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간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광활한 눈보라에서 김동훈이 강주혁을 찾아내는 것은.
강주혁은 공략회사의 웨이브 방어선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왔다. 프리랜서 자격으로 참여한 김동훈은 방어선의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명령을 어기고 탈영하는 건 가능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제단에서 바람의 힘을 빌리지 않는 이상 이 눈보라를 뚫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설사 그게 가능하더라도 시간적인 문제가 있다. 방어선에서 이곳까지 도보로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하루는 걸릴 테니까. 몇 시간 만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문제들을 다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강주혁의 위치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뭘 그렇게 놀라? 반가워서 그래?”
김동훈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히죽거렸다.
척!
강주혁은 대답 대신에 검을 뽑아 들었다.
“네놈은 인간이 아니군.”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
김동훈의 눈이 빛나면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서 사이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대성이 쓰레기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미친놈인 줄은 몰랐군.”
김동훈의 정체가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정파 헌터 최고 원로의 아들이라는 인간이 저런 존재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실소가 나왔다.
“우리 부회장님을 너무 미워하지 말 거라. 꽤 쓸 만한 양반이거든.”
김동훈이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을 청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삿된 기운을 밀어냈다.
참마검(斬魔劍).
강주혁도 회귀 전에 본 적이 있는 검이었다. 신태원 회장이 애용하던 보검들 중 하나로 장남인 신대성에게 물려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날 죽이라고 시킨 건가?”
“너한테 인사나 하라고 하더군.”
“잘 됐군. 이렇게 네놈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강주혁은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억눌러왔던 투지와 살기를 다시 피어 올렸다.
김동훈은 자신을 향한 적의를 음미하는 것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으음, 아주 잘 컸구나.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겠군.”
아버지라는 말에 눈이 돌아간 강주혁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콰지지직!
데몬의 흑검이 토해낸 전격이 공기를 찢어발겼다. 번개가 눈보라와 만나자 스파크가 터져나갔다.
쾅!
피할 줄 알았던 김동훈은 참마검으로 대검을 막아냈다. 두 개의 힘이 격돌하면서 근처에 쌓여 있던 눈들을 한순간에 녹아버렸다.
눈이 사라지면서 드러난 흙바닥에는 해골이 가득했다.
‘강하다.’
강주혁은 두 손으로 대검을 휘둘렀지만 김동훈은 한 손으로 막았다. 체구도 강주혁이 훨씬 더 컸다. 그런데도 김동훈은 힘겨루기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유덕현의 사수였던 진유철과 싸웠을 때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하지만 그때에 비해 강주혁은 훨씬 더 강해졌고 검도 보급품이 아니라 S급 아티팩트였다.
‘검 때문인가.’
데몬의 흑검도 강하지만 참마검도 그에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명검이다.
그리고 검의 이름으로 유추해보건대, 봉마검과 유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상성으로도 불리했다.
‘정면승부는 무리다.’
강주혁은 무리하지 않고 뒤로 몸을 날렸다. 첫 합에서 견적이 나왔다. 김동훈은 지금의 강주혁보다 강하다.
하지만 강주혁은 언제나 자신보다 강한 상대들하고만 싸워왔다. 계획이 없던 일이 닥치더라도 그에게는 항상 계획이 있었다.
“놀라는 눈치구나. 태원공략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 가고 있는 유망주가 감옥에서 몇 년을 썩은 퇴물에게 밀렸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놀랄 것 없다. 네가 약한 게 아니라 내가 강한 거니까.”
김동훈은 자신의 검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여유를 부렸다.
“네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얘기는 나도 들었다. 역시 핏줄은 속일 수가 없는 법이지. 너는 네 아버지랑 달리 똑바로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입조심 해라. 아버지는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안 줬으니까. 너 같은 쓰레기하고는 다르다.”
“그래. 쓰레기는 아니지. 하지만 한심한 얼뜨기에 소심한 졸장부였지.”
강주혁은 증오심으로 인해 정신이 혼탁해지는 걸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평정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전투에 임할 때는 항상 냉정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 대신 마음껏 증오에 몸을 맡겼다.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게 정답이었다.
“네 아버지는 지금의 너처럼 살았어야 했다. 시골 촌놈으로 살면서 검을 썩히기에는 아까운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다 죽어가는 네 할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촌구석에서 허송세월을 했지.”
강주혁은 대답하는 대신에 계속해서 살기를 끌어냈다. 그리고 그 살기를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혹시 그거 아나? 네 아버지에게 비급을 만들라고 권유한 게 나라는 거. 그 좋은 걸 썩히지 말고 사람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자고 했지. 그렇게 해서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보자고.”
김동훈의 얼굴에 순간 짜증이 스쳐 갔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네 할아버지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 비급 몰래 만들다가 네 할아버지에게 걸려서 다 날려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떻게든 가문의 검술을 체계화해서 남기려는 아버지랑 그걸 못하게 하려는 할아버지가 시도 때도 싸웠지.”
강주혁은 몰랐던 일이다. 강주혁이 있는 자리에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네 아버지가 너를 염두에 두고 비급을 만든다는 걸 알고 할아버지가 네 단전을 폐할 생각도 했었다. 네가 주작검밖에 못 배운 것도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 때문이지.”
강주혁은 충격을 받았다. 그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좀 무뚝뚝한 사람이었을지언정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너는 네가 네 형보다 헌터로서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유감스럽게도 아니다. 어렸을 때는 네 형이 너보다 더 뛰어났지. 하지만 네 할아버지가 의도적으로 단전을 망가뜨려서 너보다 열등하게 된 거다.”
강주혁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김동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 미치광이 노인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검술을 없애버리는 걸 막기 위해서 네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렇게 비급을 만들다가 걸려서 날려버리기를 반복했지. 회사 사람들은 죄다 네 할아버지의 측근들이었고 그들은 항상 네 아버지와 날 감시했다. 나는 그냥 그 촌구석을 떠나자고 얘기했지만 네 아버지는 끝끝내 내 말을 듣지 않았지.”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지?”
“죽더라도 진실을 알고 죽으라는 작은 배려? 네 아버지가 네 할아버지의 말 대신에 내 말을 들었다면 내가 신대성을 찾아갈 일도 없었을 거다.”
김동훈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강주혁의 살생부에서 1등과 2등이 자리를 바꿔야 한다.
“으아아아!”
강주혁은 가슴속에 모아두었던 분노를 일제히 터뜨리면서 김동훈에게 돌진했다.
쾅!
두 개의 검이 격돌했다.
“큭!”
김동훈은 뒤로 쭉 밀려나더니 왼손으로 오른 팔목을 부여잡았다. 이번에도 정면에서 막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그 검 때문인가?”
김동훈은 데몬의 흑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강주혁은 검에서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기임…… 도웅…… 후운…….’
마검이 강주혁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목소리를 밀어내기 위해서 정신을 다잡거나 검을 칼집에 넣었을 것이다.
서큐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마검도 강주혁이 내면에 품고 있는 어둠을 건드린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성을 잃는다.
하지만 지금은 폭주를 일으키더라도 다칠 사람이 없다. 오직 죽이고 싶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인간만 있을 뿐.
강주혁은 뒤를 생각하지 않고 악마의 속삭임과 내면의 폭력성에 모든 걸 맡겼다. 마(魔)를 베는 검을 더 큰 마로 베기로 한 것이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달라진 강주혁의 기세에 김동훈은 살짝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죽인다!”
강주혁은 김동훈을 몰아세웠다.
챙! 캉! 쾅!
강주혁의 맹공에 김동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불리할 때마다 뒤로 물러섰지만 강주혁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크윽!”
여유롭던 김동훈의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강주혁이 휘두르는 대검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한 번 막으면 손목을 넘어 팔 전체가 아파 왔다. 그렇게 되면 방어가 약해져 후속타를 허용하게 된다.
콰지직!
김동훈은 방어를 대신해서 회피를 택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강주혁의 대검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강주혁의 살의와 공명을 일으킨 데몬의 흑검은 자신의 힘을 아낌없이 퍼주었고 그 결과, 강주혁의 랭크는 S급을 상회하고 있었다.
힘도 속도도 김동훈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쾅!
“으윽!”
김동훈이 신음을 토했다. 강주혁의 대검을 막았다가 검이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나 자신의 어깨에 파고든 것이다.
강주혁은 악마처럼 웃으면서 그 자리에서 청룡뇌즉참을 사용해 공격력을 극대화했다.
서걱!
“으아아아악!”
강주혁이 대검이 김동훈의 팔을 날려버렸다. 그는 새하얀 바닥을 붉게 적시면서 뒤로 물러났다.
치이익!
땅에 떨어진 피가 빠르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풀어 오른 피는 점차 꼬리가 달린 악마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임프?’
한 방울의 피에서 고블린 만한 악마가 태어났다. 그 형상은 강주혁도 익히 알고 있는 임프였다. 하지만 임프가 저런 식으로 태어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김동훈의 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고 순식간에 수백의 악마들이 설원을 뒤덮었다.
‘인간이 아닌 건 확실하군.’
사악하고 기이한 마법을 사용하는 블랙 헌터들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들도 저 정도는 아닐 것이다. 저건 분명 인간의 범주를 넘어버린 기술이었다.
“가라! 저 건방진 녀석을 네놈들의 고향으로 데려가라!”
수백의 악마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형성되는 악마들이 강주혁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스걱!
강주혁은 대검을 휘둘러서 한 번에 열댓 마리를 동시에 쓸어버렸다. 피에서 태어난 소악마들은 검에 스치기만 해도 터져나갔다.
하지만 그 수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젠장.’
스물을 죽여도 사십이 달려들었다.
강주혁의 몸에 달라붙은 악마들은 피라미처럼 그를 할퀴고 물어뜯었다. 큰 상처는 없지만 작은 상처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콰지직!
강주혁은 청룡의 힘을 방출해서 악마들을 날려버렸다.
다섯 합에 백 마리 정도를 잡았지만 여전히 수백의 악마가 설원을 뒤덮고 있었다.
쏴아아.
강주혁 주변에 있던 악마들의 몸에서 붉은 연기가 솟아났다. 그것들은 서서히 김동훈에게 빨려 들어갔다. 잘려나갔던 팔이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네 피가 아주 달구나.”
김동훈이 혀를 날름거렸다. 임프들이 흘리게 만든 강주혁의 피를 흡수한 것 같았다.
‘청룡광품검은 무리다.’
악마들을 쓸어 버리기에는 광역공격기술인 청룡광품검이 딱이다. 하지만 기술을 사용하는 동안 김동훈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전세가 역전된 것 같군. 그 검의 힘을 계속 빌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텐데. 그건 너한테도 위험한 힘이야. 알고 있겠지?”
김동훈은 팔과 함께 여유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강주혁은 대꾸하는 대신에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반지에서 사이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흙바닥에 스며들었다.
쏴아아.
잠들어있는 망자들이 리치의 부름에 응했다. 수백의 스켈레톤이 눈밭에서 일어났다. 김동훈의 표정이 또 한 번 구겨졌다.
“너는 네 할아버지나 아버지하고는 다르게 정도를 모르는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
김동훈은 쓰게 웃었다.
“쳐라.”
강주혁의 명령에 스클레톤이 임프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두 몬스터들 사이에 난전이 벌어졌다.
임프가 최하위이기는 해도 엄연히 악마종이다. 스켈레톤 따위가 상대가 될 리가 없다. 그러나 수적으로 스켈레톤이 우세했다. 어차피 임프들이 강주혁을 귀찮게 하는 것만 막아주면 됐다.
‘단번에 끝내야 한다.’
김동훈의 엄청난 재생능력을 압도하려면 단번에 끝낼 수 있는 카드가 있어야 한다. 강주혁은 내공 부족으로 평소에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카드를 꺼내 들기로 했다.
‘간다.’
결심을 굳힌 강주혁은 난전을 벌이는 임프와 스켈레톤을 헤치면서 김동훈에게 달려갔다.
“좋아. 다시 한번 붙어보자고!”
김동훈도 호기롭게 외치면서 참마검을 휘둘렀다.
촤악!
검기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임프와 스켈레톤을 모두 두 동강 내면서 날아들었다.
강주혁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서 피했다.
“느리구나. 애송이!”
잠깐 고개를 숙인 사이에 김동훈이 강주혁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대검을 제대로 휘두르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김동훈의 칼날이 강주혁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파지직!
그 순간, 섬광과 함께 강주혁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 설마?’
김동훈이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하늘에서 붉은빛의 번개가 번쩍였다.
콰지직!
“으아아악!”
온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한 벼락이 김동훈에게 내리꽂혔다. 주변에 있는 임프와 스켈레톤이 일거에 산화해버렸다.
자욱하게 피어났던 연기와 천지를 떨게 만들었던 굉음이 천천히 가셨다.
김동훈은 여전히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바로 앞에는 어느 샌가 나타난 강주혁이 앉아있었다. 강주혁의 대검은 김동훈의 다리 사이에 있었고.
“이, 이건 계획에…….”
김동훈의 몸이 세로로 쪼개지면서 허물어져 내렸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