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늑대 굴이에요!”
선두에서 정찰하던 안다정이 외쳤다.
강주혁의 말대로 새끼 늑대의 발자국을 따라간 끝에 발견한 것이었다.
설원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언덕이 보였다. 중턱쯤에 서리 늑대도 충분히 지나갈 만큼 커다란 동굴이 있었다.
“연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언덕 한복판에서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온천수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강주혁의 말에 일행이 반색했다.
해가 기울어지기 직전이다. 만약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설원 한복판에서 밤을 지새워야 한다.
“주혁이가 또 우릴 살렸네.”
유덕현은 강주혁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씩 웃었다. 4부 4팀 사람들도 이번만큼은 함께 기뻐했다.
“잔당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서 들어갑시다.”
언덕 주변에는 짐승의 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늑대들이 사냥해 온 동물들의 것이었다.
일행은 무기를 꺼내든 상태로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마법사인 이정인이 조명마법으로 길을 밝혔다.
“전방에 서리 늑대 하나.”
안다정이 보고와 동시에 벽진궁을 썼다.
팡! 팡!
내공이 실린 화살이 벽에 여러 번 튕기면서 늑대의 몸통을 꿰뚫었다.
깨갱!
쿵!
일행을 향해 다가오던 서리 늑대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새끼예요.”
평범한 늑대와 비슷한 크기인 것으로 봐서 서리 늑대의 새끼인 것 같았다.
“살려두면 잠자리가 사나워지니까 모두 처치하자고.”
“네. 팀장님.”
일행은 동굴 안을 돌아다니면서 새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대개는 두세 마리씩 덤볐고, 선두에 선 안다정과 강주혁 선에서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동굴 공략이 거의 끝나갈 때쯤, 여러 방향에서 수십 마리가 동시에 일행을 덮쳤다. 새끼라고는 해도 크기는 일반 늑대랑 비슷하다. 어두운 곳에서 숨어 있다가 갑자기 덤벼드는 새끼들은 성체 못지않게 위협적이었다.
퍽!
깨깽!
공허진은 자신에게 덤벼드는 서리 늑대의 머리통을 메이스로 후려갈겼다.
퍽! 퍽!
그리고 확인 사살로 두개골을 부셔 놓았다. 피가 튀어서 얼굴에 묻어도 태연했다. 흥분하지도 겁을 먹지도 않았다.
“와.”
4부 4팀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설원에서 싸울 때는 상사들의 보호를 받느라 힐러로서의 역할만 했다. 4부 4팀이 공허진의 근접전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1부 3팀에서 잘 나간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들이 알던 공허진은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예전에 안 저랬는데.”
엄경일 팀장이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허진은 압도적인 장점과 압도적인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케이스. 하지만 그 단점이 없어지자 압도적인 장점만 부각 되었다.
4부 4팀의 문제아가 1부 3팀에 가자마자 복덩이로 변한 걸 보니 속이 쓰렸다.
“꺄악!”
4부 4팀 사람들이 공허진의 활약에 충격을 받아 잠시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장하민이 비명을 질렀다. 서리 늑대 한 마리가 그녀의 팔을 물어뜯은 것이다.
퍽! 퍽!
바로 옆에 있던 공허진이 메이스로 공격해 늑대를 장하민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했다.
“으윽…….”
장하민은 이빨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팔을 부여잡은 채 비틀거렸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들 정신 차려요!”
앞쪽에서 혼자 두 마리를 상대하고 있던 유덕현이 호통을 쳤다.
“허진이는 하민 씨 뒤로 빼서 치료하고 주혁이가 허진이 자리 커버해.”
“네! 팀장님!”
1부 3팀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서 장하민을 치료했다.
“뭐하는 겁니까! 빨리 치료하지 않고!”
신태훈은 팀의 힐러인 한윤우에게 고함을 질렀다. 4부 4팀 사람이 1부 3팀에게 케어받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윤우는 서둘러 장하민에게 달려갔다. 한윤우가 빠지자 곁에 있는 사람들이 커버해야 할 면적이 넓어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유덕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민 씨는 허진 씨만으로 충분합니다. 돌아가세요.”
강주혁은 뒤로 물러서서 한윤우를 밀어냈다. 그는 신태훈과 강주혁을 번갈아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전투 중에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강주혁은 신태훈을 노려보았다. 신태훈은 흠칫하더니 한윤우에게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턱짓을 했다.
잠시 후, 치열했던 전투가 끝났다.
“끝났나?”
“네, 팀장님.”
강주혁이 마지막 늑대의 목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내면서 말했다.
“하민 씨, 괜찮아요?”
“네, 팀장님.”
장하민은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보다 신태훈에게 박살 날 거라는 사실이 그녀를 더 옥죄어왔다.
‘왜 하필 이런 날에…….’
장하민에게는 징크스가 하나 있었다. 던전에서 한 번 부상을 당한 날은 절대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사실, 동급의 암살자들보다 훨씬 빨랐기에 부상을 당하는 날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운 나쁘게 한 번 다치기라도 하면 던전을 떠나기 전에 꼭 한 번은 더 다치게 되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후우.”
유덕현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신태훈에게 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강주혁은 직접 나서기로 했다. 신태훈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과장님.”
신태훈이 강주혁을 쳐다봤다.
“유치한 자존심 싸움은 회사에서 끝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자존심 싸움을 했다고요?”
“좀 전에 한윤우 대리에게 내렸던 명령은 명백한 오판입니다. 최우수 사원인 과장님이 그런 실수를 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1부 3팀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게 자존심 싸움이라는 겁니다. 전투 중에는 같은 팀이 되어서 싸워야죠.”
강주혁은 서서히 언성을 높이는 동시에 투지를 불태웠다. 그에 따라 신태훈의 얼굴이 경직되어갔다. 패배의 쓰라림과 함께 공포가 밀려들었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 주의하죠.”
“감사합니다.”
신태훈은 굳은 얼굴로 장하민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
“악!”
장하민이 뺨을 잡고 쓰러졌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강주혁이 소리를 질렀다. 신태훈은 강주혁을 무시한 채 장하민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 같은 쓰레기는 내 회사에 필요 없다. 이번 공략 끝나면 알아서 꺼져.”
강주혁은 신태훈을 뒤에서 잡아서 그녀에게서 떨어뜨렸다. 그대로 뒀다가는 발길질이라도 할 기세였으니까.
공허진은 귀를 틀어막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1부 3팀 사람들은 경악했으나 4부 4팀 사람들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이거 놔요.”
신태훈은 강주혁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면서 돌아섰다.
“전투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건 4부 4팀의 일입니다. 신경 쓰지…… 컥!”
강주혁의 앞에 서 있던 신태훈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쿵!
신태훈은 벽에 부딪혔다가 미끄러져 내렸다. 그 위에는 공허진이 올라타 있었다. 그에게 태클을 걸어 벽에 처박아버린 것이다.
공허진의 신체 스펙으로는 불가능한 일. 게다가 바로 앞에 있던 강주혁조차 캐치하지 못할 정도로 움직임이 빨랐다.
‘너무 이른데.’
강주혁은 올 것이 왔음을 깨달았다.
“죽어!”
퍽! 퍽!
“큭! 커억!”
공허진이 신태훈의 얼굴에 무자비한 파운딩을 날리기 시작했다. B급의 신태훈이 신체 스펙 E급의 공허진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두들겨 맞았다.
“허진아! 멈춰!”
깜짝 놀란 사람들이 공허진의 양팔을 붙잡아서 떨어뜨리려고 했다.
“무슨 힘이!”
하지만 공허진은 쉽게 떨어질 줄 몰랐다. 근력까지 S급으로 올라버린 것 같았다.
공허진의 두 손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눈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죽어! 죽으라고!”
여섯 사람이 힘을 합쳐서 간신히 상체를 떼어냈더니 이번에는 발로 신태훈의 복부를 밟아댔다.
“컥! 쿨럭!”
발길질을 당할 때마다 신태훈이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호신강기도, 강체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공허진의 주먹질이 모든 방어수단을 뚫어버린 것이다.
“죽어! 죽…….”
강주혁이 뒷목을 치자 미쳐 날뛰던 공허진이 기절해 버렸다.
“한 대리님, 과장님부터 치료해요!”
“네. 알겠습니다!”
강주혁은 얼이 빠져있는 한윤우에게 신태훈의 치료를 명했다.
일행은 동굴 한복판에 있는 온천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동굴 안에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였다.
신태훈은 한윤우의 응급처치를 받은 덕분에 부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고통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남았다. 얼굴 뼈가 함몰되고 흉골이 주저앉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으니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깨어난 신태훈은 화를 내지 않았다. 자신이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에, 상대가 공허진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식사도 거르고 드러누워 버렸다.
공허진 역시 기절한 후로 깨어나지 못했다. 생명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저 탈진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뿐이다.
유덕현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1부 3팀과 4부 4팀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았다.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기로 하고 모두 휴식을 취했다.
밤이 깊었다.
“주혁 씨, 일어나요.”
안다정이 잠들어 있던 강주혁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는 유덕현이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주혁 씨 차례에요.”
“감사합니다. 과장님도 쉬세요.”
“고마워요. 그럼 수고해 줘요.”
불침번은 팀별로 한 명씩 하기로 했다. 신태훈과 공허진은 불침번에서 제외되었다.
강주혁은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서 동굴 밖으로 나왔다.
“팀장님?”
밖에 나오니 엄경일 팀장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 강 대리도 불침번이야?”
“네.”
“컨디션은 어때?”
“좋습니다. 팀장님은 좀 어떠세요?”
“나도 좋지. 강 대리 덕분에 이 추운 곳에서 사우나까지 했는데 안 좋을 리가 있나.”
엄경일은 씩 웃어 보였다. 확실히 신태훈이랑 있을 때 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신태훈이 있을 때는 그의 눈치를 보느라 1부 3팀을 경계하고 벽을 세웠다. 지금은 훨씬 더 친근하고 서글서글한 느낌이었다. 아마 이쪽이 본래 성격일 것이다.
“신태훈 과장은 좀 어떤가요?”
“몸은 괜찮은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려. 그래서 그냥 쉬라고 했어.”
“평소에도 불침번에서 빠지지 않았나요?”
강주혁이 정곡을 찌르자 엄경일이 쓰게 웃었다.
‘차라리 잘 됐다.’
공허진이 문제를 일으킨 건 예상보다 빨랐지만 이참에 그녀의 문제를 좀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일로 4부 4팀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었다.
4부 4팀 사람들도 그동안 신태훈에게 쌓여 있는 게 많을 것이다. 옆에서 부채질만 해주면 알아서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럼 신태훈에게 사람 관리도 똑바로 못하는 얼간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다.
“이 짓도 더러워서 못 해 먹겠군.”
엄경일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한숨처럼 뿜어져 나왔다.
4부 4팀은 헌터 팀이라기보다는 신태훈의 사병 조직에 가깝다. 헌터로서 착실히 경력을 쌓기보다는 신태훈이 업적을 쌓는 걸 도와주고 미래를 도모하자는 주의다.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헌터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심한 자괴감을 느낄 것이다.
“팀장님.”
“음?”
“허진 씨 말입니다. 4부 4팀에 있을 때 신 과장한테 맞은 적 있죠?”
엄경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지.”
“하민 씨가 맞는 걸 보고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군요.”
4부 4팀에 있을 때만 해도 공허진은 폭력성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 아마 그때는 맞고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부 3팀에서 강주혁의 도움으로 용기를 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게 이런 식으로 발현된 것이다.
“한심해 보이지?”
엄경일이 냉소를 흘렸다. 자기가 봐도 4부 4팀은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공략회사에의 구타는 어떤 상황에서도 해서는 안 되는 금기다. 그렇게 쌓인 악감정이 던전에서 어떤 식으로 터지게 될지 모르니까.
한 세대 전에는 기강을 잡는다는 빌미로 구타를 하는 일들이 있었다. 지금도 질이 나쁜 중소 공략회사들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원공략 같은 대기업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략 중에 감정이 격해지면 대화로 해결하거나 공식적인 대련으로 정리하는 게 관례. 하지만 신태훈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왕조 국가의 폭군처럼 굴었다.
“아닙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주혁이 아는 엄경일은 꽤 괜찮은 헌터다.
만약 평범한 팀이었다면 엄경일은 뛰어난 팀장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강 대리는 신태훈 과장의 눈치를 전혀 안 보는 것 같던데?”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였거든요.”
“신태훈 과장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부회장님 아들이잖아.”
“저는 부회장님이 회장님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부회장님만큼 유력한 후보도 없지.”
“그룹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공략회사는 따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장님이 송별회 때 하신 말씀도 있는데.”
엄경일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강주혁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강 대리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월급쟁이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지나지 않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1부 3팀에 워낙 괴물 같은 실력자들이 많아서 가려지기는 했지만 4부 4팀의 멤버들도 나름대로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다. 신태훈이 인사팀과 공략 4부 부장에게 압박을 가해서 엘리트들만으로 팀을 구성했으니까.
그들 모두 임원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임원이 되면 회사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 회장이 직접 약조한 사항이다.
굳이 신태훈 밑에서 노예처럼 굴종하지 않아도 길이 있는 것이다.
“저는 부회장님이 회장이 되고 신태훈 과장이 사장이 되는 회사에는 별로 다니고 싶지 않군요. 그리고 그런 회사는 아마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말이 좀 지나치군.”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4부 4팀의 사정을 모두 꿰고 있다는 거 알고 계시죠?”
엄경일의 굳어가는 표정을 보고 강주혁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다들 미래를 생각해서 신태훈 과장의 흠결을 덮어주고 있지만 그 미래가 오기도 전에 끝날 수도 있습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