고.
그게 무엇이든 간에 유덕현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고 지금의 그는 강주혁이 알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네가 누구랑 싸우든 간에 내가 네 방패가 되어주마.”
“저, 저도…….”
공허진도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대리님을 돕고 싶어요.”
강주혁은 공허진이 지금 내리는 결정의 무게감을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녀의 마음만큼은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나쁜 놈이 무서워서 강 대리를 멀리하고 싶지는 않아요.”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돌아올 거지?”
유덕현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신광에서 러브콜을 보내긴 했는데 거기에는 1부 3팀이 없네요.”
강주혁에게서 원하는 답변을 얻은 세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근데 곧바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뭐?”
“회장님이랑 거래를 좀 더 해보려고요.”
* * *
부회장직에서 물러난 신대성은 서울에 있는 한 고급 식당에 들렀다. 사신무극검 습득의 부작용으로 건강이 악화된 후로는 자주 오지 못했지만 이전부터 자주 들리던 단골집이었다.
미리 예약된 룸에 들어간 신대성은 식사를 하는 대신 벽에 등을 기댔다. 맞은편에는 비서가 앉았다. 남들이 보면 비서랑 밥이나 먹으려는 것인 줄 알 것이다.
“오셨습니까?”
벽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이 방은 떳떳하지 못한 만남을 위해서 일부러 방음이 안 되도록 만들어놓은 자리였다.
“일 처리를 왜 이따위로 하는 겁니까?”
신대성은 노기를 띤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그 김동훈이란 놈이 일 처리를 개판으로 하는 바람에 내 입장이 아주 곤란해졌습니다. 그놈을 나에게 보낸 것도 당신 아닙니까?”
부회장은 단순히 그룹 내 권력서열 2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부회장이 훗날 회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권대호가 떠난 이후 태원그룹의 부회장은 항상 신대성이었다. 하지만 신대성은 김동훈에게 아주 사소한 부탁을 한 대가로 부회장직을 잃었다. 수지에 맞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리죠.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지금 하시는 일만 잘 되면 태원 그룹 회장 자리도 우스워질 테니까.”
“입조심하시오. 태원이 우스워 보입니까.”
“제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될 겁니다.”
상대는 신대성의 으름장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신대성은 그런 태도가 몹시 거슬렸지만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아야만 했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강주혁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하더군요.”
상대의 태연한 어조에 신대성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주먹을 부들부들 떨자 식탁도 지진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비서는 노심초사하면서 신대성의 눈치를 살폈다.
분노는 신대성 자신에게도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신대성도 그걸 알기에 자신의 화를 다스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애초에 나를 노리고 벌인 짓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대단한 계획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기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호언장담하던 김동훈은 개죽음을 당했고 신대성은 많은 걸 잃었다. 상대방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해입니다. 우리는 그 일로 아주 중요한 인재를 잃었습니다. 우리가 부회장님을 망가뜨려서 얻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신대성은 상대의 목소리에서 웃음기를 읽을 수 있었다.
신대성은 상대가 고의로 일을 망쳐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일단은 속내를 감췄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면 당신들 일 처리 능력에 대해서 재고해봐야겠군요. 어떻게 이렇게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겁니까?”
“김동훈을 잃었지만 원하는 건 얻었습니다.”
“뭐라고요?”
“강주혁이 청룡검을 알고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배우지도 못했는데 잘만 쓰더군요.”
“김동훈이 죽어버렸는데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겁니까?”
“이렇게 하면 알 수 있죠.”
신대성은 화들짝 놀랐다. 목소리가 벽 너머가 아니라 정면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비서의 눈이 광기 어린 핏빛을 흘리고 있었다. 표정도 기괴하게 찡그리면서 웃고 있었고 목에서도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신대성이 알고 있던 비서 대신 끔찍하고 기이한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내 비서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나는 나의 사도와 언제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보고 듣는 것이 곧 내가 보고 듣는 것이 되죠. 굳이 김동훈에게 보고를 듣지 않아도 그가 무엇을 보고 들은 건지 알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린 겁니다. 강주혁은 분명 청룡검을 익혔습니다. 분명 비급도 있을 겁니다.”
신대성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이 블랙 헌터라는 족속들에게는 꺼림칙함을 넘어 혐오감을 느꼈다.
‘사신무극검만 익히면 네놈들부터 죽여주마.’
신대성은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 * *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날이었다.
강주혁은 우산을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저녁에 먹을 찬거리를 사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어머니가 보내주는 반찬으로 해결했지만 며칠 동안 집에만 있으니까 금방 동이 나고 말았다.
저벅. 저벅.
강주혁은 빗소리를 들으면서 거리를 따라 걸었다. 며칠 동안 여유를 누리다 보니 북적거리는 강남 거리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웬 놈이지?’
강주혁은 자신을 천천히 따라오는 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를 따라서 천천히 움직이던 고급세단이 멈춰 섰다.
조수석이 열리더니 정장 차림의 건장한 남가가 나왔다. 풍기는 기세로 봐서 제법 강한 헌터인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혹시 강주혁 씨 되십니까?”
남자가 우산을 든 채 강주혁에게 다가왔다.
“그런데요?”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는 신대성 부회장님의 개인비서입니다. 부회장님께서 강주혁 씨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주혁은 잠시 비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지쳐 보였다.
원래는 제법 강한 사람인데 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기운이 다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신대성 씨는 저 차 안에 있습니까?”
강주혁은 속이 들여다보이지는 않는 유리창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네. 부회장님께서는…….”
“잘렸잖아요. 부회장.”
강주혁의 지적에 남자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 하지만 프로답게 금방 얼굴을 고쳤다.
“……전 부회장님께서는 차에 계십니다.”
“할 말 있으면 직접 나오라고 해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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