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허진 씨가 끝내요
공허진은 머릿결이 풍성했다.
너무 풍성하다 못해 머리카락에 파묻혀버린 모습이었다. 잘 관리했다면 아름다워 보였겠지만 지금은 돈을 아끼려고 몇 달 동안 안 자른 것처럼 지저분해 보일 뿐이었다.
키가 별로 크지 않은 데다가 자세까지 구부정하니 꼭 난쟁이처럼 보였다. 입고 있는 정장은 구깃구깃하고 구두는 끝이 닳아있었다.
온갖 잡동사니가 잔뜩 담긴 상자를 안고 있었는데 한쪽이 찢어져 있어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여, 여기 공략 1부 3팀이 아닌가요?”
공략 3팀 사람들이 답이 없자 공허진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눈알을 부지런히 굴리면서 눈치를 봤다.
“흠흠. 공략 3팀 맞아요. 어서 와요.”
유덕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억지로 웃는 티가 너무 났다.
“나는 공략 3팀 팀장인 유덕현 차장이고 이쪽은 안다정 과장, 저쪽은 강주혁 사원이에요. 다들 인사해. 앞으로 우리 팀 힐러로 일할 공허진 사원이야.”
“반가워요. 안다정 과장이에요.”
안다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강주혁 사원입니다. 항상 힐러가 없는 게 아쉬웠는데 잘됐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 네. 저도…….”
공허진은 강주혁의 얼굴을 보고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안 과장이 허진 씨 자리 잡는 거 좀 도와줘.”
“네, 팀장님.”
“주혁아, 커피 한잔할래?”
“네. 팀장님.”
강주혁은 유덕현이 할 말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그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옥상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에스프레소 계열의 커피만 마시는 안다정과는 달리 유덕현은 이런 믹스 커피도 좋아했다.
“미리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유덕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허진 씨 말씀이신가요?”
“그래. 사실, 부장님한테 들은 건 좀 됐어. 안 과장에게도 얘기했고.”
“힐러가 올 거라는 얘기는 해주셨잖아요. 오늘인 줄은 몰랐지만.”
“시기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유덕현은 말끝을 흐리면서 난감해했다.
“허진 씨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요.”
공허진의 합류는 회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강주혁은 10년 넘게 그녀와 함께 일했고 그만큼 그녀를 잘 알았다.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강주혁은 무슨 얘기를 할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유덕현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유덕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한참을 뜸을 들인 끝에야 입을 열었다.
“여기가 평범한 회사였다면 내가 지금 쓰레기 짓을 하는 셈이야. 팀원들을 이간질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팀장으로서 실격이지. 이건 우리가 공략회사니까 알려주는 거야.”
“편하게 말씀하세요.”
“얼마 전에 공략 4부에서 사고 터진 거 기억하지?”
“네, 팀장님.”
이형석이 일을 벌이기 바로 전 날에 있었던 일이다. 공략 4부의 헌터 한 명이 앰뷸런스에 실려 나가는 걸 강주혁도 봤다.
“그 팀의 힐러가 허진 씨였어. 영력이 고갈되어서 치유를 못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전사는 내공 즉, 오러를 다루고 마법사는 마나를 다룬다. 힐러들이 사용하는 힘은 <소울> 또는 <영력>이라고 부른다. 영력이 고갈되면 치유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면요?”
“그냥 기술 시전에 실패한 거야.”
힐러가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치유를 못한다? 그 사람은 힐러로서 자격 미달이다. 기술 사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 안정성이니까.
“너무 의지하면 안 되겠군요.”
“우리만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야. 힐러 한 명 붙었다고 우리 셋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지역들이 할당될 거니까.”
“윗선에서도 허진 씨의 문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아닌가요?”
“알지. 왜 모르겠냐. 그래도 당장 내보낼 수는 없으니 만만한 우리한테 떠넘긴 거지.”
“근데 그 정도 사고를 치면 퇴출당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법적으로는 감봉이랑 정직밖에 안 된대. 고의적인 게 아니라 실수였으니까. 물론, 회사에서도 내보내고 싶어서 계속 압박을 가했는데 안 나가고 지금까지 버텼나봐.”
“난감한 상황이네요.”
“그리고…….”
유덕현은 다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골랐다.
“말씀하세요. 팀장님.”
“<멘탈 하우스>에서 지금도 치료 받고 있다더라.”
헌터는 하루에 몇 번이나 생사의 기로에 놓인다. 그만큼 큰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것도 헌터에게 중요한 일이다. 평범하고 건전한 방법으로 이겨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게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도박에 손을 댄 추근호 과장 역시 그런 케이스. 미확인 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가야 하는 정찰팀의 특성상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걸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것이다.
회사에서 이런 직원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만든 심리 상담소가 멘탈 하우스다.
“그때 사고 때문인가요?”
“그렇겠지.”
설립 취지는 좋았으나 현실적으로 멘탈 하우스를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멘탈 하우스를 들락날락거리면 정신력이 약한 걸로 간주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직업 특성상 헌터들은 호전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투 때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전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헌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상사로 있으면 멘탈 하우스에 갔다는 사실만으로 안 좋은 이미지가 쌓이고, 심하면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자비를 들여서 몰래 외부 기관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식적이고 선량한 사람인 유덕현조차도 이런 분위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미리 얘기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네 이직 얘기가 나오니까 덜컥 겁이 났거든.”
“제가 허진 씨 때문에 태원을 떠날까 봐요?”
“그래. 동료랍시고 심각한 하자가 있는 사람을 붙여줬잖아. 공략 4부에서 거의 추방당하다시피 이쪽으로 넘어온 거야. 회사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지.”
강주혁은 찝찝해하는 유덕현을 씩 웃어 보였다.
“설사 허진 씨가 마이너스가 된다고 하더라도 팀장님과 안 과장이라는 엄청난 플러스요인이 있잖아요. 저도 정말 남고 싶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자식이, 말은 잘 해요.”
유덕현도 피식 웃었다.
“허진 씨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나도 이러는 거 도의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거 알아. 그래도 네가 던전에서 등을 맡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네. 그 점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냈으면 좋겠습니다.”
“끝내다니?”
“팀장님은 우리 팀 리더시잖아요. 어떤 리더도 완벽한 팀원들만 거느릴 수는 없잖아요. 그런 팀이 있다면 리더가 필요 없겠죠.”
“모자라는 팀원을 품을 줄도 알아야한다?”
“네. 허진 씨도 태원에 들어왔으니 기본적인 자질은 갖췄을 겁니다. 낙하산처럼 보이지는 않잖아요.”
“그래. 좀 짠한 느낌이 들기는 하더라.”
“트라우마 때문에 허덕이고 있지만, 우리가 그걸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분명 한 사람의 몫을 해낼 겁니다.”
“그게 가능할까? 던전에서 한 번 심하게 무너진 사람이 보란 듯이 재기하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다. 들어본 적도 없고.”
“가능한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죠.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내시면 그만큼 팀장님의 주가도 높아지실 겁니다.”
“이놈아, 그런 거는 너 같은 괴물한테나 가능하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요원한 일이야. 괜히 헛바람 넣지 마.”
“이제 차장 다셨는데 부장 자리도 노려보셔야죠.”
“뭐?”
유덕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 없으십니까?”
“당연히 하고는 싶지. 근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 부장님은 공략 1팀을 밀어줄 테니까.”
“왜 공략 1팀인가요?”
“거기에는 우리 회사 넘버 3의 아들이 있잖아.”
“그 넘버 3가 어떻게 됐습니까?”
“…….”
단독 사냥 시험을 참관하러 온 신태원 회장이 양준기 전무를 박살 냈다는 소문은 이미 회사 전체에 쫙 퍼져 있었다.
현장에서 뒷정리를 한 직원들에 의해 알려진 것인데 양준기 전무가 이번 주에도 병가를 내고 회사에 나오지 않아서 다들 확실시하는 분위기였다.
양준기 전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장님이 손찌검할 정도로 큰 잘못이란 건 분명했다. 그리고 양준기 전무가 회장님의 총애를 잃었다는 것도.
“앞으로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쉽게 바뀔까? 전무님이 잘린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이 정도 사건이 생겼는데 전무님 입지가 이전 같지는 않을 겁니다. 임재경 부장님도 생각이 많아지시겠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될 겁니다. 그리고…….”
강주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유덕현은 그의 입만 쳐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공략 3팀이 마석 매장지를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게 가능할까?”
“제가 마석 도마뱀을 잡으러 가겠다고 했을 때도 믿지 않으셨죠.”
“진짜로 그게 될 줄은 몰랐지.”
“이번에도 가능할 겁니다. 애초에 회장님이 이 일을 공략 1부에 맡기신 것도 제가 매듭짓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찾아낼 방법은 있고?”
마석 도마뱀에게는 강렬한 귀소본능이 있다. 마석 도마뱀 새끼를 잡은 곳 근처에 풀어놓고 추적하면 마석 매장지를 찾을 수 있다.
이때 매장지가 지면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으나 만약 지하 깊숙한 곳에 있으면 추적이 어렵다. 토양에 따라서 마석 도마뱀이 뚫어놓은 굴이 금방 다시 묻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야죠. 어쨌든 확률은 어느 팀이나 똑같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공략 1부 팀들에 대한 평가는 부장님 권한이지만 이곳은 엄연히 회사입니다. 3팀이 압도적인 실적을 올려버렸을 때도 1팀을 밀어줄 수 있을까요? 양준기 전무도 위태로운 상황에서요.”
유덕현의 표정이 한없이 심각해졌다. 그는 나직이 숨을 내쉬고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이 이상 올라가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서 일찌감치 단념하고 있었거든. 지난번에 포상금 받은 걸 잘 관리하면 나가서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지. 그래서인지 네 얘기를 들어도 현실감이 없네.”
“팀장님, 저 팀장님 때문에 이 회사에 남은 겁니다. 저 남겨놓고 떠나시면 배신입니다.”
“인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저 꼭 태원에서 사장 달고 싶습니다. 제가 위로 올라가려면 팀장님이랑 과장님이 저를 끌어주셔야 합니다.”
유덕현은 어이가 없어서인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강주혁도 마주 웃었다.
“너 진짜 신입사원 맞냐?”
“맞습니다.”
“이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거냐? 나랑 안 과장은 가르친 적이 없는데.”
“……드라마에서 배웠습니다.”
“별 게 다 나오네.”
“요즘은 리얼리즘이 대세입니다.”
“허허…….”
“부장 자리에 오르시려면 사람관리 능력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문제시되는 직원을 잘 케어해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게 만들면 분명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좋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한번 해보자.”
유덕현은 공허진이 던전에서 심각한 문제를 보이면 잘 타일러서 회사를 나가게 만들 생각이었다.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다른 팀원들까지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강주혁의 얘기를 들으니 욕심이 생겼다.
“단, 안 과장은 네가 책임져.”
“안 과장님이요?”
“우리 회사에서 안 과정한테 말이 통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안 과장이 쓸데없는 걸로 트집 잡는 사람은 아닌데 기본이 안 되어있으면 가차 없어. 그래서 너 이전에 두 명이나 그만뒀다. 한 놈은 불성실했고, 다른 한 놈은 무능력했거든. 네가 허진 씨 제대로 커버해 주지 않으면 안 과장한테 박살나서 그만두게 될 거야.”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10년쯤 후, 태원공략에서 가장 뛰어난 힐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공허진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는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진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그리고 공허진은 강주혁이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착한 사람이었다. 호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 점이 그녀 자신에게는 단점이겠지만 강주혁 입장에서는 오히려 장점이었다. 뒤통수를 칠 위험이 적으니까.
이런 이유들 때문에 강주혁은 공허진을 유덕현, 안다정과 함께 강주혁 라인에 포함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허진을 살려야 한다.
“팀장님, 말이 나온 김에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다음 공략 때 다크 엘프를 잡으러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크 엘프? 갑자기 왜?”
강주혁이 이유를 말해주자 유덕현의 눈이 커졌다.
이틀 후, 공략 3팀은 새로운 힐러와 함께 던전에 들어갔다.
사무실에서 공허진은 특별한 문제를 드러내지 않았다. 약간 허둥대고 자잘한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맡은 바를 충실하게 해냈고, 회의 때 괜찮은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말수가 적고 항상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사무실 분위기를 삭막하게 만들었다는 것 빼고는 딱히 흠잡을 때가 없었다.
하지만 던전에 들어가자 문제가 드러났다.
“허진 씨, 괜찮아요?”
안다정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공허진을 보면서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아, 네. 괜찮아요.”
전투 중도 아니고 공략 지역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그런데도 공허진은 수전증이 있는 사람처럼 손을 떨고 땀을 뻘뻘 흘렸다. 입술도 파리하고 피부도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안다정의 시선이 강주혁 쪽으로 옮겨왔다. 이미 그녀에게 팀장님의 승진을 위해서 공허진이 꼭 필요하다는 얘기를 해뒀다. 안다정도 편견을 가지고 대할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막상 현장에 오자 불안한 모양이다.
강주혁은 걱정 말라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전방에 열둘.”
잠시 후, 안다정이 적의 기척을 느꼈다.
“다들 내 뒤로!”
슉! 슉!
유덕현이 명령을 내리자마자 어두침침한 수풀 속에서 수십 개의 단검이 날아왔다.
안다정과 강주혁은 재빨리 유덕현의 등 뒤에 일렬로 늘어섰다. 팀장의 두껍고 넓은 방패가 단검들로부터 팀원들을 지켜주었다.
딱 한 사람 빼고.
“악!”
머뭇거리다가 뒤늦게 방패 뒤로 온 공허진이 팔에 단검을 맞고 비틀거렸다.
안다정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런 기동전술은 공략팀의 기본이다. 안다정과 강주혁이 따로 연습해서 잘하는 게 아니다.
“빨리 치료해요.”
“네.”
공허진은 재빨리 상처에 손을 얹었다. 손에서 빛이 났다. 하지만 빛이 수명을 다한 전구의 그것처럼 힘이 없었다. 상처는 전혀 아물지 않았다.
“안 되는 거예요?”
“하, 할 수 있어요.”
“그냥 물약 써요! 시간 없으니까!”
안다정의 말대로 밀림 속에서 다크 엘프들이 튀어나왔다.
보랏빛 피부와 뾰족한 귀를 빼면 인간과 거의 똑같은 생김새.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고 자기들만의 언어도 가지고 있다.
대화를 시도해 본 헌터들도 있었지만, 극도의 공격성 탓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헌터들을 잡으면 잔혹하게 살해해서 전시해놓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헌터들은 인간과 유사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다크 엘프를 몬스터로 취급했다. 몸에서 마석이 나오고 리스폰 데이면 부활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다들 조심해!”
예리한 시미터로 무장한 열두 명의 암살자들이 공략 3팀을 덮쳤다.
움직임만큼이나 검술도 유려했다. 하지만 공략 3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챙!
다크 엘프가 휘두른 검을 유덕현이 방패로 쳐냈다. 그것과 동시에 강주혁의 검이 그 다크 엘프의 복부를 꿰뚫었다.
검이 배에 박혀 있는 동안 단검이 날아왔지만, 옆에 있던 안다정이 끼어들면서 쳐냈다. 그렇게 하다가 생긴 빈틈을 다시 유덕현이 방패로 메워주었다.
합을 맞춘 지 3개월밖에 안 됐지만 세 사람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다크 엘프들은 세 배에 달하는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열세에 처했다.
“어? 어…….”
적들의 유일한 희망은 공허진이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녀는 움직임이 둔했고 군무를 추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다크 엘프를 따라잡지 못했다.
“허진 씨, 이쪽으로!”
강주혁은 공허진이 타깃이 되기 전에 그녀를 세 사람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캉!
그리고 검을 옆으로 세워 공허진을 노리고 들어오는 세 개의 시미터를 동시에 막아냈다.
다크 엘프는 민첩한 대신 힘이 약한 편이다. 3대 1 상황이었지만 강주혁은 힘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강주혁은 샐러맨더를 양손으로 쥐고 있다가 중간에 왼손을 손잡이에서 뗐다. 오른손만으로는 시미터 세 개를 동시에 막을 수 없었다.
손목이 꺾이기 시작했으나 강주혁이 한 템포 더 빨랐다.
서걱!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봉마검을 뽑은 것이다.
컥!
보랏빛 피부에 세로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복부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오자 피 냄새가 진득하게 피어올랐다. 단 한 번의 발검(拔劍)으로 세 명이 고꾸라졌다.
캉! 서걱!
강주혁은 그 후로도 두 자루의 검을 능수능란하게 휘둘러 적들을 베어 나갔다.
‘쌍검도 배운 거야?’
안다정은 공허진의 빈틈을 완벽하게 메워버린 강주혁을 보면서 웃음 지었다.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허진 씨는 어떡하지?'
반면에 공허진을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강주혁의 검에 베여서 비틀거리는 다크 엘프에게 메이스를 휘둘렀으나 힘이 약해서 죽이지 못했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느낌이었다. 꼭 태어나서 처음 던전에 들어온 헌터 아카데미 신입생 같았다.
“해치웠나?”
전투는 길지 않았다. 애초에 스펙만 놓고 봐도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그런 것 같네요. 주혁 씨?”
안다정은 마지막 다크 엘프를 죽이지 않고 있는 강주혁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끄읍, 끕.
강주혁은 다크 엘프의 옷을 일부 뜯어내 놈의 입안에 쑤셔 넣었다.
“뭐 하는 거예요?”
“혀를 깨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강주혁은 다크 엘프의 뒷무릎을 발로 차서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그리고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허진 씨.”
“네?”
공허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허진 씨가 끝내요.”
몬스터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방법은 트라우마를 부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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