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놈을 잡았습니다
사신무극검. 2형 3식.
청룡강림검(靑龍降臨劍).
강주혁이 김동훈을 둘러 쪼개버린 기술의 이름이었다. 순간적으로 번개로 변해 하늘로 날아오른 후, 낙뢰 그 자체로 떨어지는 기술.
청룡검과 관련된 기술들 중 위력 면에서 최강으로 사실상 청룡검 계열의 비전절기나 마찬가지.
하지만 그만큼 내공과 체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강주혁도 이론적으로는 이해를 했지만 내공이 모자라서 연습도 제대로 못했던 기술이었다. 그걸 실전에서 제대로 써먹은 것이다.
“쿨럭!”
강주혁은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마검의 도움으로 힘을 S급까지 끌어올렸는데도 몸이 감당을 못하는 것 같았다.
퉤!
두 개로 쪼개어져 속을 드러내고 있는 김동훈의 시신에다가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개새끼.”
갈아 마셔도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파스스.
수백에 달하던 임프들은 김동훈이 숨을 거두자 붉은 액체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드넓은 설원에는 스켈레톤들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강주혁은 반지를 이용해 그들에게 안식을 내렸다.
‘죽여라. 죽이고 또 죽여라.’
칼집 안에 넣어두면 항상 흐릿해지던 마검의 목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힘을 빌리는 대신 마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내어준 결과였다.
“다 끝났는데 뭘 또 죽이라는 거야.”
강주혁은 짜증을 부렸다. 마검의 영향으로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곁에 누가 있다면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강주혁의 마음 한구석에서 잠들어있던 이성이 작은 목소리를 냈다.
천만다행으로 주변에 더 이상 싸우거나 죽일 상대가 없었다. 강주혁의 마음은 더디지만 조금씩 평정을 되찾아갔다.
“네 할 일은 끝났다.”
강주혁은 검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었다.
‘으…… 악…….’
성석의 영향을 받은 마검이 다시 침묵에 잦아들었다.
‘할아버지가 정말 그랬을까?’
마검의 악영향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김동훈이 했던 얘기들 때문에 마음이 착잡했다.
김동훈의 정체도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거짓말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강주혁이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닌 할아버지를 증오하게 된다고 해도 김동훈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그리고 김동훈은 강주혁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곧 죽을 사람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강주혁은 자신이 할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헌터 일을 가업으로 삼고 아주 강력한 검술을 창안했다는 것 빼고는.
‘가족들한테 물어봐야겠다.’
강주혁은 가족에 관한 걸 자신보다 외부인인 김동훈이 더 잘 안다는 사실에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마 어린 나이의 아들에게 어른들의 갈등 같은 것들을 되도록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강주혁이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집안이 멀쩡했다면 아버지가 집안의 내력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걸 가르쳐줬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잘 됐군.’
강주혁은 김동훈이 들고 있던 참마검을 집어 들었다.
* * *
“이쪽이 확실해?”
유덕현이 물었다.
“네. 팀장님.”
안다정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행은 강주혁이 남겨놓은 <별가루>를 따라 가고 있었다.
<별가루>란 헌터들이 후발대를 위해 던전에 흔적을 남길 때 사용하는 가루다.
언뜻 보기에는 무색무취의 가루지만 내공이나 마나를 눈에 집중해 안력을 돋운 상태로 보면 별처럼 빛난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빛이 사라지지 않고 약간의 마력을 불어넣으면 날아가지도 않기 때문에 길을 표시할 때는 안성맞춤이다.
“이 자식은 그 사이에 참 멀리도 갔네.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가속화 마법을 계속해서 썼나 봐요.”
“미치겠네.”
요새의 전투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수천에 달하던 오크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태반이 죽었고 나머지는 줄행랑을 쳤다.
헌터들이 죽인 오크들은 대략 천 마리 정도. 백 마리 정도는 통로로 들어오려다가 강주혁에게 죽었고 나머지는 요새를 오르려다가 공격을 받아서 추락사했다.
본부에서는 요새에 있는 헌터들을 모두 철수시키려고 했으나 강주혁을 남겨두고 올 수는 없었다. 일단 4부 4팀만 돌려보내고 1부 3팀은 강추혁을 찾으러 나선 것이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보내지 말지 그랬어요. 아무리 강 대리가 난 사람이어도 단독행동은 무리죠. 아직 임원도 아니잖아요.”
“그 녀석이 하도 그럴듯하게 말해서 어쩔 수 없었어.”
유덕현은 후회스럽다는 식으로 말했으나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열 명이어서 수천을 막아낸 쾌거를 이뤄냈으나 전략적으로 큰 가치는 없는 작전이었다. 적의 일부만 퇴치했을 뿐이니까.
여전히 수만의 오크들이 방어선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빠르면 오늘밤에, 늦어도 내일에는 방어선에 도달할 것이다.
요새를 방어적 거점으로 활용한다는 강주혁의 계획이 제 구실을 하려면 반드시 우두머리인 검은 오크를 잡아야한다.
“강 대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부장님이나 사장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유덕현은 부장이랑 사장이 나서기 전에 안다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안다정의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강주혁의 안전이 걸려있어서 더 날카로워져있는 것 같았다.
“어?”
“왜 그래?”
“전투의 흔적이에요!”
안다정은 갑자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던전에서 이런 식으로 흥분해서 돌발행동을 하는 건 피해야한다.
유덕현은 안다정답지 않은 행동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싸웠다고?”
뒤따라온 유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언뜻 보기에서는 주변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안다정이 바람의 힘으로 눈보라를 막아내는 동시에 바닥에 쌓인 눈을 밀어내자 대지의 상처가 드러났다.
임프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지만 스켈레톤의 뼈들은 그대로였다.
“스켈레톤이랑 싸운 건가?”
“아닐 거예요. 그런 것치고는 느껴지는 마력이 너무 커요. 뭔가 더 있었을 거예요.”
안다정이 지적에 유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들이 마력을 사용해서 전투를 벌이면 항상 그 흔적이 대기에 남는다. 세 사람 모두 그걸 감지하고 있었다. 전투는 비교적 최근이었고 아주 격렬했다.
“얼마나 대판 싸웠기에 이 정도일까?”
“강 대리가 싸움은 잘해도 아직 내공이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안다정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강주혁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이곳에 있었다. 강주혁이 이겼다는 흔적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옥죄는 것 같았다.
“팀장님! 과장님!”
그 때,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공허진이 두 사람을 불렀다.
“왜 그래?”
“여기 시신이 있어요!”
“시신?”
두 사람은 공허진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말대로 두 개로 쪼개어진 시신이 있었다.
“이 사람 혹시?”
“맞아요. 아침에 강 대리랑 시비 붙은 사람이에요.”
몸뚱이는 나눠졌지만 얼굴은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게다가 복장도 일치했다.
“주혁이가 죽인 건가?”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죠? 방어선에 있어야할 사람이잖아.”
“그렇지…… 젠장,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일단, 주혁이 흔적부터 찾자.”
세 사람은 다시 흩어져서 강주혁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별가루가 보여요!”
이번에도 공허진이 흔적을 발견했다.
안다정은 숨을 내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강주혁의 패배라는 끔찍한 사실을 떠올리다가 그게 아니란 걸 확인하자 안도감이 든 것이다.
강주혁은 역시나 강주혁이었다.
여기서 전투를 벌인 것은 맞지만 그는 이번에도 패배하지 않았고 자신의 임무를 향해 나아갔다.
“잘 했어. 어서 가자.”
“네. 팀장님.”
세 사람은 빠른 속도로 걸었다. 해가 지평선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큰일이네. 해 떨어지면 우리도 난감해지는데. 그 때 그 온천은 여기서 많이 멀지?”
“네. 방향도 다를 거예요.”
“해 떨어지기에 찾기를 빌자. 이 자식이 왜 이렇게 멀리까지 간 거야. 그냥 적당히 하고 돌아오지.”
세 사람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계속해서 달려갔다.
하지만 한 시간을 걸어도 강주혁은 나타나지 않았다. 해는 완전히 저물고 말았다.
“안 과장.”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유덕현의 표정이 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
“우리 돌아가야 돼. 여기서 야영하는 건 굉장히 위험해. 가서 할 일도 있고.”
“알아요. 그래도 조금만 더 가 봐요.”
안다정은 고집을 부렸다. 사실, 유덕현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팀장은 언제나 팀원들의 안전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강주혁 한 사람 때문에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 딱 한 시간만 더 가보자.”
일행은 어둠 속에서 별가루의 흔적을 따라서 계속해서 걸었다.
저벅. 저벅.
다시 한참을 걸었을 때, 꿈에도 그리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이에요.”
안다정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일행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무기를 꺼내들었다.
“강 대리?”
“과장님?”
“주혁아!”
“팀장님도 오셨군요.”
“야, 이 죽을 놈아! 우리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유덕현은 강주혁에게 꿀밤이라도 먹일 요량으로 달려들었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너, 괜찮아?”
“네. 팀장님.”
강주혁은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얼굴 표정도 금방이라도 누구를 죽일 것처럼 흉흉했다.
“대리님, 혹시 다치셨으면 제가…….”
공허진이 주뼛거리면서 다가왔다.
“괜찮아요. 물약으로 치료했어요.”
“강 대리,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 있어요?”
안다정의 목소리를 들은 강주혁은 고개를 거칠게 털고는 표정을 풀었다.
마검을 한 번 더 사용했더니 머리가 혼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놈을 잡았습니다.”
강주혁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줄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거의 크기가 공허진이랑 비슷한 머리통이 앞으로 끌려나왔다.
강주혁은 코끼리 상아만한 뿔나팔을 그 위에 던졌다.
* * *
태원공략의 웨이브 데이 방어선.
밤늦게 방어선에 당도한 거대오크들은 곧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눈보라를 헤치면서 이틀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하고도 그들은 지칠 줄 몰랐다.
“온다!”
“조심해!”
헌터들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망할 괴물 놈들, 왜 이렇게 센 거야!”
평소에 상대하던 오크하고는 차원이 다른 전투력에 헌터들은 당황했다.
C급 이하의 헌터들은 일대일로 상대하는 게 불가능해서 사실상 전투보조원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전투를 도맡은 B급 이상 헌터들의 피로가 엄청나게 쌓여갔다.
게다가 숫자도 헌터들의 수십 배가 넘으니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작년 이맘때쯤부터 열심히 쌓아왔던 성벽도 신체스펙이 오거랑 비슷한 수준의 오크들이 몰려들자 큰 도움이 안 되었다.
앞 열에 있던 오크들이 사망하자 시체가 계단 역할을 해버린 것이다.
“덤벼라! 이 못생긴 쓰레기들아!”
“어이, 거기 조심해! 지금 뭐하는 거야!”
임원들이 있는 곳에서는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윤 대리! 정신 차려!”
“힐러! 여기 힐 좀 줘요!”
하지만 일반헌터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는 부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미친 짓이야…….”
“일단, 살고 봐야지.”
프리랜서 헌터들 중에서는 계약을 파기하고 전선을 이탈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목숨보다 소중할 순 없었다.
“이 사장.”
“네. 회장님.”
성벽 위에서 오크를 베어낸 이윤철을 향해 신태원이 걸어왔다. 그의 검에도 오크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상황은 좀 어떤가?”
“많이 안 좋습니다.”
“주가가 다시 떨어지겠군.”
신태원이 침음을 흘렸다. 자신을 포함해서 일선에서 물러난 원로들까지 총출동했으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승리하더라도 피해가 막심할 것이 자명했다. 웨이브 데이 때 사상자가 나오는 건 여론이나 정부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해준다. 그래도 회사의 평판에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와아아아!”
그 때, 방어선 뒤쪽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성벽 아래에서 대기 중인 헌터들이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이 내준 길을 따라 네 사람이 성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1부 3팀 녀석들이군.”
신태원은 안력을 돋우어 얼굴을 확인했다.
“이상한 걸 들고 있군요.”
선두에 선 강주혁과 유덕현이 함께 어깨로 바윗덩어리 같은 걸 짊어지고 있었다.
“오크 머리? 설마?”
1부 3팀은 계단을 따라 성벽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안다정이 들고 있던 뿔을 유덕현에게 건넸다. 그는 그것을 입에 대고 힘껏 불었다.
부우우우우우웅.
다른 오크들이 쓰던 뿔나팔보다 몇 배나 크고 굵직한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우두머리만이 가질 수 있는, 우두머리만이 쓸 수 있는 뿔나팔. 그 소리를 알아들은 오크들이 동작을 멈추고 나팔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강주혁은 지구를 짊어진 아틀라스처럼 블랙 스킨의 머리통을 번쩍 들어 올린 채 오크들을 내려다봤다.
떠들썩하던 전장에 정적이 내리깔렸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