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자료를 정리한 강주혁은 곧장 보고에 들어갔다. 이걸 안건으로 올리면 공략 1부를 넘어 회사 전체가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래도 그 결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안 과장님.”
“네?”
점심을 먹고 와서 졸린 눈을 하고 있던 안다정은 눈을 비빈 후 강주혁을 바라보았다.
“잠깐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강주혁은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갔다. 책상에 자료를 내려놓기 위해서 바로 옆에 서자 안다정은 흠칫거렸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에요. 잠이 덜 깨서.”
던전에서 같이 싸우다 보면 등을 맞대거나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에 붙어있을 때도 많았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강주혁이 가까이 다가오니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벌렁거렸다. 주변 환경이 달라지면서 그에게 받는 느낌도 달라진 것 같았다.
‘미쳤어. 정말.’
안다정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안 과장, 졸지 마. 사무실에서는 자는 거 아니야.”
유덕현이 몽롱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했다.
“침이나 닦고 말씀하세요.”
“아, 이런 실수를.”
유덕현은 책상에 있는 휴지를 뽑아서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았다. 그 역시 식곤증을 이기지 못하고 깜빡 졸았던 것이다.
“뭐예요, 이건?”
안다정이 강주혁에게 물었다.
“비급서고에서 빌려온 책입니다. 광야에서 나온 책이긴 한데 비급은 아닙니다. 대충 훑어봤는데 해석이 안 되는 글자들이 너무 많아요. 그냥 서가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물건입니다.”
“그런데요?”
“표지에 이게 적혀 있더군요.”
강주혁은 표지의 가장 아래쪽에 적혀 있는 정체불명의 글자를 가리켰다. 안다정은 커다란 눈을 껌뻑이면서 그걸 유심히 쳐다봤다.
“마석 매장지의 제단?”
“맞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강주혁은 공략 4부 4팀이 20-A12에서 찍어온 사진을 보여줬다.
“이건 뭐예요?”
“공략 4부 4팀이 20-A12에서 찍어온 사진입니다.”
강주혁의 말에 공허진이 고개를 들었다.
“허진 씨도 같이 볼래요?”
“네?”
“재미있는 걸 찾았는데 허진 씨도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4부 4팀이라는 말이 나와서인지 공허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강주혁의 권유에 따라 안다정의 자리로 왔다.
“뭔데 그래?”
팀원들이 모두 안다정의 자리에 모이자 유덕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주혁은 두 사람에게도 책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준 후, 사진을 보여줬다.
“저기에도 제단이 있었네.”
4부 4팀이 발견한 제단은 3팀이 마석 매장지에서 발견된 제단과 생김새가 똑같았다. 차이는 윗면에 새겨진 글자뿐.
공허진도 마석 매장지에 있는 제단을 사용했다. 그때 아무 얘기를 안 했던 이유는 아마 4부 4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4부 4팀에 있을 때 제단을 아예 못 봤을 수도 있고.
“이 글자를 한번 보시죠.”
강주혁은 표지의 가장 왼쪽에 적혀있는 글자를 가리켰다. 4부 4팀이 발견한 제단에 새겨진 글자와 똑같았다.
“완전히 똑같네요.”
“네. 그리고 이건 광야의 지도입니다.”
강주혁은 책의 표지 옆에 지도를 펼쳐 보였다.
“남쪽에는 마석 매장지가 있고 서쪽에는 4부 4팀이 제단을 발견한 장소가 있습니다. 표지에 있는 글자들의 위치랑 비교해보세요.”
“설마 이 표지가 지도?”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만약 이게 지도라면 우리는 여섯 개의 제단을 추가로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혹시 제단마다 마석 매장지가 딸려 있는 건가?”
“4부 4팀이 발견한 제단 근처에서는 없었습니다.”
“저…….”
공허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4부 4팀도 그 지역을 제대로 둘러본 게 아니에요. 들어가자마자 습격을 당해서…….”
4부 4팀은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서 공략 보고서를 과장해서 써놓았다. 아깝게 패배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요새 초입에서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마석 매장지가 있을 수도 있겠네?”
유덕현이 머릿속에는 온통 마석 매장지밖에 없는 것 같았다. 안다정도 기대감에 들뜬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더 중요한 포인트는 제단의 힘입니다.”
“제단의 힘?”
강주혁이 정신을 집중하자 주변에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책상 위에 얹어놓은 종이들이 날아올랐다. 마석 매장지 쪽 제단에서 얻은 바람의 힘을 사용한 것이었다.
“아직 하실 수 있죠?”
“그래. 이게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다.”
“저도요. 이런 건 처음이에요.”
강주혁이 기억하기로 제단에게서 받은 힘은 거의 한 달 동안 유지된다. 다른 제단들도 마찬가지다.
“용의 길을 걷는 자여, 바람의 세례를 받아 눈보라를 몰아내라. 이 문구 기억나세요?”
“기억나요. 제단 옆에 적혀 있던 거죠?”
“네, 과장님. 우리는 지금 바람의 세례를 받은 상태입니다. 허진 씨.”
“네?”
“20-A12 공략에서 어떤 점이 특히 어려웠어요?”
강주혁의 말에 공허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픈 기억을 건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이겨낼 수 있어야지만 진짜 헌터가 될 수 있다.
“몬스터들이 지역 정중앙에 있는 요새에 모여 있어요. 웨이포인트가 없어서 옆 지역에서 들어가야 하는 데 가는 길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이에요.”
던전 안의 지형과 기후는 제각각이다. 광야 같은 초대형 던전에서는 자연적으로 인접하는 게 불가능한 지형이나 기후가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사막 바로 옆에 설원이 있는 식이다.
시간은 외부와 거의 똑같이 흐르지만, 계절은 지역마다 다르다. 그리고 그 계절은 바뀌지 않는다. 아마 20-A12에서는 사시사철 눈보라가 휘몰아칠 것이다.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다들 동상에 걸렸어요. 냉기 피해를 줄여주는 장비까지 장착했는데도 감당이 안 됐어요. 무거운 방한용 장비들은 나중에 전투할 때 방해가 되었고요.”
공허진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필요한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했다.
“눈보라 때문에 길을 잃기도 쉬워요. 거리도 많이 멀고요. 요새까지 가는 데 2박 3일이 걸렸어요. 20-A12는 신규 지역이라서 경계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실제 크기는 다른 지역의 서너 배쯤 되는 것 같아요.”
“듣기만 해도 끔찍하구먼.”
“몬스터랑 싸우기도 전에 녹초가 되겠네요.”
유덕현과 안다정도 고개를 저었다.
“제단에게 받은 바람의 힘으로 눈보라를 밀어내는 건 어떨까요?”
강주혁의 말에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그가 한 말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제단에게서 받은 힘은 클래스와 랭크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내공이나, 마나가 드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 힘으로 눈보라를 몰아낼 수만 있다면 체력소모 없이 요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요?”
“제단에 적혀 있는 문구에 따르면 가능할 겁니다.”
“그 눈보라가 이 눈보라인지는 어떻게 알아요?”
“이 책의 제목은 <용의 길>입니다. 그리고 표지에는 지도가 있죠.”
“제단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길이다?”
“네. 우리는 이미 첫 번째 제단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힘을 얻었죠. 실제로 이 책의 첫 번째 챕터에 우리가 봤던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다른 부분은 해석이 불가능하지만요.”
강주혁은 책을 펼쳐서 해당 부분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제단에서 얻은 힘으로 두 번째 제단으로 간다는 건가요?”
“네, 과장님. 바로 그겁니다.”
세 사람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강주혁을 바라보았다.
백 퍼센트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 이건 어떻게 안 거냐?”
유덕현이 물었다.
“그냥 비급서고를 구경하다가…….”
딱히 둘러댈 말이 없었던 강주혁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웃어 보였다.
“진짜 신기한 놈이네. 무슨 놈의 신입사원이 이런 건수를 일주일에 하나씩 가지고 오냐.”
“운이 좋았습니다.”
“일단, 부장님한테 한번 얘기해 보자. 주혁이 너도 따라와.”
“상당히 그럴듯한데.”
임재경 부장 역시 공략 3팀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는 강주혁의 제안에 따라서 하민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녀와 공허진을 데리고 훈련장으로 갔다.
“이 정도면 됐어요?”
하민지 팀장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공허진에게 물었다. 그녀는 마법으로 훈련장 안에 눈보라를 일으켰다. 공략 1부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다.
“이것보다 좀 더 강했던 것 같아요.”
공허진이 눈보라의 강도에 대해서 증언했다.
“주혁 씨가 다쳐도 내 책임 아니에요.”
“걱정 마. S급 힐러가 여기 있다. 죽어도 다시 살려낼 수 있으니까 제대로 해.”
임재경의 말이었다.
하민지 팀장은 혼자서 뭐라고 구시렁거리면서 눈보라를 강화했다. 눈보라가 거칠어질수록 빠져나가는 마나도 많아졌다.
“네. 딱 이 정도였어요.”
공허진이 확인을 해줬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강주혁은 빙그레 웃으면서 하민지가 만들어낸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른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제단에게 받은 바람의 힘만 이용했다.
쏴아아.
강주혁 주변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불어 닥치는 눈보라를 흩어놓았다.
A급 마법사가 일으킨 눈보라이기에 조금만 오래 있어도 동상에 걸릴 수 있다. 하지만 강주혁은 한참을 서 있어도 피해가 없었다.
“좋아. 그만.”
임재경 부장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강주혁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챙겨서 곧장 양준기 전무를 만나러 갔다.
“흥미롭군요.”
임재경의 설명을 들은 양준기 전무가 말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강주혁 대리는 정말 무서운 친구군요.”
양준기 전무가 쓰게 웃었다. 그를 손 봐주려다가 회장에게 얻어맞은 가슴팍이 아직까지도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유능한 친구죠. 마석 매장지를 찾아낸 방법도 강주혁 대리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임재경이 강주혁을 옹호하자 양준기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걸 감지한 임재경은 몹시 불편해졌다.
“전무님, 혹시 그 친구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양준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임재경은 신대성이 강주혁 집안에 저지른 일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회장에게 왜 그런 수모를 당했는지도.
“그런 건 아닙니다.”
양준기가 말을 아끼자 임재경도 불편해졌다. 그는 자신이 양준기의 심복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와 모든 걸 공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임재경은 강주혁을 아꼈다. 그 덕분에 공략 1부의 실적이 나날이 치솟고 있으니까. 이지혜와 김현우 사건 때문에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찰나에 마석 매장지를 발견해서 자신의 명줄을 늘려준 사람이기도 했고.
강주혁을 함께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자신의 보스는 어째서인지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더 골치 아픈 건 그 이유조차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쨌든 잘 했습니다. 신태훈 과장이 좋아하겠군요.”
신태훈이 속한 공략 4부 4팀은 사실상 그의 원맨팀이나 마찬가지였다. 20-A12에서의 공략 실패는 그의 화려한 경력에서 유일한 오점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그 오점을 지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이 건은 공략 4부 4팀이 맡게 될 겁니다.”
양준기 전무는 이재경이 가져온 자료를 잡으면서 말했다.
“전무님!”
깜짝 놀란 임재경이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가 양준기의 치켜뜬 눈을 마주하고는 커다란 몸을 숙였다.
“죄송합니다.”
“내 결정에 문제 있습니까?”
양준기 전무는 신대성의 아들인 신태훈에게 실적을 몰아주려고 한다. 20-A12는 원래 공략 4부 4팀이 담당하던 지역이다.
실패를 했지만 신규 지역에서의 공략 실패는 드문 일은 아니다. 재공략 기회를 준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명분도 완벽하고 관례상으로도 이렇게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략 1부는 남 좋은 일만 하게 되는 꼴이다.
“이건 공략 1부에서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저희한테도 기회를 주십시오.”
“임 부장.”
“네. 전무님.”
“임 부장이 실적을 올리는 것보다 신태훈 과장이 실적을 올리는 게 더 중요합니다. 미래를 생각하세요.”
어차피 신대성이 회장이 되면 실적이 좀 모자라는 건 괜찮다. 그는 자신에게 얼마나 충성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길 테니까.
“공략 1부에는 준영이도 있지 않습니까?”
임재경은 아들을 언급함으로써 양준기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준영이한테 기회를 주려고요?”
“제가 판을 한번 깔아보겠습니다.”
양준기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공략 1부가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면 신태훈 과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부서 간의 알력다툼이 격화될 수 있어요. 쓸데없는 분란 일으키지 말고 공략 4부에 넘겨요.”
“합동 공략은 어떻습니까?”
“임 부장이 추진했던 합동 공략에 대해서 하민지 팀장이 불만이 많더군요.”
임재경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민지가 양준기한테 고자질을 한 모양이다.
“말이 합동 공략이지 1부 4팀은 사실상 들러리나 마찬가지였죠. 신태훈 과장을 강주혁 대리의 들러리로 만들면 내가 무슨 낯으로 부회장님을 뵙겠습니까?”
양준기가 완고한 태도를 보이자 임재경은 난감해졌다.
“강주혁 대리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깟 대리가 가만있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단순한 대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남들은 3년이 걸리는 대리를 3개월 만에 달아버린 사람이다. 직급만 대리지 회사에서의 존재감을 따지면 임원보다 더 컸다. 양준기도 이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마석 매장지 발견을 사장님이 직접 내려와서 치하했습니다. 인센티브 액수를 결정하신 것도 회장님 아니십니까. 강주혁이 우리 결정에 반발해서 윗선에 찌르기라도 한다면 전무님께서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회장이라는 말이 나오자 양준기가 미간을 모으면서 살기를 드러냈다. 임재경은 오금이 저려 왔다.
“임 부장은 누구 편입니까?”
양준기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저는 부회장님의 편입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임재경이 압박감을 견디면서 말했다.
“그럼 부회장님의 시대를 준비하세요. 그게 우리 역할입니다.”
“알겠습니다.”
“강주혁 대리가 불만을 품지 않도록 알아서 잘 마무리해요. 그게 임 부장이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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