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여기 던전이에요
‘사람을 때리는 것이 아니다.’
권대호가 말했었다.
‘사람 앞에 있는 공기를 때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다. 하지만 원리를 이해하니 이 권법이 아주 무시무시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펑!
남들이 보기에 강주혁은 그저 신태훈의 복부에 훅을 꽂아 넣었을 뿐이다.
하지만 강주혁의 주먹은 신태훈의 복부가 아니라 복부로부터 1㎝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멈췄다.
가까워서도 안 되고 멀어서도 안 된다. 정확하게 1㎝. 애초에 그 지점을 노리고 주먹을 내지른 것이었다.
“무, 무슨?”
허를 찔린 줄 알았던 신태훈은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당황했다. 급하게 둘렀던 호신강기에 잔물결이 일었다.
촤아악!
그때, 강주혁이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주먹에 응축되어 있던 내공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바로 앞에 있던 신태훈의 호신강기를 덩달아 흩어놓았다.
귀멸파공권(鬼滅破功拳).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상대의 호신강기를 흩어버림으로써 무방비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만약 강주혁이 그냥 신태훈의 복부를 때렸다면 호신강기에 막혀서 경미한 피해만 줬을 것이다. 신태훈의 내공은 강주혁보다 높으니까. 하지만 귀멸파공권을 사용함으로써 호신강기 자체를 흩어버릴 수 있었다.
‘스승님이 아시면 놀라시겠군.’
권대호는 이걸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해 연습에서 최소 1만 번은 성공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강주혁은 백번 만에 요령을 터득했고 가장 중요한 싸움에서 사용했다.
내공 컨트롤 난이도가 훨씬 높은 무극검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강주혁에게 이 정도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젠장!”
바로 앞에서 호신강기가 날아가 버리자 당황한 신태훈은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강주혁에게 다음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신태훈이 뒤로 빠지는 게 강주혁이 그리던 그림이었다. 강주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검을 휘둘렀다.
붕!
바로 앞에 붙어 있을 때는 제대로 휘두를 수 없었던 대검. 하지만 신태훈이 알아서 거리를 벌려주자 풀 스윙을 할 수 있었다.
신태훈은 다급히 내공을 끌어모아 호신강기를 두르려고 했으나 강주혁의 검이 더 빨랐다.
퍽!
“끄아아악!”
단두대처럼 커다란 날이 신태훈의 어깻죽지를 찍었다.
푸악!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호신강기가 없는 상태에서 내공이 실린 대검을 맞았다. 아무리 각성자의 강체라 해도 버틸 수가 없었다.
강주혁은 일부러 막판에 힘을 빼서 절단만큼은 피했다. 둘만 있을 때면 어깨가 아니라 정수리를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있으니 이 정도 선에서 끝내야 했다.
그리고 완전한 절단보다 이쪽이 더 고통스럽다.
“끅, 끄어억…….”
신태훈은 힘없이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보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강주혁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신태훈을 내려다보았다.
“부회장님과 많이 닮으셨군요.”
죽음의 공포를 느낀 신태훈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좀 아플 겁니다.”
강주혁은 신태훈의 어깨에 박혀 있던 검을 힘껏 뽑아냈다.
푸악!
“으아아악!”
신태훈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혼절해 버렸다. 강주혁은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훔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부장님.”
안 그래도 임재경 부장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심판을 맡고 있는 힐러만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이 미친놈아, 적당히 좀 하지.”
임재경은 로열패밀리를 저승의 문지방에 걸쳐놓은 강주혁에게 잔소리를 했다.
신대성 라인과 척을 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강주혁은 지금 그 선을 밟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힘 조절해 가면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어서요.”
강주혁은 자신이 입은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그 역시 난도질을 당한 상태였다.
“대리님은 제가…….”
“아, 고마워요.”
공허진이 달려와서 강주혁의 상처를 치유해줬다.
“……으음?”
S급 힐러인 임재경이 손을 쓴 덕분에 신태훈은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잘려나갈 뻔했던 팔도 제대로 붙어 있었다.
“괜찮습니까?”
강주혁은 신태훈에게 다가갔다. 신태훈은 강주혁을 올려다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 끝났습니다.”
강주혁은 속으로 웃음 지었다. 신태훈의 영혼에 확실히 공포가 새겨진 것이다.
“내가…… 졌군요.”
“좋은 승부였습니다.”
강주혁은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이미지 관리상 어쩔 수가 없었다. 신태훈은 꺼림칙해 하면서도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역시 이미지 관리상 어쩔 수가 없었다.
“와아아!”
신태훈이 강주혁의 손을 잡고 일어서자 구경꾼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공략 1부 사람들이 몰려와서 3팀을 에워쌌다.
안다정은 자신에게 축하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대호 할아버지의 권법이었어.’
* * *
공략 1부와 4부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은 1부 3팀의 완승으로 끝났다. 마지막 주자였던 유덕현과 엄경일은 나서지도 못했다.
이정인은 안다정을 건드리지도 못했고 신태훈은 경기 내내 강주혁을 몰아세웠음에도 완패를 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만큼 마지막 일격이 준 인상이 강렬했던 것이다.
소수이긴 하나 눈썰미가 좋은 실력자들은 강주혁이 일부러 맞아주면서 덫을 놓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의 증언 덕분에 강주혁이 압승했다는 주장은 더욱 힘을 받았다.
그래도 신태훈을 깔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과장이, 그것도 전년도 최우수 사원으로 뽑힌 과장이 입사한 지 반년밖에 안 된 대리에게 패배했다. 만약 상대가 평범한 대리였다면 수치심 때문에 회사를 떠나야 했을 것이다.
“상대가 강주혁이잖아. 질 수도 있지.”
사람들은 신태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강주혁이 괴물이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거품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어.”
그리고 이번 일로 강주혁의 실력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도 생각을 달리했다.
강주혁이 태원공략에 들어와서 쌓아 올린 업적은 헌터 업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회사나 공략부 차원에서 의도적인 영웅 만들기로 실적을 부풀려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우수 사원으로 꼽히는 신태훈을 단칼에 빈사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걸 보니 진짜배기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A12 공략 당일.
“좋은 아침입니다.”
유덕현이 톨게이트로 들어오는 공략 4부 4팀을 보면서 인사했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인사했다.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만큼 실력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유덕현도 이겼다고 거들먹거리지 않았고.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전처럼 서로 으르렁대지는 않았다.
“다들 08-A66은 다녀왔죠?”
08-A66 지역은 현재 마석 매장지 개발에 한창이었다.
지하에 있는 마석을 운반하기 위해서 1부 3팀이 탈출로로 이용했던 수직 통로에 마력으로 작동하는 승강기가 설치되었다. 덕분에 헌터들도 언제든 편하게 제단을 방문할 수 있었다.
1부 3팀도 시간을 내서 제단의 힘을 재충전했고, 4부 4팀도 어제 제단을 방문했다.
“다 했습니다.”
신태훈이 대표로 답했다.
권대호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았다. 김태현처럼 추태를 부리지도 않았고 강주혁에게 해코지를 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공략 1부 정찰팀이 20-A12에 한 차례 다녀왔습니다.”
유덕현은 던전 진입에 앞서 간단히 브리핑을 했다.
“좋은 소식은 마석 매장지에 있는 제단의 힘으로 눈보라를 몰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덕분에 정찰팀도 별도의 방한 장비 없이 설원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안 좋은 소식도 있습니까?”
엄경일 팀장이 물었다.
“정찰로도 알아낸 게 별로 없다는 게 안 좋은 소식이 되겠군요. 4부 4팀 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 20-A12는 하나의 지역으로 묶는 게 민망할 정도로 넓습니다. 하루만으로는 유의미한 정보를 얻기 어려웠습니다.”
공략 1부 정찰팀에게도 기존의 임무들이 있었다. 회장의 명령이 있었다고는 해도 20-A12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 동안 광활한 설원을 모두 뒤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정찰팀이 몇 차례 더 정찰을 돈 후 공략팀을 투입하는 게 맞다. 하지만 웨이브 데이 전에 20-A12에 대한 공략을 끝내고 웨이포인트까지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위험한 임무가 될 것 같군요.”
엄경일 팀장이 말했다. 4부 4팀 사람들은 옅은 웃음을 교환했다.
주도권을 넘겨주기는 했으나 공략 1부 3팀에게는 여전히 정보와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았다. 이런 상태면 던전에 들어가서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공략 계획 세울 때 여기에 있는 허진 씨가 많은 도움을 줬으니까요. 전혀 근거 없는 계획은 아닙니다.”
공허진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상황 대처 능력만 놓고 보면 우리 1부 3팀이 회사 최고일 겁니다.”
유덕현은 허세를 부렸다. 말은 장난조였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이지혜, 이형석, 김현우 사건, 마석 매장지 탐색. 공략 1부 3팀은 늘 예기치 못한 상황을 겪어왔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왔다.
유덕현은 자기 팀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이 있었다.
“그럼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엄경일 팀장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웨이포인트를 이용해 20-A11로 이동했다. 20-A12에는 웨이포인트가 없어서 옆 지역에서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공략 4부가 공략을 해놓은 덕분에 20-A11에는 몬스터가 없었다. 일행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다음 지역으로 이동했다.
“허진 씨, 갑옷 멋진데요?”
4부 4팀의 장하민이 공허진에게 말을 붙였다.
“네? 아, 네.”
공허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훈련 덕분에 공허진의 신체 능력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근력을 강화해 주는 건틀릿도 있었다. 덕분에 갑옷도 좀 더 무겁고 튼튼한 걸로 바뀌었다.
“3팀에서 꿀 빠니까 좋죠?”
장하민은 암살자인데도 불구하고 4부 4팀 사람들 중에서 들고 있는 짐이 가장 많았다. 전투가 벌어지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장기 공략이 예상되는 상황이라서 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팀별로 하나씩 지급되는 아공간 보관함을 가득 채우고도 다들 봇짐을 하나씩 짊어져야 했다.
팀의 막내인 장하민은 자기한테 필요한 것 외에도 공용으로 사용하는 물건들과 신태훈의 물품들까지 챙겨야 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장하민은 봇짐장수처럼 짐을 짊어지고 있는데 공허진은 개인 장비 외에는 짐이 없었다.
1부 3팀은 애초에 짐을 많이 가지고 오지 않았다. 대부분 아공간 보관함에 넣어뒀고, 그 외의 개인적인 물품들은 각자가 들었다. 그리고 1부 3팀은 애초에 하급자에게 추가적인 노동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공허진이 4부 4팀에 있을 때만 해도 장하민이 하는 일들은 전부 그녀의 몫이었다. 입사 동기니까 분담을 해야 했지만 장하민은 어수룩한 공허진에게 은근슬쩍 자기 몫까지 떠넘기곤 했다.
상사들도 그런 분위기를 알았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전투력이 제로인 공허진이 그거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에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공허진이 4부 4팀을 떠나면서 막내 담당의 일들이 전부 장하민의 몫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만난 공허진이 1부 3팀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을 보자 샘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근데 1부 3팀은 짐이 너무 적은 거 아니에요? 하루 이틀 걸리는 공략도 아닌데. 나중에 우리한테 손 벌리면 안 돼요.”
“하민 씨.”
그때,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강주혁이 입을 열었다.
“네?”
“우리 팀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경계나 잘 서요. 여기 던전이에요.”
“네, 네.”
장하민은 생글생글 웃었지만 속으로 욕지기를 했다.
‘재수 없어. 진짜.’
신태훈과 같이 수많은 전투를 겪어온 장하민은 그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신태훈을 이기는 걸 봤으니 강주혁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회사가 이 모양이야.’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강주혁이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자기보다 1년이나 늦게 들어왔는데 꼴에 대리라고 상사처럼 구는 걸 보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여기부턴가.”
“막막하네.”
두 시간 정도 도보로 이동한 끝에 일행은 설원의 경계에 도착했다.
새하얀 평야 위로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오한이 들 것처럼 차가운 풍경이었다.
“지금부터 제단의 힘을 사용합시다.”
유덕현의 명령에 따라 다들 바람의 힘을 전개했다.
“일렬종대로 이동합니다. 안 과장이 앞장서.”
“네, 팀장님.”
일행은 본격적으로 설원에 진입했다.
“와.”
주변에서 일어난 바람이 눈보라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새하얀 세상 속에서 일행이 서 있는 곳만 섬처럼 도드라졌다. 눈보라를 맞지 않으니 추위도 훨씬 덜했다.
유덕현은 강주혁을 보면서 엄지를 세워 보였다. 강주혁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서 잠시 멈춰 섰을 때를 빼고는 계속 걸었다.
눈보라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던 해가 지평선을 향해 기울어져 갈 때쯤, 섬뜩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우우.
“늑대?”
“서리 늑대예요. 수십 마리가 넘어요. 넓게 퍼져서 오고 있어요.”
선두를 맡고 있던 안다정이 보고했다.
“원형 대형으로!”
일행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크르르.
황소보다 더 큰 거대늑대들이 사방에서 일행을 덮쳤다.
퍽!
깨갱!
난전이 벌어졌다.
“고개 숙여!”
“안 물리게 조심해!”
늑대들은 가까이 붙어서 싸우기보다는 빠른 속도를 이용해 치고 빠지는 전략을 택했다. 그만큼 공격할 틈을 잡기가 어려웠다.
“눈보라 조심해!”
전투에 집중하다 보니 바람의 힘을 사용하는 게 어려워졌다. 밀려났던 눈보라가 다시금 일행을 집어삼켰다. 그만큼 가시거리가 줄어들었다.
서리 늑대가 뿜어내는 마력으로 그것들의 위치를 알 수는 있었으나 워낙 수도 많고 속도도 빨라서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몰려드는 늑대들을 상대로 난전을 벌이던 중 첫 번째 희생자가 나타났다.
“아악!”
늑대들 중 하나가 장하민의 등짐을 물어 그녀를 밖으로 끌어낸 것이다.
“하민 씨!”
다른 사람들이 대응하기도 전에 늑대는 그녀를 눈보라 속으로 끌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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