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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제때 왔군.
44화 제때 왔군.
다음 날.
공략 3팀은 숙취 때문에 고생을 했다.
유덕현은 5억을 벌어다준 남편에게 통금 따윈 없다는 말을 하면서 자정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셔댔다. 그래도 숙취해소음료의 도움으로 출근은 제때 할 수 있었다.
반면에 남들 한 잔 마실 때 두 잔씩 마셔대던 신유정은 구울 같은 몰골로 나타났다. 오전에는 예정대로 던전에 들어갔는데 바닥에 파전을 한 장 만들어놓고는 다시 실려 나왔다. 그리고 곧장 반차를 쓰고 집에 가버림으로써 로열패밀리의 위엄을 보여주었다.
임재경 부장은 차마 신유정에게 뭐라 하지는 못하고 직속상관인 김현우 팀장을 영혼까지 탈탈 털었다. 술 냄새를 풍기면서 돌아다니던 유덕현도 부장실로 끌려가서 같이 깨졌다.
‘안 과장이 주혁 씨를 좋아하나 봐요!’
술자리에서 신유정이 한 말 때문에 공략 3팀 분위기는 약간 미묘해졌다.
안다정은 평소보다 좀 더 날이 서있는 모습이었고 강주혁과 유덕현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분위기만 미묘했지 달라지는 건 없었다.
금요일 저녁.
강주혁은 퇴근하자마자 기차를 타고 가족들이 있는 대구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대구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화곡리라는 마을에 살았다. 가문의 선산과 게이트가 그 근처에 있었다.
하지만 문제의 사건이 터진 후, 마을에 남아있을 수 없어서 대구로 이주를 했었다.
대구에 내려가는 건 회귀 이후 처음.
하루라도 빨리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으나 회사 일이 바빠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끊임없이 닥쳐오는 일들을 해결하려면 주말을 꼬박 투자해서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급한 일들은 일단락되었다. 앞으로는 벌어지는 일들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일을 벌이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잠깐의 여유를 누릴 생각이었다.
“주혁아!”
동대구역에 도착하니 형 강수혁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강주혁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더 우락부락했다. 미형인 동생보다는 좀 더 투박한 느낌이었으나 그래도 잘 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법한 얼굴이었다.
“형!”
강주혁은 반가운 마음에 형을 와락 끌어안았다.
“야, 징그럽게 왜 이러냐. 나 게이 아니야.”
“반가워서 그러지.”
강수혁은 피식 웃으면서 동생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많이 피곤하지?”
강주혁은 사무실에서 일했지만 강수혁은 채광현장에서 하루 종일 중노동을 했다. 그런데도 동생 앞에서 조금도 피곤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진짜 어른이 되어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세상의 모진 풍파로부터 동생을 지켜줬던 형이었다.
강주혁은 어른이 된 후에야 형이 자신과는 달리 준비나 과정도 없이 곧바로 어른들의 세계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냈다는 것도.
강주혁은 그런 형에게 항상 고마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살았다.
“괜찮아. 기차에서 좀 잤어. 엄마는?”
“아직 일 하시지. 근데 웬 검이냐?”
“형한테 자랑 좀 하려고 가져왔지.”
강주혁은 등에 메고 있던 샐러맨더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이야, 멋진데. 도검소지자격증은?”
던전이나 공략회사 외의 장소에서 무기를 들고 다니려면 도검소지자격증이 있어야한다. 무기마다 발급받아야 되는 건 아니고 하나만 있으면 되지만 발급에 50만원이나 든다.
“샀지. 이제 돈 많아.”
“대기업이니까 월급은 세겠지만 초장부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월급이 다가 아니지. 내가 얼마나 버는지 알게 되면 기절초풍할 걸?”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형은 동생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면서 킬킬거렸다.
두 사람은 전철을 타고 반월당역으로 갔다. 반월당은 대구의 중심부고 번화한 곳이지만 큰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얼룩처럼 남아있는 재개발지구를 볼 수 있다.
강주혁의 가족이 사는 집은 그 재개발지구 중 한 군데에 있었다. 10년 전, 처음 대구에 왔을 때 아버지 쪽 친척이 마련해준 집이었는데 그 후로도 다른 곳으로 갈 만한 여력이 안 돼서 눌러앉게 되었다.
두 사람은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어두침침한 골목을 걸었다. 그리고 경첩이 뜯겨져나갈 것처럼 낡은 철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작은 공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비가 오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천장은 곰팡이와 얼룩이 가득했다.
낡은 집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벽이 외풍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해서 실내인데도 으슬으슬했다.
하지만 바닥에는 커다란 상이 펼쳐져있었고 그 위에는 상다리가 휠 정도로 많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이건 뭐야?”
“엄마가 쉬는 시간에 와서 차려놓고 갔어. 데워줄 테니까 옷 벗고 기다려.”
“나도 도울게.”
“됐어. 오늘만 해주는 거니까 형 말 들어.”
“알았어.”
옷을 벗고 손을 씻은 강주혁은 형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방 한구석에 쌓여있는 아버지의 유품들을 살펴봤다. 주로 회사운영과 관련된 장부들이었다.
사람이 누울 공간도 부족한 집에 두기에는 부피도 크고 불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것들이라서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가끔 무슨 뜻인지도 모를 단어와 숫자가 잔뜩 적혀있는 장부들을 뒤적거리면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곤 했다.
강주혁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장부들 중 하나를 골라서 빠르게 훑어봤다.
‘찾았다.’
숫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는 종이 한 구석에 신경질적으로 휘갈겨 써놓은 메모가 하나 있었다.
‘쌍둥이 나무 사이. 마을 방향으로 한 걸음.’
강주혁은 회귀 전 과장 시절, 집에 내려왔다가 이 문구를 우연히 발견했다.
쌍둥이 나무는 어린 시절 지냈던 마을의 뒷산에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간을 내어 찾아갔더니 파헤쳐진 흔적만 남아있었다.
강주혁은 그곳에 아버지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묻어놓았다고 생각했다. 회귀 전에는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이 선수를 쳐서 가져가버렸지만 지금 가면 아버지가 묻어놓은 물건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하냐?”
“아, 그냥 아빠 생각이 나서...”
동생의 말에 강수혁은 서글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그래.”
“다 됐다. 밥 먹자.”
형제가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끝냈을 때쯤, 어머니가 집에 돌아왔다.
“얘들아, 엄마 왔다.”
강주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말도 없이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등을 쓸어주었다.
“잘 지냈어? 우리 아들.”
강주혁은 울음을 참느라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했다. 회귀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서 가슴이 먹먹했다.
“우리 아들 정말 장하다. 그렇게 들어가기 어렵다는 회사에도 합격하고. 아빠가 자랑스러워할 거야.”
강주혁은 좀 진정이 된 후에야 겨우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두 손을 꼭 잡아줬다. 어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세월과 고된 노동이 얼굴에 주름을 잔뜩 만들어놓았다. 두 손도 막노동을 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거칠기 짝이 없었다.
“엄마도 왔으니까 할 얘기가 있어.”
“뭔데?”
“일단 다들 앉아 봐.”
어머니와 형은 막내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좀 전부터 보일러를 돌려놓았는데도 바닥에는 냉기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이불을 가지고 왔다. 세 사람은 이불 안에 손발을 넣은 채로 마주 앉았다.
강주혁은 은행 어플을 켜서 가족들에게 계좌의 잔액을 보여주었다.
“일, 십, 백, 천, 만...”
강수혁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숫자를 하나씩 샜다. 숫자만 길게 나열되어있으니까 감이 안 오는 모양이다.
“십만, 백만, 천만....억? 야, 정말 이거 5억이야?”
“맞아.”
“어떻게 된 거니?”
“회사에서 큰 사고가 일어날 뻔했는데 내가 그걸 막았어. 회장님이 고맙다고 특별포상금으로 주신 거야.”
“무슨 포상금을 5억씩이나 줘?”
형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기분이 좋기는 한데 액수가 너무 커서 걱정이 된 모양이다.
“내가 아니었으면 우리 회사가 게이트에서 쫓겨났을 거야. 그럼 당연히 주가도 폭락할 거고. 손해가 수백억이 아니라 수천억은 났을 걸. 그거에 비하면 5억은 적은 돈이지.”
강주혁은 뿌듯해하면서 말했다.
“맙소사. 5억이라니. 허, 허허...”
형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현실감이 없는 액수였다.
“우리 아들이 벌써 이렇게 큰일을 해냈구나.”
어머니의 눈에서 시작된 눈물이 주름을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 울지 마.”
강주혁은 어머니의 거친 손을 꼭 잡았다.
“큼, 큼...”
형도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되니 강주혁의 콧등도 시큰해졌다.
“이게 다가 아니야.”
강주혁은 잠긴 목으로 말했다.
“다가 아니라고?”
“연봉이 정해졌는데 2억 2천이야.”
“뭐? 연봉이? 아무리 대기업이라지만 신입헌터한테 그렇게 많이 준다고?”
“연봉은 1억이고 인센티브가 1억 2천이야.”
“인센티브? 이제 신입사원이잖아.”
“운 좋게 히든 피스를 찾았거든. 그게 매출이 엄청 나오는데 나만 접근할 수 있어. 그것 때문에 회사에서 날 자를 수도 없어.”
“그런 히든 피스가 있다고?”
“나도 처음 봐. 내가 찾고도 믿겨지지 않더라.”
“우리 주혁이가 정말 큰일을 했네.”
“엄마, 내가 여러 번 말했지. 주혁이는 개천에서 난 용이라고. 난 언젠가 이 녀석이 날아오를 줄 알았다니까. 태원공략에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흠흠, 다른 회사 가라고 잔소리해서 미안하다.”
“아니야. 그 때는 그 말이 맞았어. 고집 부리다가 운 좋게 얻어 걸린 거지. 그건 그렇고...”
강주혁은 목을 가다듬고는 본론을 꺼냈다.
“당장 두 사람 일부터 그만 둬.”
“얘는 무슨 소리니. 돈 있다고 함부로 쓰면 안 돼. 니들 어릴 때는 우리도 여유 있게 살았잖아. 그 때 이렇게 될 줄 알았니.”
“그 때도 저금은 착실하게 했잖아. 우리가 갑자기 이렇게 된 건 돈을 흥청망청 써서가 아니라 사고 때문이지.”
“너 장가도 가야지. 엄마는...너희들 장가갈 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지금까지 학비 대고 생활비 댄 것만으로도 충분해. 엄마 일 계속하다가 골병들면 돈 더 들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나도 엄마 일 그만두는 건 찬성. 하지만 나까지 그만두는 건 반대.”
“형도 마찬가지야. 골병들면 돈 더 들어.”
“나 서른도 안 됐어. 아직 팔팔하다.”
“서른만 넘어봐. 삭신이 쑤실 걸.”
“아주 저주를 퍼부어라. 이 놈아.”
“현실이 그렇다는 거지. 나 한 달에 천만 원 넘게 벌어. 형이랑 엄마 생활비 정도는 내가 감당할 수 있어.”
“네가 목숨 걸고 싸워서 벌어오는 돈으로 놀고먹으라고? 그렇게는 못 하겠다.”
“그럼 엄마는 쉬고 형은 다른 일 알아봐. 몸 덜 상하는 걸로.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학교 다녀도 되고.”
강수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대학도 나오고 견실한 직장을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동생이 어렵게 벌어오는 돈으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 좀 해볼게.”
“엄마도 아직 일 더 할 수 있어.”
“식당에서 일하는 대신 그냥 내가 먹을 반찬 만들어서 보내줘. 나도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는 오피스텔로 옮길 거니까. 아, 그리고 내일 다 같이 이사 갈 집 보러 가자. 언제까지 이런 곳에서 살 수는 없잖아.”
“이사?”
“내가 좀 알아봤는데 대구는 집값도 싸더라. 작은 아파트면 3억 5천 정도면 충분하던데? 교외로 빠지면 더 싸고. 둘 다 일 그만두면 굳이 여기서 살 필요도 없잖아.”
어머니와 형은 아직도 이런 변화가 실감이 안 나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려온 탓에 두 사람은 가난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이런 생활을 하는 게 당연하고 여기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확신에 찬 강주혁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미래가 바로 내일이 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얼음장 같던 방안에 훈훈한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인 토요일.
강주혁은 형과 이사 갈 집을 보러 다녔다. 어머니는 식당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출근을 했다.
저녁에는 가족들끼리 1등급 한우만 취급하는 소고기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사는 다음 주 중에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마지막 날인 일요일.
강주혁은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 대구에 있는 친구를 만난다고 둘러댄 후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친구한테 자랑한다면서 검까지 챙겼다.
‘이걸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강주혁은 주머니에 있는 스틱형 약병을 확인했다. 마시면 30분 정도 내공을 B급 수준으로 올려준다. 가격은 500만원.
최근에 안다정이 준 영약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비상시를 위해서 하나쯤 들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구매했다.
강주혁은 시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대구 근방에 있는 경산시를 지나쳐 남산면에 이르렀다.
버스에 탄지 2시간 만에 강주혁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가 내린 정류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간혹 승용차만 한 대씩 지나갈 뿐. 인적이 드문 시골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강주혁은 곧장 길을 벗어나서 산을 타기 시작했다. 회귀 전까지 합치면 거의 십 년 만에 온 것이지만 이 일대의 지리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했다.
기감을 확장시킨 채로 등산로를 따라 이동하던 강주혁은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본 후 길에서 벗어났다. 태양의 위치를 통해 방향을 가늠하면서 한참을 올라간 끝에 산의 중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 왔다.’
강주혁은 쌍둥이처럼 키와 모양이 비슷한 나무가 나란히 서있는 걸 발견했다. 나무들 너머로 강주혁이 살던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그 너머에 있는 게이트까지.
아버지와 수련을 할 때 자주 올라왔던 곳이다. 마을 쪽에서 올라오면 길도 편하고 시간도 적게 걸렸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저 마을에는 그 날의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남아있으니까.
‘제때 왔군.’
회귀 전에는 두 나무 근처에 제법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땅이 그대로였다.
강주혁은 두 나무 사이에 선 채 마을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준비해온 접이식 삽을 꺼내서 디디고 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툭!
십분 쯤 파내려갔을 때, 삽을 통해 이질적인 느낌이 전해졌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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