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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지혜 씨한테 고마워해야겠는데요.
31화 지혜 씨한테 고마워해야겠는데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
정신을 차린 강주혁은 자신이 앉아있는 게 아니라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는데...’
체내에 쌓인 독을 배출하기 위해서 운기행공을 했으나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윽...’
강렬한 두통이 느껴졌다. 입안이 꺼끌꺼끌하고 목이 바짝 말라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독 때문인가.’
스치기만 해도 중독되는 맹독을 여러 차례 입에 머금었으니 이런 상태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아직 정신도 몽롱하고 시야도 흐릿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반쯤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주혁은 고개를 살짝 들어서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망생초들이 빛을 흘리고 있었다.
‘더럽게 춥네.’
의식을 잃기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지금은 몸이 와들와들 떨릴 정도로 오한이 들었다.
‘이건?’
강주혁은 옆으로 돌아눕다가 몸에 낯선 옷이 덮여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리님?”
“가만히 있어요.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등 뒤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안다정이 자신의 등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강주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해하지 마요. 주혁 씨 체온이 너무 떨어져서 어쩔 수 없었어요.”
“...감사합니다.”
강주혁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등을 통해서 전해진 안다정의 체온이 추위를 밀어내주는 것 같았다.
“몸은 좀 어때요?”
“목이 좀 건조한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대리님은 어때요?”
“저도 좋아요. 주혁 씨 덕분에 독을 전부 털어냈어요.”
“다행이군요.”
“너무 무모한 전략이었어요. 알죠?”
“둘 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가진 독을 주혁 씨한테 옮긴 꼴이었잖아요. 주혁 씨는 죽을 수도 있었어요.”
“독을 옮기는 게 아니라 나누는 거죠. 둘 다 견딜만한 수준으로요. 영약을 먹은 직후라서 운기행공을 하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버텼고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보죠.”
안다정은 대꾸를 하는 대신 자신의 이마를 강주혁의 등에다 살며시 댔다.
‘갑자기 왜 이래?’
안다정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주혁 씨에게 큰 빚을 졌네요.”
“같은 팀이잖아요. 앞으로 제가 대리님께 빚질 일도 많을 겁니다.”
“그럴 일은 되도록 안 생겼으면 좋겠네요. 더 자요. 주혁 씨에겐 휴식이 필요해요.”
“알겠습니다. 대리님도 쉬세요.”
강주혁은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강주혁은 여전히 공동 안에 누워있었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오한과 두통도 모두 가신 상태.
‘이겨냈다.’
강주혁은 상체를 일으켰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던 안다정이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강주혁의 물음에 안다정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던전에서도 작동하는 아날로그시계라서 대략적인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떨어진지 만 하루가 지났어요. 몸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다. 다 나은 것 같네요.”
“다행이네요.”
“대리님도?”
“저도 그래요.”
“위에서는 무슨 반응이 없었나요?”
강주혁은 막혀버린 천장의 구멍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아직은 없어요.”
“좀 더 기다려야겠군요.”
강주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어제 일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강주혁의 스트레칭이 끝나갈 때쯤 안다정이 입을 열었다.
강주혁도 사실,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다. 회기 전에는 없었던 일이니까.
“지옥벌레가 연쇄폭발을 일으킨 걸까요?”
강주혁은 안다정이 정답을 알면서도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럴 확률이 매우 낮다는 건 아시죠?”
지옥벌레는 지면과 가까운 곳에서만 서식한다. 지반 아래가 비어있었다고는 해도 구덩이가 생겨나는 것과 동시에 막혀버리려면 지하에도 폭발물이 있어야한다.
“그럼...”
“지혜 씨가 벌인 일입니다.”
“...지혜 씨가 왜 이런 일을?”
“저나 대리님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나보죠.”
강주혁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돌무더기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요. 주혁 씨를 시기한다는 것도요. 하지만 고작 그런 감정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잖아요.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요.”
“저도 솔직히 지혜 씨가 이렇게 막 나갈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면 뒤를 받쳐줄 만한 누군가와 합심해서 일을 도모한 것인지도 모르죠.”
“뒤를 받쳐줄 사람이요?”
“회사에서 지혜 씨와 친하면서도 거물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한명 뿐이죠.”
“...김태현?”
“네. 그 정도 뒷배가 있다면 충분히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죠. 일이 틀어져도 그 사람이 지켜줄 거라고 믿을 테니까요.”
“김태현이 주혁 씨를 이렇게 미워할 이유가 있나요?”
“저한테 졌잖습니까. 서자라고는 해도 회장님 핏줄인데 일반 직원에게 졌다는 게 알려지면 얼마나 쪽팔리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이건 아니잖아요.”
강주혁은 이 일의 가장 강력한 동기가 김태현의 복수심이나 이지혜의 시기심이 아니라 이윤철을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신대승의 의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안다정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대리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회사도 던전 못지않게 위험한 곳이잖아요. 어쩌면 회사에서 상대해야하는 괴물에 비하면 던전에 있는 괴물은 양반일 수도 있죠.”
진짜 괴물은 던전이 아니라 회사에 있다. 20년 간 태원공략에서 헌터로 일해 본 강주혁의 지론이었다.
‘음?’
안다정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돌무더기 주변을 서성이던 강주혁은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했다.
“다른 원인이 있을 거예요. 지혜 씨가 이런 일을 저지를 리가 없어요. 주혁 씨도 모든 게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단정 짓지 마요.”
안다정은 같은 팀원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강주혁은 땅에서 주운 걸 들어보였다. 돌덩이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처럼 보였는데 면이 울퉁불퉁하지 않고 평평했다.
“뭐에요, 그건?”
“룬 폭탄의 파편입니다.”
강주혁은 평평한 면에 새겨진 글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룬 폭탄.
던전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암석에다가 폭발을 의미하는 룬 문자를 새긴 것이다. 마법사의 명령에 반응하여 마력폭발을 일으키는 폭탄이다.
전자 장비가 작동하지 않는 던전의 특성상 폭발물이 필요할 때는 다이너마이트나 룬 폭탄이 동원된다. 룬 폭탄 쪽이 더 비싼 대신, 작동이 좀 더 용이하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하루 종일 뒤져야할 줄 알았는데 운이 좋군요.”
강주혁은 룬 문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돌 조각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그게 왜 여기에 있죠?”
안다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룬 폭탄을 땅에 묻어놓고 터뜨리면 이렇게 파편이 남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리님도 아시겠지만, 룬 폭탄은 인간의 발명품이지 던전에서 나오는 발견물이 아닙니다."
그 말인즉슨, 룬 폭탄의 파편이 이런 곳에서 발견되는 건 부자연스럽다는 얘기다.
“우리가 이리로 떨어질 때 생겼던 폭발도 이해가 되는군요.”
룬 폭탄 여러 개를 땅 깊숙이 심어놓고 동시에 폭발을 일으킨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지면과 가까운 곳에만 서식하는 지옥벌레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마 김태현이 사람을 시켜서 미리 심어뒀을 겁니다.”
공략 3팀이 07-A72를 담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공략할 때 빼고는 갈 일이 없다.
그 외의 기간에는 몬스터들만 있지 사람은 없다. 누가 보초를 서는 것도 아니고.
광야 안에 있고, 몬스터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실력자라면 누구든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있던 공터는 가끔 베이스캠프로 쓰이는 곳이죠.”
강주혁이 설명을 이어갔다.
“맞아요. 거기는 07-A72에서 일종의 랜드 마크 역할을 하는 곳이에요.”
“그러니 위치를 기억하기도 싶죠. 07-A72의 한복판에 있는 공터에서 북쪽에 있는 언덕을 넘는다. 이런 식으로요.”
“다른 사람이 와서 미리 룬 폭탄을 심어놓은 다음, 지혜 씨가 우리를 그 위치로 유인해서 폭탄을 터뜨린다?”
“룬 폭탄을 작동시키는 건 마법사만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럼 구울들은요?”
“블랙마켓에 널려있는 게 강령술 소환서입니다. 몇 개 사서 쥐어졌겠죠.”
언데드를 부리는 강령술은 사회적 통념과 사용에 따른 부작용 때문에 법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
하지만 강령술 특유의 효율성과 강력함 때문에 암시장에서는 항상 관련 매물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리 단속을 강화해도 완전히 근절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강령술을 공부해서 직접 사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나 두루마리 형태로 된 소환서는 누구나 쓸 수 있다. 두루마리에 적힌 글을 읽고 찢어버리는 것만으로 발동하기 때문이다.
“소환수는 주인의 말에 절대복종하죠. 아마 좀 떨어진 곳에서 소환해놓고 자기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겁니다.”
“주혁 씨 말대로 하니까 모든 게 맞아떨어지네요.”
안다정은 강주혁의 풍부한 지식과 그걸 이용한 추리력에 감탄했다.
“이제 여기서 살아나가서 죗값을 치르게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강주혁의 말에 안다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여길 좀 조사해볼까요? 나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네. 대리님.”
두 사람은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강주혁은 검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요?”
“날이 많이 상했네요.”
“화기(火氣)에 약한 검이군요. 지원팀 손강우 대리가 고쳐줄 거예요.”
“그 전까지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위태위태합니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데 중고로 산 거죠?”
“중고라면 중고죠. 아버지가 쓰시던 검이니까요. 집이 어려울 때 팔았다가 최근에 다시 사들였어요.”
“아...나 때문에 검을 혹사시켰네요. 미안해요.”
“미안하긴요. 대리님이 주신 영약이 없었다면 저도 죽었을 겁니다. 이 검으로 직장상사를 구했다고 하면 아버지도 뿌듯해하실 거예요. 항상 검은 사람을 구하는 데에만 써야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훌륭하신 스승이네요.”
“훌륭한 아버지이기도 했죠. 슬슬 가볼까요.”
안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번 일로 인해 자신과 강주혁의 관계가 역전되었다고 생각했다.
항상 위에서 강주혁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샌가 그가 그녀를 가르쳐주고 이끌어주고 있었다.
안다정은 이런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강주혁이 충분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으니까.
“이쪽입니다.”
두 사람은 망생초를 피해서 걸었다. 신발을 신고 있어서 중독의 위험은 없으나 가까이 해서 좋을 건 없었다.
공동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징그러운 녀석이 많이 쓸쓸했을 것 같네요.”
이 공동 안에 있는 건 망생초와 죽은 거대 구울 뿐이었다.
“언데드가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거예요.”
“그렇겠죠.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없으니까요.”
“식수가 걱정이네요. 치유 물약은 얼마나 남았어요?”
“두 개가 전부입니다.”
“그걸 물 대신 써야할 것 같아요. 최대한 아껴 마셔요.”
합쳐서 500밀리리터밖에 안 되는 액체가 그들이 마실 수 있는 전부였다.
“네. 대리님. 이게 떨어지기 전까지 구조팀이 와야 할 건데 걱정이군요.”
“그 전에 안 오면 싸워서 지는 쪽을 잡아먹을 수밖에요.”
강주혁은 정색을 하고 안다정을 쳐다봤다.
“...농담이에요.”
“네. 대리님. 알고 있습니다.”
강주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아는 안다정은 절대로 농담 따위를 할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강주혁은 갑자기 달라진 안다정이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어?”
“왜 그래요?”
“저길 좀 확인해봐야겠습니다.”
강주혁은 공동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땅이 조금 꺼져있다는 것 빼고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래도 안다정은 강주혁을 따라갔다.
“지혜 씨한테 고마워해야겠는데요.”
움푹 파인 곳 주변에는 잘게 부수어진 흙덩이가 쌓여있었다.
“이건?”
“마석 도마뱀이 왔다 간 흔적입니다.”
마석 도마뱀은 등에 마석이 잔뜩 박혀있는 괴수종 몬스터.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다니는데 꽤 두꺼운 암석까지도 뚫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몸과 발톱을 가졌다.
“여기 발자국도 있네요.”
강주혁은 발톱모양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발자국을 가리켰다.
“주혁 씨가 이번 해 실적 탑이 되겠군요.”
안다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석 도마뱀은 헌터들의 로또복권이라고 불린다. 마석 매장지를 둥지로 이용하며 자신의 서식지를 멀리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석 도마뱀을 따라가면 마석 매장지를 찾을 수 있다. 헌터들에게 그것보다 큰 실적을 올릴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이 발자국의 주인을 찾을 수 있다면요.”
마석 도마뱀은 인간을 두려워한다. 실제로 싸워보면 B급에 가까운 스펙을 가지고 있지만 이상하게 인간만 보면 달아나기 바쁘다.
지상으로 나오는 경우도 잘 없기 때문에 찾기도 어렵고 잡는 건 몇 배나 더 어려웠다.
“흔적을 찾은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
안다정이 검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왜 그러세요?”
“안 들려요?”
강주혁는 귀를 기울였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미세한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캉! 캉!
강주혁에게는 무척 익숙한 소리였다.
“곡괭이로 돌을 깨는 소리군요.”
두 사람은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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