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나무뿌리입니다
“주혁 씨, 괜찮아요?”
강주혁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안다정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손을 들어서 그녀를 제지했다.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뭐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단에 내재 된 힘과 사신무극검이 공명한 것 같았다.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다.
‘청룡검 때문인가?’
청룡은 바람과 번개를 관장하는 신수(神獸). 제단이 품고 있는 바람의 힘이 청룡검을 자극한 것 같았다. 실제로도 몸 안에서 강렬한 풍기(風氣)가 느껴졌다.
“제, 제 마법이 잘못되었나 봅니다.”
자신의 감정 마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주선우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울상을 지었다. 강주혁은 통증을 느끼는 와중에도 억지로 웃어 보였다.
“선우 씨가 제대로 본 게 맞습니다. 그냥 제 기술이랑 궁합이 좀 안 맞았던 것 같네요.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정말이에요.”
“진짜 괜찮은 거죠?”
안다정은 심각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네. 오히려 더 좋아졌어요.”
강주혁은 몸이 한결 가벼워진 걸 느꼈다. 가슴 통증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제단은 바람의 힘을 부여한다.
제단을 만진 사람은 점프력이 강화되고, 낙하 속도가 줄어든다.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도 높여주며, 주변의 바람을 조정할 수 있게 해주지만 바람 그 자체를 공격용으로 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강주혁은 달랐다.
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청룡검의 힘이 더욱 강해진 느낌을 받았다. 바람을 일으켜 적들을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유가 뭐지?’
회귀 전, 이런 일을 겪지 못한 이유는 청룡검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제단 중에는 불의 힘을 부여해주는 것도 있다. 주작검은 회귀 전에도 사용했는데 왜 지금처럼 불의 힘을 흡수할 수 없었을까?
‘적어도 두 개는 알아야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인가.’
사신무극검을 상징하는 검은 나무의 심상은 청룡검을 익혔을 때 나타났다. 주작검만 알고 있었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다.
어쩌면 사신무극검의 진정한 능력은 최소 두 개의 검술은 익혀야지만 발현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불의 제단에서 확인해봐야겠군.’
* * *
정비와 휴식을 끝낸 일행은 전투를 재개했다. 안전과 체력 관리를 위해서 내려가서 싸우는 대신 언덕 위에서 마석 도마뱀에게 원거리 공격을 퍼붓는 전략을 택했다.
안다정과 주선우가 중심이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보조 무기로 거들었다. 강주혁의 제안으로 일행은 전부 제단의 힘을 빌렸다. 그래서 공격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앞쪽이 아니라 뒤쪽을 먼저 공격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강주혁이 기지를 발휘했다.
“언덕이랑 가까운 녀석들을 먼저 잡으면 놈들의 시체가 계단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언덕에 붙어 있는 놈들은 놔두고 뒤에 있는 녀석들부터 잡아주세요.”
강주혁이 시키는 대로 한 덕분에 일행은 마지막까지 언덕을 지킬 수 있었다.
중간에 내공과 마나가 부족해지면 다시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식으로 싸웠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내려가서 피해를 감수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수십 마리를 피해 없이 잡고 나니 나머지 도마뱀들이 공동 여기저기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이제 내려가자.”
이때부터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강주혁에게 예기치 않은 변화가 시작된 것도 이쯤이었다.
서걱!
쿠엑!
강주혁은 평소보다 더 공격적으로 마석 도마뱀을 공격했다.
마석 도마뱀은 느린 대신 맷집이 뛰어나다. 전력으로 공격해야 하는 건 맞지만 강주혁은 매번 그 이상의 힘을 쏟았다. 몸 안에서 힘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은 가끔 강주혁의 통제를 벗어났다.
‘뭐지?’
마검의 영향력은 아니었다. 마검은 분명히 제대로 통제되고 있었다. 이명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런데도 몸 안의 피가 들끓었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피는 더 많은 피를 갈망했다. 강주혁은 대검을 단검처럼 휘두르면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주혁아, 조심!”
무아지경에 빠져서 마석 도마뱀을 도륙하던 강주혁은 마석 골렘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유덕현은 이동능력을 상실한 마석 골렘을 그냥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다. 근처에 가지만 않으면 큰 위협이 안 되지만 막상 잡으려고 하면 이쪽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까.
하지만 강주혁은 마석 도마뱀에 정신이 팔려서 마석 골렘의 팔이 닿는 거리까지 들어가 버렸다.
쿠어어!
마석 골렘은 곧장 강주혁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하지만 주먹이 닿기 직전, 강주혁 주변에서 광풍이 불었다. 맹렬한 바람이 커다란 돌주먹을 공중에 멈춰 서게 만들었다.
찍어 누르려는 주먹과 밀어내려는 바람 사이에 힘겨루기 시작되었다.
콰콰콰!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바람이 바위로 된 주먹을 난도질했다. 바위에 수많은 칼자국이 생겨났고 그것들은 이내 금이 되었다.
콰직!
강주혁의 대검이 금이 간 주먹을 박살냈다.
그는 곧장 신형을 쏘았다. 움직이고 있는 마석 골렘을 타고 올라가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주저앉아 있는 골렘은 다르다.
푹!
몇 번의 도약으로 머리까지 올라간 강주혁은 골렘의 목과 몸을 이어주는 틈새에 대검을 쑤셔 박았다. 그리고는 무극검을 사용했다.
펑!
골렘의 심장부가 들썩였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희미해졌다.
콰르르!
골렘을 이루는 마석과 돌덩어리들이 더 이상 붙어 있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강주혁은 무너진 돌무더기와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모든 일이 1분도 안 되는 순간에 일어났다. 그만큼 강주혁의 움직임이 빨랐다. 랭크를 능가하는 전투력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빠른 속도였다.
“주혁 씨!”
안다정이 강주혁에게 달려왔다.
‘내공이…….’
강주혁은 안다정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도 못한 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무극검을 사용하면 내공을 모두 소진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5할 이상의 내공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마석 골렘이 가진 내공을 일부 흡수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공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제단 때문인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전투에 몰두하게 된 것도 내공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회복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제단과의 접촉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주혁 씨, 괜찮아요?”
가장 먼저 달려온 안다정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가 아는 강주혁은 철저하게 계산되고 통제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검을 휘두를 때 들어가는 체력까지 고려해가면서 싸우는 사람이 갑자기 광분해서 마구잡이로 공격을 가하자 걱정이 들었다.
“네, 과장님. 좀 흥분해 버렸네요.”
강주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유덕현에게 고개를 숙여버렸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 불찰입니다.”
무극검으로 내공을 한 번 쏟아내고 나니까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을 감싸던 광풍도 사그라졌고.
“아니다. 안 다쳤으면 됐다.”
잡으면 좋지만 피해가 생길 걸 염려해서 내버려 둔 것이다. 피해 없이 잡았으니 오히려 이득이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유덕현은 강주혁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 게 신경이 쓰였다.
“네, 팀장님. 정말 괜찮습니다.”
강주혁도 찝찝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공략이 끝나면 스승님께 가봐야겠군.’
권대호라면 지금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끝났어요.”
나머지 사람들도 합류했다.
“두 시간 넘게 걸렸네요.”
정혜영이 손목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한 시간 반 정도는 언덕 위에서 농성을 벌였다. 내려와서 남아 있는 마석 도마뱀을 잡는 데에는 반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두 시간에 이 정도면 잘한 거지.”
유덕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석 도마뱀 백여 마리와 마석 골렘까지 처리했다.
“이거 실적으로 계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주선우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어디를 보나 마석이었다. 몬스터도 마석 덩어리고 벽에도 마석이었다.
“억대 인센티브에 진급은 확정이죠.”
“정말요?”
정혜영의 말에 주선우가 화들짝 놀랬다.
“아직 기뻐하기는 일러. 여기에서 못 나가면 구경도 못 할 테니까.”
유덕현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몬스터들은 모두 제거했지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다. 물과 식량은 별로 없는데 구조팀이 제시간에 여기까지 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출구를 한번 찾아볼까요?”
강주혁은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 한번 둘러보자.”
강주혁은 공동의 진입로와 정반대되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원하는 단서를 찾아냈다.
“팀장님.”
강주혁은 일행을 불러 모았다.
“뭔데?”
강주혁은 돌바닥에 새겨져 있는 룬 문자를 가리켰다.
“룬 문자?”
“바람의 세례를 받은 자여, 몸을 맡겨라. 그럼 태양을 보게 될 것이다.”
“무슨 뜻이지?”
“제단의 옆에 적혀 있던 문구에 바람의 세례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제 생각에 제단의 힘을 빌리는 걸 바람의 세례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제단의 힘을 빌린 사람은 몸을 맡겨라?”
“네. 태양을 보게 될 거라는 표현을 보니 그렇게 하면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강주혁은 천장을 가리켜 보였다. 천장에 직경이 5m쯤 되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 근처의 바람이 저리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안다정이 말했다. 실제로 그녀의 머리가 위쪽을 향해 어지럽게 나부끼고 있었다.
“몸을 맡긴다는 게 무슨 소릴까?”
“바람의 힘을 사용한다는 게 아닐까요. 제단을 건드린 사람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강주혁이 답했다.
“일리가 있네.”
“한번 해볼까요?”
“음…….”
안전 제일 주의자인 유덕현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뚱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강주혁이 다시 한번 말했다.
“일단 로프부터 묵자.”
유덕현은 명령대로 일행은 로프로 허리를 묶어서 서로를 이었다.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그래.”
강주혁은 선두를 자청했다. 제단에게 받은 바람의 힘을 사용하는 순간,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날아오르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이 정도 속도면 무슨 일이 생겨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주혁이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는 상태로 말했다. 그 모습이 꼭 무중력 상태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로프에 몸이 묶여 있어서 올라가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로프를 끊거나 다른 사람들도 함께 올라오면 더 높이 상승할 수 있을 것이다.
“팀장님, 우리도 가 보죠.”
안다정도 유덕현에게 건의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에서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었다. 공동으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얼마만큼 무너졌는지 모르니까.
구조팀이 이곳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설사 발견하더라도 굴을 뚫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주혁이가 있으니까 별일 없겠지.’
마침내 유덕현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 안 과장이랑 주혁이가 앞장서.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간다. 최대한 천천히.”
“네, 팀장님.”
제단에서 빌린 바람의 힘을 사용하자 다들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일행은 손을 잡은 채 천장에 뚫린 구멍 안으로 진입했다.
주선우가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서 헤드라이트처럼 위를 비추었다. 통로는 수직으로 뚫려있었고 장애물도 없었다.
“천장이에요!”
30분 정도 비행한 끝에 일행은 막다른 천장에 도달했다.
“발을 디딜 만한 곳은 없어?”
“옆에 있습니다!”
천장의 바로 옆에는 움푹하게 들어간 공간이 있었다. 열댓 명이 몸을 누일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일단 거기로 빠져나가자.”
강주혁이 선두로 상승기류에서 벗어났다. 몸이 곧바로 중력에 반응했다.
지상에 착지한 강주혁은 로프를 당겨서 일행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여기가 어디쯤이지?”
“꽤 많이 올라온 것 같은데요.”
“선우 씨, 잠깐 불 좀 빌려줄래요?”
강주혁이 주선우에게 말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주선우가 자신의 지팡이를 가까이 가져왔다. 지팡이 끝에 하얀빛이 맺혀 있었다. 조명 마법인 <라이트>였다.
“다들 이것 좀 보시죠.”
일행의 시선이 강주혁에게 모였다. 그는 천장에 붙어있는 굵은 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뭐야, 그건?”
“나무뿌리입니다. 아주 큰 걸로 봐서 지하에서 자라는 녀석은 아닙니다.”
강주혁의 대답에 일행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치열했던 공략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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