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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만족합니다.
35화 만족합니다.
‘넌 엄마의 자랑이야. 그러니까 꼭 성공해야 해. 알았지?’
‘왜 넌 2등 밖에 못해?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엄마는 항상 1등만 했어!’
‘엄마가 돈 없는 애들이랑 놀지 말라고 했지. 우린 그런 애들이랑 달라. 왜 아직도 그걸 모르니?’
‘왜 그렇게 추레하게 다니니. 여자는 예뻐야 남자를 잘 만날 수 있어.’
꿈인지 기억인지 알 수 없는 상념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꿈이라면 정말이지 기분 나쁜 꿈이었다.
이지혜는 잠에서 깨어난 걸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차가운 유치장 바닥이 느껴지자 다시 잠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모든 게 꿈이라고, 그저 지독한 악몽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지혜 씨, 면회 왔습니다.”
이지혜의 얼굴에 오랜만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상념을 떨쳐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회실에서 이지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엄마였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 살면서도 외출할 때면 항상 젊었을 때 썼던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는 엄마.
유치장에 갇혀있는 자식을 만나러 온 건데도 화장이 무척 요란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연남을 만나러 가는 유부녀로 오해했을 것이다.
“지혜야!”
이지혜는 엄마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왜 왔어?”
“하나밖에 없는 딸이 경찰서에 갇혀 있는데 당연히 와야지. 불편한 데는 없어?”
“아직까지는 괜찮아.”
의자에 앉은 엄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미안.”
이지혜도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꼭 성공해서 엄마 인생 보상해준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네.”
“걱정하지 마. 도련님한테 다 들었어.”
“도련님?”
“김태현 도련님 있잖아. 방금 만나고 왔어.”
이지혜는 어쩐지 들떠 보이는 엄마가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태현 오빠가 언제 도련님이 됐어?”
“어머, 얘. 너 오빠라고 부르니? 벌써 그런 사이야?”
“그냥 동기야. 아무 사이 아니야.”
이지혜는 김태현이 엄마에게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궁금해졌다.
“5년만 있으면 된대. 5년 지나도 너 서른하나잖아. 삼심대 초반이면 아직 앞날이 창창해. 너무 걱정하지 마.”
“나 감옥에서 나오면 전과자야. 헌터도 못하고 다른 일도 못해.”
“얘, 도련님이 지금도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는데 네 앞날을 모른 척 하시겠니.”
“모른 척 할 거야. 내가 감옥에 가면 그걸로 끝이니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안 해줘.”
“뭐? 벌써 네 아빠 빚 절반이나 갚아주셨어. 당연히 나머지도...”
“그거야 갚아주겠지. 내가 다 뒤집어쓰기로 했으...”
“얘는! 듣는 사람도 있는데!”
엄마는 호들갑을 떨면서 딸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면회실에 있는 경찰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지혜는 엄마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것 말고도 다른 것도...”
“엄마.”
“...”
이지혜는 작은 손으로 자기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내가, 엄마의 사랑스러운 딸이 사람을 죽이려고 했어. 그 사람들이 운 좋게 살아남아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진짜 살인자가 될 뻔 했다고. 근데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이지혜는 퀭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지 눈만 껌뻑였다.
“다, 당연히 걱정돼지. 그래도 도련님이 있으니...”
이지혜는 자신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를 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보는 게 꼭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서글퍼졌다. 엄마가 며칠 전의 자신처럼 보여서 아니, 며칠 전의 자신이 엄마를 무척 닮아있어서 무서웠다.
“엄마 딸이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고!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니까!”
이지혜는 갑자기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어머, 얘, 갑자기 왜 그러니.”
엄마는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뒤로 뺐다.
“엄마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엄마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이지혜는 엉엉 울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만! 진정하세요!”
멀찍이 떨어진 채 두 사람을 관망하고 있던 경찰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이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했을 뿐, 그 이상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경찰도 이지혜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는 멈춰 섰다.
“...엄마.”
이지혜는 몰려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입을 열었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응?”
“멀쩡하게 잘 살아오던 딸이 갑자기 사람을 죽이려고 했어. 그러면 왜 그랬냐고 물어봐야지. 그게 정상 아니야?”
“도, 도련님이 네가 중요한 일을 했다고...”
“그 중요한 일이 사람을 죽이는 거였다고! 그럼 왜 그런 짓을 했냐고, 왜 그런 일을 맡았냐고 물었어야지!”
이지혜는 책상을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엄마는 딸이 광분하는 이유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이지혜는 지금까지의 삶이 지독한 미몽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
“지혜야.”
“다 끝났어요.”
이지혜는 경찰과 함께 유치장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도 유치장에 들어간 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울었다.
서러워서 울고 미안해서 울었다.
이상하게도 강주혁과 안다정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을 만나서 정말로 잘못했다고 빌고 싶었다. 용서받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정말로 그러고 싶어서 울고 또 울었다.
* * *
“연봉은 1억입니다.”
인사팀 박동수 대리가 계약서를 보고 있는 강주혁에게 말했다.
대기업 헌터 직군의 평균 초봉이 9,000만쯤 된다. 다른 직군을 압도하는 이 연봉이야말로 매일 같이 목숨을 걸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헌터를 선호하는 이유.
강주혁의 연봉에는 1,000만원이 더 붙었다. 인턴 시절 동안 보여줬던 활약을 반영해서 다른 신입사원들보다 더 주는 모양이다.
“주혁 씨의 경우, 인센티브가 매달 1,000만 원 씩 붙습니다.”
“히든 피스에 대한 겁니까?”
“맞습니다. 주혁 씨가 퇴사할 때까지, 그 우물물이 마를 때까지 계속 지급될 겁니다.”
내공을 영구적으로 향상시키는 영약의 가격은 최소 5천만 원이 넘는다. 랭크 하나를 올려주는 영약이라면 아무리 낮은 랭크여도 최소 1억은 받을 수 있다. 영약의 값어치에 비하면 한 달에 천만 원은 그리 큰 액수가 아니다.
하지만 던전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법적으로 모두 회사소유. 강주혁이 발견했고 강주혁만 꺼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회사 입장에서는 꽤 큰 배려를 해준 셈. 앞으로 발견할 히든 피스도 많으니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주혁 씨는 한 달에 한 번 우물물을 길어 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일은 정규업무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월 실수령액이...”
“1,230만 원쯤 될 겁니다.”
회귀 전 히든 피스를 발견했을 때도 인센티브를 받기는 했다. 그러나 이 정도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같은 업적이어도 과장 때 해내는 것과 인턴 때 해내는 것의 차이가 이렇게 컸다.
“그렇군요.”
월급이 약 1230만원. 강주혁의 생활비는 100만원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전국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곳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나가는 돈은 식비 빼고는 거의 없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한 달에 한 번쯤. 친구보다 청계산의 종로투왕을 더 자주 만난다. 회사 근처에 살아서 교통비도 안 든다.
숙소를 고시원에서 좀 더 쾌적하고 넓은 곳으로 옮기면 월세 때문에 돈이 좀 더 나가겠지만 그래도 200만원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230만원은 생활비로 쓰고 500만원은 적금을 든다. 그리고 남은 돈은 가족들에게 보내기로 했다.
‘일부터 그만두시게 해야겠군.’
강주혁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었다. 고된 노동으로 골병을 얻은 어머니를 떠올리면 항상 마음이 아려온다.
지금까지는 가족들에게 받기만 했다. 이제 그걸 갚을 때가 온 것이다.
“마음에 안 드나요?”
강주혁이 생각을 하느라 말이 없자 박동수 대리가 물었다.
“아닙니다. 만족합니다.”
강주혁은 박동수를 슬쩍 봤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신입사원이 임원들만큼 많은 돈을 가져가면 얼마나 속이 쓰릴까.
‘떫으면 네가 히든 피스를 찾든가.’
강주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주 웃어보였다.
“다행이군요. 다 읽으셨으면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됩니다.”
강주혁은 시키는 대로 준비해온 도장을 계약서에 찍었다.
“축하합니다. 이제 정식으로 태원공략의 일원이 되었군요.”
박동수가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강주혁은 박동수와 악수를 나눴다. 눈앞의 인간이 어떤 수작질을 했는지 되새기면서.
* *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살아서 형님들이랑 술도 마실 수 있네요.”
“암, 그런 데서 죽으면 주혁이가 아니지!”
강주혁의 감사인사에 광부들이 잔을 들고 호응했다.
회사 근처의 대형 고깃집. 이윤철 사장의 배려로 채광팀 광부 백 명에게 식사를 대접하게 되었다.
“저도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함께 온 유덕현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광부들이 주목했다.
“우리 주혁이가 이렇게 힘든 일을 겪고도 면접을 잘 봐서 정규직원이 됐습니다. 오늘부로 인턴이 아니라 신입헌터입니다.”
“축하한다!”
“새끼, 잘 될 줄 알았다!”
“헌터 됐다고 우리 잊으면 안 돼!”
강주혁은 광부들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곁에 있던 광부들은 그를 얼싸안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자, 우리 채광팀의 자랑, 주혁이의 창창한 앞날을 위해서 건배!”
김용수 팀장이 잔을 높이 들자 다들 따라서 잔을 들었다.
“주혁이의 창창한 앞날을 위해서!”
그 후로는 왁자지껄한 술판이 벌어졌다. 강주혁은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면서 술을 마셔야했다.
“주혁이, 저 녀석 술이 엄청 세군요.”
유덕현은 아무리 마셔도 멀쩡해 보이는 강주혁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제가 점마 술 가르친다고 대작했다가 죽을 뻔했십니더. 팀장님도 조심 하이소.”
“저야 좋죠. 제가 뻗어도 집에 데려다 줄 녀석이 있으니까요.”
“허허허, 그것도 그러십니더. 팀장님도 한 잔 받으이소. 우리 주혁이 잘 좀 챙겨 주이소. 팀장님만 믿겠십니더.”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다.”
두 팀장도 술잔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강주혁이 돌아왔을 땐, 유덕현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유 팀장님은 어디 가셨어요?”
김용수는 턱짓으로 식당 한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잔뜩 취한 유덕현이 넥타이를 헤어벤드처럼 머리에 묶은 채 광부들과 함께 병나발을 불어대고 있었다.
“좀 적당히 먹이시죠. 저러다 사모님한테 혼나실 텐데.”
“토요일 저녁인데 좀 마시면 어떻노. 니도 한 잔 받아라.”
“네. 팀장님.”
강주혁은 김용수가 따라주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고생 많았다.”
“고생은요.”
“유 팀장님께 얘기 들었다. 회사에서 니 괴롭히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다면서.”
“그래도 같은 팀 분들은 정말 좋습니다.”
“이번에 그 미친 가시나는 같은 팀 아이가?”
“...같은 팀이었죠.”
“니가 어디 가서 욕 먹을 놈은 아닌데 회사가 헌터 쪽은 쪼매 이상한 거 같다.”
“그만큼 받는 것도 많으니까요. 감내해야죠.”
예전이었다면 부조리하다고 느꼈겠지만 주머니가 두둑해져서 그런지 그런 생각이 좀 덜 들었다.
“저 팀장님, 이형석 소장님 있잖아요.”
“우리 소장님은 와?”
“저 구하러 오신다고 소장님이랑 좀 껄끄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김용수는 피식하고 웃었다.
“사장님이 괜찮다고 했다. 걱정 마라.”
“그래도 앙금이라는 게 있을 수 있잖습니까.”
김용수가 약간 떨떠름한 얼굴을 지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속이 좁고 꽉 막힌 양반이기는 하지. 내가 끝나고 정식으로 사과를 했다 아이가. 근데 그 양반이 꽁해 가지고는 아는 척도 안 하드라. 밴댕이 소갈딱지 같으니라고. 무슨 사내 자슥이 그라노.”
“그래서 말인데요. 팀장님.”
강주혁은 목소리를 낮췄다.
어차피 주변사람들 모두 얼큰하게 취한 상태라서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와 자꾸 뜸을 들이노.”
“소장님이 평소랑 다르게 행동하시면 저한테 좀 알려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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