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생각만큼 인상적이진 않습니다
“대련? 갑자기?”
강주혁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으르렁대는 것도 결국, 자존심 때문이지 않습니까? 4부 4팀도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 1부 3팀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이런 신경전은 게이트 밖에서 끝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련을 통해서 공략을 주도할 팀을 고르자, 이 말입니까?”
신태훈이 물었다.
“네. 헌터답게 실력으로 증명하는 거죠. 어느 쪽이 더 뛰어난 팀인지를. 그리고 그 팀이 다른 팀을 이끄는 겁니다.”
“저는 찬성이에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듣고 있던 안다정이 말했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군요.”
신태훈도 웃음을 흘렸다.
회장의 명령을 거스를 수 있는 명분도 생기고 강주혁이랑 싸울 수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제안이었다.
신태훈이 승낙을 하자 4부 4팀도 동의했다.
안다정과 강주혁은 유덕현과 공허진을 번갈아가면서 봤다.
“저, 저는 상관없어요.”
“나도 뭐, 대세를 따라야지.”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대련을 끝으로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주혁은 엄경일 팀장과 신태훈 과장을 번갈아보면서 말했다.
“내가 보증하죠.”
신태훈이 답했다.
점심시간. 훈련장.
대련은 각 팀의 세 명이 일대일로 싸워서 두 판을 먼저 이기는 팀이 승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1부 3팀은 티를 내지 않았으나 4부 4팀은 여기저기에 소문을 냈다. 공략 1부의 신흥강자와 공략 4부의 에이스 팀이 격돌한다는 소식에 회사에 남아 있던 헌터들이 몰려들었다.
훈련장은 수십 명의 구경꾼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각 공략부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인지라 부장들까지 얼굴을 비췄다.
“유 팀장.”
“네. 부장님.”
임재경이 몸을 풀고 있는 유덕현을 불렀다.
“어쩌자고 일을 벌인 거야?”
“4부 4팀의 반발이 너무 심해서요. 이 상태로 던전에 들어갔다가는 패싸움이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선 제압을 해두면 말이 좀 덜 나올 것 같아서요.”
유덕현은 강주혁의 핑계를 대는 대신에 자신이 총대를 메는 쪽을 택했다.
임재경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문제라서 크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길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유덕현은 내심 불안했지만 강주혁과 안다정을 믿기로 했다. 그 두 사람이면 누구랑 붙어도 이길 것 같았으니까.
“공략 1부의 명예와 내 체면이 걸려있다. 꼭 이겨.”
“네, 부장님.”
강주혁은 3팀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임재경을 보면서 옅은 웃음을 흘렸다.
예전의 그였다면 신태훈이 있는 4부 4팀과 싸운다는 말만 들어도 미쳤냐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길 수 있어도 져주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태훈의 패배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처럼 보였다.
“누가 먼저예요?”
1부 3팀에서는 안다정이 먼저 나왔다.
1부 사람들은 환호를, 4부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
“저예요.”
안다정의 상대는 마법사인 이정인 과장이었다. 이번에는 좀 전과는 반대로 1부에서는 야유가, 4부에서는 환호가 나왔다.
“잘 부탁해요.”
“저도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일대일 전투에는 상대적으로 약한 마법사. 하지만 과장쯤 되면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수단을 많이 가지고 있다.
트드득!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이정인의 피부가 회색빛으로 변했다. 물리 공격을 방어해 주는 스톤 스킨이었다.
슉!
안다정은 기다리지 않고 곧장 화살을 날렸다.
스스슥.
하지만 그보다 한 템포 빨리 이정인이 주문을 외웠다. 그녀를 중심으로 본체와 완전히 똑같이 생긴 분신 네 개가 생겨났다.
팡!
안다정의 화살이 본체가 있던 곳을 관통했다. 하지만 분신 하나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제법이군.’
강주혁은 이정인을 보면서 감탄했다.
분신을 만들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나 본체가 가진 살기나 투지를 감추는 건 어렵다. 남은 네 개의 이정인에게서는 어떤 살기나 투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헌터에게 있어 저런 평정심은 굉장히 큰 무기가 될 수 있다.
팟!
네 명의 이정인이 워프 주문을 이용해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네 개의 분신이 안다정을 포위했다.
안다정은 가장 멀리 떨어진 분신을 향해 화살을 날린 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분신을 향해 도약했다.
서걱!
두 개의 분신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머지 두 분신이 안다정에게 라이트닝 볼트를 날렸다.
콰지직!
두 줄기의 번개가 안다정에게 내리꽂혔다.
휘익!
안다정은 전방을 향해 검을 가볍게 두 번 휘둘렀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뒤틀리면서 그녀의 모습이 일그러졌다.
“와!”
목표를 향해 곧게 뻗어 나가던 번개 줄기는 그 일그러짐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굴절되더니 안다정이 아니라 옆에 있는 바닥에 꽂혔다.
검기를 이용해 마나를 흩어버린 것이다.
휙!
안다정이 분신 하나를 향해 검을 집어던지는 동시에 나머지 하나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팡!
검을 맞은 분신이 흩어져버렸다.
남은 것은 본체뿐. 본체는 공격 마법을 사용하는 대신 또 한 번 네 개의 분신을 전개했다.
펑!
하지만 안다정의 화살은 목표에 닿기 전에 폭발을 일으키면서 수십 개의 내공 화살로 변했다. 산탄총처럼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간 화살들은 본체와 분신을 모두 덮쳤다.
“악!”
하나하나가 강력한 내공이 담겨 있었기에 스톤 스킨 정도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퍽!
회색의 피부가 깨지면서 살색이 드러났다. 이정인은 그대로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수련장 바닥에 피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힐러!”
엄경일 팀장이 외침에 힐러가 달려왔다.
“와아아아!”
몰려있던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3팀 잘한다!”
“안 과장님, 사랑해요!”
공략 1부 쪽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어버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난 사람은 신유정이었다. 목이 쉴 정도로 고함을 질러대는 한편 치어리더처럼 다른 사람들의 응원을 독려하기도 했다. 한 판만 더 이기면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머저리 같으니.”
강주혁의 옆에 서 있던 신태훈이 인상을 썼다. 강주혁이 생각하기에 안다정을 상대로 마법사인 이정인이 이 정도로 버텼으면 꽤나 선방한 것이다.
“설마 정말로 이길 줄 아셨던 겁니까?”
강주혁은 신태훈을 도발했다.
이렇게 열을 받게 만들어놔야지 전투에서 평정심을 잃을 테니까.
“이정인 과장은 자신의 전부를 보여준 게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를 제때 펼쳐 보이는 것도 헌터의 역량이죠.”
자신에게 이 정도로 당돌하게 나오는 사람을 처음 봐서인지 신태훈은 황당해했다.
“좋은 승부였어요.”
안다정은 힐러의 응급처치로 정신을 차린 이정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역시 강하시네요. 잘 배웠습니다.”
이정인은 안다정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표정을 보니 딱히 앙금이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정인은 희미하게 웃었으나 그 웃음은 신태훈의 굳은 얼굴을 보자마자 사라졌다. 그녀는 패자에게 어울릴 법한 침통한 표정으로 자기네 팀으로 돌아갔다.
“다음은 누굽니까?”
신태훈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그가 나서자 왁자지껄했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공략 1부가 야유를 하지 않은 건 물론이거니와 4부에서도 응원을 보내지 않았다. 신태훈은 공략 4부에서도 인기가 없었던 것이다.
“망해라! 똥멍청이!”
잠잠해졌던 분위기를 신유정이 깨버렸다. 그녀가 험한 말을 섞어가면서 놀려대자 공략 1부 사람들이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신태훈은 인상을 썼으나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걸 깨달은 1부 사람들은 야유를 그칠 줄 몰랐다.
“가보겠습니다.”
강주혁이 유덕현에게 말했다.
“살살해. 살살.”
유덕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혁이 승리해서 자신까지 싸우지 않기를 바라는 한편, 신태훈이 패배했을 때 보일 반응이 두려웠던 것이다.
“좋은 누이를 두셨군요.”
강주혁은 수련용 대검을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날은 무디지만 크기만큼은 그레이트 소드에 필적했다.
“오오, 강주혁이다!”
“강 대리님 파이팅!”
“강 대리, 저 못생긴 인간의 엉덩이를 걷어차 줘요!”
마지막은 역시나 신유정이었다.
“잠깐,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 내기해요! 내기! 나는 주혁 씨한테 5만 원 걸게요.”
신유정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공략 1부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나도!”
“저도요!”
“나는 신태훈 과장한테.”
“부장님, 여기 배신자가 있습니다!”
“어떤 놈이야!”
강주혁은 순식간에 도떼기시장처럼 변해버린 공략 1부 쪽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쥐새끼처럼 피해 다닐 생각만 하더니 의외군요. 먼저 싸움을 걸어오다니.”
신태훈이 강주혁을 보면서 말했다.
“불필요한 싸움은 피하자는 주의여서요.”
“지금은 필요한 겁니까?”
“4부 4팀의 불만을 잠재우지 않으면 던전에서 피곤해질 것 같아서요.”
강주혁의 말에 신태훈이 코웃음을 쳤다.
“한 손 검도 쓸 줄 안다고 들었는데 왜 대검을 택한 겁니까?”
“과장님의 머리를 단번에 쪼개고 싶어서요.”
“그 전에 강 대리가 난도질당할 겁니다.”
“싸워보면 알겠죠.”
“회장님께서 강 대리에게 한 수 배우라고 얘기하시더군요. 정말로 날 가르칠 능력이 있는지 한번 보죠.”
“보여드리죠.”
신태훈의 검이 예기로 번뜩였다.
같은 수련용 검이어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달랐다.
신태훈은 그 상태로 검례를 취했다. 속이 썩어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김태현보다는 확실히 어른스러웠다.
강주혁도 검을 들어서 인사를 했다.
“오오.”
신태훈이 투지를 드러내자 구경꾼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가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훈련장을 아우르고 있었다.
‘신태원의 손자라 이건가.’
강주혁은 도발에 응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세를 잡았다.
탓!
신태훈이 강주혁을 향해 신형을 쏘았다. 신태훈의 검이 곧장 강주혁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캉!
강주혁은 대검을 세워 신태원의 칼끝을 막았다. 두 검이 맞부딪히는 곳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해 볼 만하군.’
첫 합을 나누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신태훈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 맞으나 아직 여물지 않았다는 것을.
캉! 챙! 캉!
첫 공격이 막힌 신태훈은 곧장 연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강주혁은 신태훈의 검보다 두 배나 큰 검을 들고도 완벽하게 막아냈다.
신태훈의 랭크는 A급에 가까운 B급. 반면에 강주혁은 비교적 최근에 C급에 들어섰다. 마검이 있으면 B급까지 끌어올릴 수 있지만 지금 들고 있는 검은 평범한 검이다. 그래서 격차를 줄일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강주혁은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파천제왕검의 기본 초식을 통째로 외우고 있어서 검로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이 낫군.’
파천제왕검을 정식으로 배운 신태훈보다 옆에서 구경한 걸로 흉내를 내던 권대호가 나은 것 같았다. 권대호의 위상과 연륜을 생각한다면 비교하는 것 자체가 결례일지도 모른다.
“후우.”
신태훈이 검을 멈추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초조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한 번쯤은 강주혁의 방어를 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까지 방어만 하고 있을 겁니까? 그렇게 큰 검을 들고 있으면서 쪽팔리지도 않습니까?”
“파천제왕검을 구경하는 중입니다. 같은 검술이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서 많이 다른 모양이군요. 생각만큼 인상적이진 않습니다. 신유정 과장님 쪽이 더 매서웠던 것 같네요.”
사실, 신유정의 검술도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스스로 인정하듯이 그녀의 재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으니까. 굳이 비교하자면 신태훈 쪽이 나은 것 같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신태훈의 눈을 보니 확실히 놀리는 맛이 있었다. 아버지들이 경쟁하듯이 자식들도 서로 경쟁 중이다. 그러니 신유정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걸 보고도 그딴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보죠.”
신태훈이 손으로 칼날을 훑었다.
콰지직!
검에 황금빛 전격이 감겼다. 신태훈은 그 상태로 다시 한번 강주혁을 몰아세웠다.
파직! 파지직!
방어를 해도 뇌기가 검을 따라 전해졌다. 찌릿찌릿한 감각이 온몸을 훑었다. 피부가 찢어지고, 입에서 피 맛이 났다. 속이 진탕하고 현기증이 나자 집중력이 떨어졌다.
몸이 뻣뻣해지면서 반응속도도 느려졌다. 검로를 예측해도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가 생겼다. 반대로 기세가 오른 신태훈의 검은 더 맹렬하고 집요해졌다.
서걱!
마침내 강주혁의 허벅지에 선명한 자상이 생겼다.
‘조금만 더.’
청룡검의 힘을 끌어내 파천제왕검의 뇌기를 상쇄할 수도 있었고, 공격을 당할 곳에 내공을 집중해 피해를 최소화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주혁은 그렇게 하지 않고 버텼다. 아직까지 신태훈은 강주혁의 반격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공격에 모든 걸 싣지 않고 언제든 방어와 회피를 할 수 있는 여유를 남겨둔 것이다.
강주혁은 신태훈이 자신을 끝장내기 위해서 선을 넘기를 바랐다. 바로 그 순간이 모든 걸 끝낼 타이밍이었다.
콰지직!
신태훈을 속이기 위해서 강주혁은 뇌기를 실어 검을 몇 번 휘둘렀다. 검은 신태훈에게 조금도 닫지 못했다.
일부러 힘을 빼고 대충 휘두른 것이지만 신태훈의 눈에는 상처로 인해 자세가 무너져서 그렇게 된 걸로 보일 것이다.
스걱!
강주혁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신태훈은 회심의 웃음을 지으면서 검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붕!
강주혁은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으나 칼날에 전격이 실리지 않았다.
최후의 발악을 가볍게 피해낸 신태훈이 검으로 강주혁의 목을 노렸다. 구경꾼들 중에 S급 힐러도 있으니 그냥 숨통을 끊어놓을 생각이었다.
탓!
하지만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줄 알았던 강주혁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왔다. 목에 박혀야 했던 칼날은 팔을 찍었다.
펑!
상대의 공격을 몸으로 때움으로써 빈틈을 만들어낸 강주혁은 내공을 실은 주먹을 신태훈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