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가 되었다-88화 (88/202)

88화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엄경일 팀장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강주혁은 온천 쪽으로 돌아왔다.

“과장님?”

침낭에 들어가서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안다정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있었다.

“안 피곤하세요?”

“좀 전에 많이 자서 괜찮아요.”

안다정의 시선이 잠들어 있는 공허진에게 머물러있었다. 공허진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것 같았다.

“허진 씨가 보여준 힘, 정체가 뭘까요?”

“글쎄요.”

거기에 대해서는 강주혁도 아는 게 없었다.

던전과 몬스터가 그런 것처럼 각성이라는 현상도 여전히 인류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수십 년 동안 각성자에 대한 데이터가 쌓여왔고, 그만큼 이론들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것들이 이전에 비해 많은 걸 알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공허진도 그런 예외들 중 하나다.

“회사가 허진 씨를 어떻게 처리할지 걱정이네요.”

던전에서 상사를 폭행하는 건 잘리고도 남을 잘못이다. 게다가 그 상사가 로열패밀리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두 가지 선택지요?”

“모든 걸 솔직하게 보고하고 허진 씨가 징계를 받는 거죠. 이 경우에 신태훈 과장도 같이 처벌받게 될 겁니다.”

“하민 씨 때린 걸로요?”

“네. 이전에도 오늘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허진 씨도 여러 번 당했답니다.”

안다정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가 살기를 가라앉히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다른 선택지는 말을 맞추는 거군요.”

“네. 허진 씨가 모든 걸 털어놓는 건 신태훈 과장도 원치 않을 겁니다. 잃을 게 더 많은 사람이니까요. 분명 사과나 받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할 겁니다.”

“강 대리 생각은 어느 쪽이에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공허진을 생각하면 덮고 가는 게 맞다. 하지만 1부 3팀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략 보고서를 조작한 적이 없었다.

“저는 밝히는 쪽입니다.”

“의외네요. 강 대리라면 허진 씨를 지키는 쪽으로 선택할 줄 알았어요.”

“이대로 덮고 넘어가면 4부 4팀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하민 씨 후임이 들어오면 비슷한 일을 겪게 되겠죠.”

“……그럴 수도 있겠네요.”

“로열패밀리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죠. 다들 부회장님께 찍힐까 봐 무서워서 쉬쉬하니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강주혁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공허진을 보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회사가 S급 영력을 가진 사원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분명 정상 참작해서 경징계로 끝날 겁니다.”

“일리가 있네요. 내일 팀장님 일어나면 같이 얘기해 봐요.”

유덕현은 말릴지도 모른다. 공허진에게도 피해가 가고 신태훈에게도 찍힐 테니까.

하지만 강주혁은 신태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회사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게 옳았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고 정비를 끝낸 일행이 온천 앞에 모였다.

어제의 일 때문에 다들 표정이 좋지 못했다.

공허진은 기절한 이후 계속 잠만 자다가 아침에야 정신을 차렸다.

“허진아.”

“네, 팀장님.”

공허진은 불안한 표정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신태훈 과장님한테 사과드려.”

공허진은 신태훈에게 다가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막판에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날뛰기는 했지만 공허진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됐어요.”

신태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 역시 이번 일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는 게 자신에게 손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공허진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겠지만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좀 더 은밀한 방식을 택할 것이다.

“원래 이런 일이 생기면 공략을 중단하고 회사에 복귀하는 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 내에 해결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죠. 그러니 어제 있었던 일은 회사에 복귀한 후 처리하도록 하고 지금은 공략에 집중합시다. 다른 의견 있어요?”

강주혁은 제법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준 유덕현에게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저렇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없습니다.”

“저도요.”

“좋습니다. 그럼 곧장 요새로 출발하도록 하죠. 오늘도 긴 하루가 될 것 같군요.”

일행은 동굴을 벗어났다.

“이정인 과장.”

“네. 팀장님.”

“온천 위치 기록해 놨죠?”

“네. 물론입니다.”

마법사인 이정인은 지도 제작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돌아가면 그녀가 모은 데이터를 이용해 이 지역의 지도가 보완될 것이다.

이 온천은 베이스캠프 역할을 할 테고 발견자인 강주혁은 인센티브를 받게 될 것이다.

“갑시다.”

일행은 여덟 시간을 걸은 끝에 목적지인 요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살벌하게 높네.”

높다란 돌산 위에 요새가 세워져 있었다. 돌산은 눈으로 덮여 있어서 전체가 꼭 빙산처럼 보였다. 상층부에는 방어용 탑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

“어떻게 할까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아침에 들어갈까요?”

유덕현이 일행에게 의견을 물었다.

다들 하루 종일 행군을 한 탓에 피로가 많이 쌓여 있었다.

“여기서 잔다고 해서 피로가 풀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휴식을 취하면 적들의 이목을 끌 수 있습니다.”

강주혁의 의견이었다.

이런 오픈 필드에서 적들에게 포위당하면 전멸을 면하기 어렵다.

“전 반댑니다.”

신태훈이 말했다.

“저 요새 안에서 얼마나 오래 싸워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동감이네. 지난번에도 몬스터들이 요새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엄경일 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4부 4팀 사람들은 같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저 요새 안의 몬스터들은 며칠 간격으로 정찰을 하러 나온다. 4부 4팀은 운 좋게 넘겼지만, 만약 그게 오늘 밤이라면 일행에게 끔찍한 일이 닥칠 것이다.

“엄경일 팀장님, 통로 초입부터 리치(Lich)가 나온다고 하셨죠?”

강주혁이 엄경일에게 물었다.

리치는 마법의 힘으로 언데드가 된 마법사.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강령술사라서 항상 언데드 군단을 몰고 다닌다. 랭크는 최소 S급으로 보스급 몬스터로 분류된다.

4부 4팀은 지난 공략 때 돌산 하층부에서 요새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 통로의 끝에서 그들을 맞이한 건 리치를 포함한 언데드 군단이었다.

눈보라로 휘몰아치는 설원을 통과하느라 만신창이가 된 4부 4팀은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적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후퇴를 택했다.

“그래. 죽여도 계속해서 살아나는 끔찍한 놈이지.”

엄경일이 답했다.

리치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죽여도 금방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리치는 자신의 영혼을 <성물함>이라 불리는 상자에 보관한다. 이 성물함을 찾아서 파괴하지 않는 이상, 리치는 계속해서 부활한다.

“성물함 위치는 알아내셨습니까?”

“그걸 알아냈다면 보고서에 적었겠지.”

4부 4팀은 총력전을 펼쳐서 리치를 한 차례 파괴했으나 놈은 금방 부활해서 일행을 공격했다.

“그렇군요.”

강주혁은 갑자기 망원경을 꺼내더니 요새를 살피기 시작했다. 일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조금씩 어스름이 깔려오고 있긴 했으나 아직 해가 떠 있었다. 게다가 요새 주변에는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았다. 덕분에 요새의 외부와 바위산의 능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덕현 팀장님.”

“왜?”

“하층부의 비밀 통로 대신 요새 위로 진입하는 건 어떨까요?”

“갑자기 왜?”

“그 통로는 비밀 통로가 아닌 것 같아서요.”

“돌산에 난 작은 틈을 이용해서 요새 내부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편의상 비밀 통로라고 부르는 거예요. 적들에게는 당연히 비밀이 아니겠죠.”

이정인의 설명이었다.

“제 말은 그곳이 후문이나 쪽문이 아니라 정문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혹시 요새의 정문을 찾아보셨나요?”

4부 4팀은 대답하지 못했다.

요새를 둘러보기는 했지만 그런 건 찾지 못했다. 요새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틈을 발견했고 그래서 진입했을 뿐이다.

“우리가 들어갔던 통로가 정문이라는 말입니까? 고작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신태훈이 따졌다.

“저 요새는 던전 안에 있는 건축물이고, 몬스터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강주혁의 지적에 4부 4팀 사람들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인간의 요새라면 대규모 병력이 이동할 수 있는 큰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몬스터들의 요새라면 다를 수 있다.

“이정인 과장님이 만드신 요새 내부 지도를 보니까 그 통로는 방어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더군요.”

실제로 4부 4팀은 통로를 통과하자마자 사방에서 퍼붓는 총공세를 맞닥뜨려야 했다. 엄청난 수의 부비트랩도 발목을 잡았고.

이번에도 다른 방법이 없어서 정공법으로 돌파할 계획이었다. 탱커를 앞세우고 물약과 힐러의 치유력을 믿고 우직하게 뚫고 나가는 것이다.

지난 공략에 비해 체력 상황도 나아지고 인원도 늘기는 했지만 이쪽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저렇게 높은 곳에 지어진 요새를 보면 누구나 위축될 겁니다. 자연스레 몰래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찾기 마련입니다. 저 바위산과 성벽을 오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들어갔던 통로가 덫일 수도 있다는 얘긴가?”

엄경일이 물었다.

“네. 팀장님. 어쩌면 저 위의 요새가 아니라 바위산 내부가 적들의 본진일 수 있습니다.”

“그럼 보스인 리치가 곧바로 나타난 것도 설명이 되네요.”

안다정도 거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뭔데요?”

안다정은 약간 들뜬 얼굴로 물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리치는 성물함을 절대 자기 근처에 두지 않습니다. 죽더라도 성물함은 안전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두지도 않습니다. 그래야 관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죠.”

“성물함은 분명 저 요새 안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리치는 하층부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물함은…….”

“상층부에 있을 가능성이 크군요.”

“네. 특히 상층부의 탑은 이 요새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성물함을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죠. 만약 성물함을 부수면 싸우지도 않고 리치를 없앨 수 있을 겁니다. 리치를 없애면 나머지 언데드도 알아서 사라지겠죠.”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다들 강주혁의 주장에 설득된 것 같았다.

“주혁아.”

“네. 팀장님.”

“이런 얘기를 왜 지금 하냐? 진작 좀 하지.”

“저도 방금 정찰하고 떠올린 겁니다.”

유덕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강 대리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경일 팀장도 거들었다. 신태훈은 굳은 얼굴로 엄경일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신태훈의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두 팀장이 동의했으니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제의 일로 기가 죽어버린 신태훈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나저나 저기를 어떻게 올라가지?”

유덕현은 가파르고 미끄러워 보이는 돌산을 보면서 말했다.

“망원경으로 보시면 중간에 기슭이 있습니다. 그걸 이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유덕현은 강주혁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의 말대로 암벽에 중간쯤 사선으로 움푹 튀어나온 부분이 보였다.

여기에서도 보일 정도면 사람이 발을 디디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다는 얘기다.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괜찮겠어?”

“물론입니다.”

인센티브는 공략 기여도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 강주혁은 이번 공략에서도 일등공신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