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긴 얘기가 될 것 같군요
오크들은 보았다.
자신들이 두려워하던 우두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그들이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던 우두머리의 머리는 도끼에 찍힌 것처럼 반으로 쪼개어져 있었다.
그 상처로부터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머리통을 들고 있는 인간을 적셨다. 피를 뒤집어쓴 인간은 흉흉한 살기를 머금은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
대다수의 오크들은 공포감에 사로잡혀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헌터들을 집어삼킬 것 같던 기세가 꺾여버렸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소수이기는 했지만 우두머리에 충성하는 오크들도 있었다.
크아아아아!
한 충성파 오크가 도끼를 번쩍 들어 올리면서 강주혁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놈은 그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푹!
끄억!
충성파 오크가 피를 쏟으면서 옆으로 고꾸라졌다. 바로 옆에 있던 오크가 충성파 오크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이다.
피부색이 다른 두 오크는 한 때 서로 적대하던 부족이었고 그 응어리는 지금도 남아있었다. 그들 모두를 압도할 수 있는 구심점이 사라진 지금, 케케묵은 증오가 다시 폭발했다.
푸직! 콱!
오크들은 피부색깔에 따라 패거리를 지어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바로 눈앞에 인간의 군대가 있다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건 어리석음보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부족 하나만 해도 숫자가 1만이 넘으니 자기들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한 줌 밖에 안 되는 인간들을 죽이는 것보다 원수지간인 동족을 말살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성벽 위로 올라왔던 오크들도 자신의 무리로 돌아갔다. 전장은 순식간에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공격 중지!”
이윤철 사장이 명령을 내렸다.
“상황을 지켜본다.”
헌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힐러들이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면서 부상병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쿵!
강주혁은 들고 있던 머리통을 성벽 바닥에 내던졌다.
“피 좀 닦아요.”
안다정이 자기 손수건을 내밀었다.
“많이 더러워질 텐데요?”
자기 몰골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 강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써요.”
강주혁은 잠시 안다정을 바라보다가 손수건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얼굴에 묻은 피를 훔치자 손수건은 금세 걸레처럼 변해 버렸다.
“강 대리 말대로 됐네요.”
“저는 그냥 분위기만 우리 쪽으로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회귀 전에도 블랙 스킨이 죽자마자 남은 오크들이 사분오열해서 손쉽게 소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극적으로 분열할 줄은 몰랐다.
“이번 웨이브 데이 때도 네가 일등공신이 되는구나.”
유덕현이 대견스러워하면서 강주혁의 어깨를 두들겼다.
“강주혁 대리.”
그 때, 신태원과 이윤철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떻게 한 건가? 저건 뭐지?”
신태원 회장이 블랙 스킨의 머리통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 군단의 대장노릇을 하던 오크였습니다.”
“요새를 공격했다는 그 놈?”
“네. 본대로 복귀하려고 빠져나가는 걸 추격해서 잡았습니다.”
“신기한 일이군. 고작 저 한 놈 때문에 이렇게 상황이 바뀔 줄이야.”
수십 번의 웨이브 데이를 경험했던 신태원도 지금 상황이 믿겨지지 않았다.
“요새 앞을 지날 때부터 조짐이 있었습니다.”
강주혁은 오크들이 그때부터 자기들끼리 싸웠고, 우두머리가 당사자들을 본보기로 죽임으로써 사태를 진정시켰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무리해가면서 저놈을 쫓은 건가?”
“네. 회장님.”
“자네들이 옳았군.”
신태원 회장이 강주혁과 유덕현을 번갈아 보면서 웃었다.
강주혁에게 얘기는 안 했지만 유덕현은 강주혁에게 블랙 스킨 추격을 허락했다가 윗선에게 박살이 났었다.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핵심인력인 강주혁을 위험하고 불필요한 일에, 그것도 단독으로 투입 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강주혁은 블랙 스킨을 척살하고 오크들의 분열시킴으로써 자신도 유덕현도 옳았다는 걸 증명해냈다.
“운이 좋았습니다.”
“애썼네. 이번 웨이브 데이에서 자네 공이 가장 크네.”
신태원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전례 없는 대규모 웨이브로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할 뻔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걱정이 줄어들었다. 아직 상황을 더 지켜봐야겠지만 공략 1부 3팀이 돌아오기 전만큼 암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신태원 회장은 강주혁을 보면서 뿌듯해했다. 그를 볼 때마다 10년은 더 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장님.”
그러나 강주혁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음?”
“블랙 스킨을 추격하는 중에 저를 노리는 암살자를 만났습니다.
“뭐?”
신태원과 이윤철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보게.”
“암살자는 김동훈이라고 예전에 제 아버지가 차린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알기로 신대성 부회장하고도 아는 사이라고 하더군요.”
신태원은 신대성이 강 씨 집안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어쩌면 김동훈에 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전투에도 프리랜서 헌터로 참여했는데 전선을 이탈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됐나?”
“제가 죽였습니다.”
“시신은?”
“현장에 있습니다. 싸울 때 사용하는 기술들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블랙 헌터들의 수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어쩌면 블랙 헌터일 수도 있고요. 그리고…….”
강주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서 신태원에게 보여주었다.
“그건!”
신태원 회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이 검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신태원은 대답하는 대신 뜸을 들였다.
“내가 젊은 시절 썼던 검일세. 하지만…….”
“신대성 부회장에게 물려주셨겠죠.”
강주혁의 발언에 주변에 정적이 내리깔렸다. 이윤철 사장과 1부 3팀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강주혁과 신태원을 번갈아 봤다.
“그자가 신대성 부회장에게 사주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검으로 저를 공격했습니다.”
신태원 회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다.
“이 회사에 들어온 지 이제 반년도 다 되어가는군요. 그동안 저는 회사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회사에게 큰 이득을 안겨주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동안 회사 사람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네 번이나 겪었습니다.”
신태원 회장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강주혁의 말에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아무리 큰돈을 준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일하고 싶지는 않군요. 더럽고 치사해서 못해 먹겠습니다.”
강주혁은 신태원 앞인데도 언성을 높이면서 역정을 냈다. 회장과 사장이 대리에게 꾸지람을 듣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할 말을 끝낸 강주혁은 신태원과 이윤철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1부 3팀 사람들을 마주 봤다.
“팀장님, 과장님, 허진 씨,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주혁아,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는 거 아닐까?”
“맞아요, 강 대리. 이러지 말고 다 끝나고 얘기해요.”
“저도 대리님이 남으셨으면 좋겠어요.”
강주혁은 세 사람에게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놈들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면 잔당처리만 하면 될 겁니다. 중요한 고비는 지났습니다.”
“지금 오크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안다정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회사에서 제가 할 일은 끝났습니다. 세 분께는 그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네요. 솔직히 이 팀이 아니었으면 진작 그만뒀을 겁니다. 제대로 된 작별 인사는 웨이브 데이가 끝나면 하죠. 그럼.”
강주혁은 신태원과 이윤철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밖으로 떠나버렸다.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그를 지켜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회사를 떠난 강주혁은 오랜만에 휴식을 취했다.
가족들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다. 정말로 태원공략을 떠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신태원을 한 번 떠봤을 뿐이다.
아마 신태원은 강주혁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강주혁이 회사에 가져다준 이득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태원은 강주혁이 신광공략의 남궁천 사장에게 이직제의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만약 강주혁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신광으로 옮겨간다면 태원공략에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다.
[강 대리, 잘 지내고 있어요?]
회사를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 안다정에게 연락이 왔다. 웨이브 데이 뒤풀이 겸 송별회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강주혁은 흔쾌히 승낙했다.
약속 당일.
“이야, 며칠 쉬더니 인물이 훤해졌네.”
유덕현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팀장님. 잘 지내셨어요?”
“너 때문에 죽을 맛이다. 이놈아.”
“정말 죄송합니다.”
“강 대리가 없어서 공략 1부는 완전 초상집이에요. 임재경 부장님이 당장 잡아 오라고 길길이 날뛰셨어요.”
안다정도 핀잔을 줬다.
“다른 사람들도 대리님 보고 싶어해요. 특히 4부 4팀 사람들이요.”
공허진도 거들었다.
“면목 없습니다.”
강주혁은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자신이 떠나는 걸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으니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이브 데이는 잘 마무리되었나요?”
“인명 피해 제로. 강 대리 말대로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태반이 죽어나갔어요. 나중에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도주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미리 포위망을 구축해놔서 일망타진할 수 있었죠.”
“잘됐네요.”
“이 모든 일을 해낸 사람이 중간에 나가버리지만 않았다면 정말로 회사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을 거예요.”
원래 웨이브 데이가 끝나면 회장이 공을 세운 헌터들을 치하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장이 주인공도 없는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냐면서 매년 있는 행사를 취소해 버렸다.
“자자, 주혁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내가 주혁이였어도 회사 때려치웠을 거야. 허진이 배고프겠다. 빨리 밥부터 먹자.”
“룸 잡아놨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강주혁은 일행과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와서 주문해 놓은 덕분에 곧바로 먹기만 하면 됐다.
“크, 역시 센스 좋아.”
“시장하실 것 같아서요.”
“고, 고기…….”
공허진의 동공이 떨렸다.
“어서 먹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배를 채우고 술을 몇 잔 돌리자 유덕현이 본론을 꺼냈다.
“주혁아.”
“네?”
“실은 회장님이 직접 불러서 너를 설득해 보라고 하셨어.”
강주혁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치사한 방법을 쓰시는 군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팀만 생각한다면 태원공략에 뼈를 묻고 싶을 마음입니다.”
“짜식, 말이라도 고맙다.”
“진심입니다. 근데 회장님이 저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웨이브 데이에 대한 인센티브 10억이랑 과장 진급을 제안하셨다.”
“나쁘진 않군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잘 아실 텐데…….”
“신대성이 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좌천당한 겁니까?”
“아니. 완전히 그만뒀어요.”
안다정이 대신 답했다.
“역시 로열패밀리는 다르군요. 감옥에 가야 할 죄를 지었는데도 잘리는 것 정도로 끝나는 걸 보면요.”
“주혁 씨가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범죄성립은 어려울 거 같아요.”
안다정의 지적에 강주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 있던 사람은 강주혁뿐이라 증인도 없다. 던전 내부라서 녹음을 할 수도 없었고.
신대성이 참마검을 도난당했다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애초에 강주혁도 법으로 신대성을 궁지에 모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부회장 자리는 공석인 건가요?”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신대길 태원상사 사장이 부회장이 될 거라는 얘기가 있어요.”
“그렇군요.”
강주혁은 담담하게 말했으나 속으로는 웃었다. 신태원의 세 아들 중에 가장 평판이 괜찮고 강주혁에게 단 한 번도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얻었다.
헌터가 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부회장의 자리가 가지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신대길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도 다시 생겨날 것이다.
신대길을 잠재적인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는 강주혁에게는 바람직한 전개였다.
“주혁아.”
“네. 팀장님.”
“내가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
강주혁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유덕현에게 씩 웃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너 신대성이랑 무슨 일 있었냐?”
강주혁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언젠가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알아야 하는 얘기들이다.
지금이야 신태원 회장이 중간에서 막아주고 있지만 회장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신대성은 미쳐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강주혁 역시 맞붙을 놓을 생각이었고.
그때가 되면 강주혁이랑 가까운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험한 꼴을 당할 수 있다. 그러니 이들에게 상황을 직시하고 선택의 기회를 줘야 한다. 회사에 남아서 강주혁과 함께 싸워나갈지, 아니면 안전을 위해서 회사를 떠날지를.
이제 다들 수십억의 재산을 가진 부자니까 회사를 떠난다 하더라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긴 얘기가 될 것 같군요.”
강주혁은 강 씨 집안과 신 씨 집안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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