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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들어와.
24화 들어와.
“태현 군. 여기.”
인사팀 곽진섭 부장이 훈련장에 나타난 김태현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김태현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다른 직원들도 있었기에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 나와 낮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오전 시험은 어떻게 됐습니까?”
“무난하게 통과했다.”
강주혁은 오전에 첫 번째 실기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뭘 내보냈는데요?”
“오크.”
“좀 센 놈을 내보내지 그러셨어요. 하이오크도 한 방에 보내버린 놈한테 그냥 오크가 뭡니까.”
김태현이 짜증을 냈다.
“그 이상은 나도 눈치가 좀 보여서.”
시험상대로 어떤 몬스터를 내보내는지는 인사팀의 주관이지만 랭크를 뛰어넘는 몬스터를 내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제법 상태가 좋은 놈으로 내보냈다. 힐러 시켜서 버프까지 걸어주고.”
“그래서 힘은 좀 뺐나요?”
“전혀. 5초 만에 끝났다.”
이지혜를 시켜서 강주혁의 내공을 계속해서 흩어놓고 있었다.
아마 그동안 내공이 전혀 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약효가 누적되어서 있던 내공도 새어나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전투센스가 아무리 뛰어나도 내공이 바닥이면 제대로 싸우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 5초 만에 끝내버렸다?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그 기술은 썼어요?”
“...아니.”
“그럼 어떻게 한 겁니까?”
“그냥 미친 듯이 잘 싸우더라. 싸우는 게 아니라 가지고 놀았어.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헛짓거리를 하셨군요.”
김태현은 대놓고 면박을 줬다.
“네 손으로 끝내는 게 아버님이 보시기에도 좋지 않겠냐.”
곽진섭의 말에 김태현이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저를 배려해서 일부러 시험을 쉽게 만들었다고 하시지 그러십니까. 온갖 수작은 다 부려놓고 원하는 건 하나도 못 얻고.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곽진섭은 새파랗게 젊은 놈이 쓴 소리를 해대는 걸 듣고는 속이 뒤집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마음을 잘 감출 수 있을 만큼 노련한 사람이었다.
“미안하게 됐다. 대신 내가 이번 시험은 확실하게 준비해놨어. 걱정하지 마.”
곽진섭은 자연스럽게 김태현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방향을 틀었다.
“준비요?”
“저기 검들 보이지?”
곽진섭은 훈련장 한구석에 있는 무기거치대를 가리켰다. 공정성을 위해서 대련시험은 전용무기가 아니라 훈련용 공용무기로 치러진다. 저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하는 것이다 .
“맨 왼쪽에서 세 번째 검이야.”
김태현이 씩 웃었다.
“티 나는 건 아니죠?”
“나 이래봬도 부장이다.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시기는 지났지.”
“믿겠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해도 김태현은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다.
랭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김태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주혁이 최석도를 가지고 노는 걸 본 후 그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생겼다.
싸움실력이랑 딱히 상관이 없는데도 히든 피스와 필기시험 만점 소식은 공포감을 배가시켰다.
김태현은 이지혜가 꾸준히 먹인 약과 독이 발라져있는 검이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강주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이 싸움에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있었다.
“근데 이 새끼는 왜 안 오는 거예요?”
“아직 점심시간 5분 남았어.”
“자기 명줄이 걸린 시험인데 미리 와서 준비해야하는 거 아니에요. 아직 정식으로 채용도 안 된 놈이 빠져가지고는.”
곽진섭은 자기도 신입사원인 주제에 서열놀이를 하려는 김태현이 가소로워 속으로 비소를 흘렸다.
“안녕하십니까!”
그 때, 모든 직원들이 훈련장 입구를 향해 우렁찬 소리로 인사를 했다.
김태현과 곽진섭은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시발...”
“난감하게 됐군.”
이윤철 사장이 직접 훈련장을 찾은 것이다.
“검은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곽진섭이 김태현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이윤철 정도의 고수라면 검에 뭔가가 발라져있다는 걸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도대체 똑바로 하는 게 뭡니까.”
김태현은 오만상을 쓰면서 말했다.
곽진섭은 그런 김태현을 남겨놓고는 이윤철에게 달려갔다.
“사장님! 여기는 어쩐 일로...”
“아, 곽 부장도 있었네. 우리 회사 유망주들이 한 판 붙는다고 해서 잠깐 보러왔네. 괜찮지?”
“물론입니다. 사장님. 상석으로 모시겠습니다.”
“하하, 이 사람아. 훈련장에 상석이 어디 있나.”
“제일 가까운 곳이 상석이지요.”
곽진섭과 달리 김태현은 느릿느릿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김태현은 노골적으로 건들거렸다.
“자네도 인턴에게 관심이 많나 보군.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될 일을 직접 나서고.”
“인턴 주제에 자꾸 시건방지게 굴어서요. 손을 좀 봐주려고요.”
이윤철은 곧바로 대꾸하지 않고 김태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김태현은 몸이 굳어오는 걸 느꼈다. 이윤철이 살기를 드러내는 것도 아닌데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심신을 틀어쥐는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걸 보았다. 멈추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그 때, 입구 쪽에서 인사소리가 들렸다.
이윤철이 고개를 돌리자 김태현의 떨림도 멎었다.
“주인공이 왔군.”
이윤철은 다시 김태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뽑은 인턴인데 살살해주게.”
이윤철은 싱긋 웃어보이고는 강주혁에게로 다가갔다.
‘시발, 숨 넘어 가는 줄 알았네.’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머리가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공략 1부 3팀 인턴 강주혁입니다.”
강주혁은 이윤철을 알아보고는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몇 주 만에 보는군. 헌터 생활은 어때? 할 만한가?”
“네. 사장님. 정말 좋습니다.”
“좋다니 다행이군. 어렵게 얻은 기회니까 놓치지 말게.”
“네. 사장님. 꼭 통과하겠습니다!”
이윤철 사장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고는 직원들이 준비해준 의자로 가서 앉았다.
“거치대에서 원하는 장비를 하나씩 챙겨오면 됩니다.”
곽진섭의 지시에 따라 강주혁과 김태현은 거치대 쪽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가는 길에 김태현이 시비를 걸었다.
“많이 컸다. 곡괭이. 정규직 시험도 보고.”
“태현 씨.”
“왜?”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김태현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강주혁을 노려보았다. 강주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
김태현이 째려보면 열에 아홉은 겁을 집어먹고 눈을 피한다. 하지만 강주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윤철의 눈빛에 굴욕을 당한 김태현은 내심 강주혁에게 분풀이를 할 생각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짜증이 났다.
“뭔데?”
“제가 이기면 다시는 저를 곡괭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왜? 광부출신이라서 쪽팔리냐?”
“아니요. 저는 광부출신이라는 점이 자랑스럽습니다.”
“자랑스러워? 그럼 계속 광부노릇이나 하지 그러냐?”
“제 적성은 헌터 쪽인 것 같아서요.”
“개소리는. 광부가 자랑스럽다는 놈이 곡괭이는 왜 싫어해.”
“태현 씨가 하는 곡괭이라는 말을 꼭 멸칭처럼 들리니까요. 광부들을 모욕하는 말 같아서 귀에 거슬립니다.”
“허.”
김태현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네가 진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 하냐?”
“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내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습니까?”
“허세 부리는 건 여전하군. 내가 이기면?”
“태현 씨가 정하십시오.”
“네가 찾아낸 히든 피스에서 영약 가져와.”
“저만 꺼낼 수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회사의 재산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알겠습니다.”
김태현은 거치대로 가서 곽진섭이 준비해놓은 검을 골랐다. 곽진섭은 우려를 표했지만 김태현은 이거라도 있어야 덜 불안할 것 같았다.
강주혁은 여러 검의 날들을 천천히 확인한 후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걸 골랐다.
두 사람은 훈련장 한복판으로 갔다. 대기하고 있던 힐러가 심판으로 나섰다.
“시험시간은 10분입니다. 10분 내에 지원자가 대련상대를 꺾지 못하면 실격으로 처리됩니다. 훈련장 전체를 대련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구경하시는 분들 쪽으로는 되도록 오지 마십쇼.”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두 번째 실기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강주혁은 김태현을 마주보면서 검을 얼굴 앞쪽에 세워 검례를 취했다.
대련에 앞서 서로 검례를 취하는 건 기본적인 예의다. 하지만 김태현은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 유명한 <파천제왕검(破天帝王劍)>을 볼 수 있겠군요. 영광입니다.”
강주혁은 한껏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김태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파천제왕검은 강남검제 신태원이 만든 검술. 자식들에게는 전수해줬지만 적자가 아닌 김태현에게 가르치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다.
김태현의 아버지인 신대승은 신태원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뿐인 아들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김태현은 그 점을 항상 한스럽게 여겼다.
‘저 새끼가 어떻게...’
강주혁의 말투로 보건대 분명 자신이 파천제왕검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린을 찔린 김태현은 폭발해버렸다.
“너 따위 놈한테 파천제왕검을 쓰는 건 사치다!”
김태현은 광분해서 강주혁에게 덤벼들었다. 강주혁은 회심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객관적인 전력이 뛰어난 상대와 싸울 때에는 반드시 아웃복서처럼 싸워야한다. 먼저 들이대는 인파이터 스타일로 싸우다가 상대의 방어를 뚫지 못할 경우, 반격 한 방에 무너져 내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던전에서 덩치가 크고 강한 몬스터를 상대할 때 회피와 반격 위주로 피해를 누적시키는 전략을 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약 김태현이 침착하게 방어를 굳히고 있었다면 강주혁은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김태현은 방어하면서 시간만 끌어도 승리할 수 있는 반면, 강주혁은 제한시간 내에 반드시 김태현을 꺾어야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도발에 넘어가서 먼저 공격해오니 강주혁으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휙!
강주혁은 김태현의 사선 베기를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서 피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공격은 피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캉!
오러가 실린 두 검이 부딪히자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졌다.
강주혁은 손목이 저릿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영약을 먹은 최석도보다 한 수 위.
“이제야 네 실력을 알겠냐?”
반면에 김태현은 강주혁과 칼을 맞댄 후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강주혁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죽어!”
신이 난 김태현은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파천제왕검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신대승은 그에게 서초패왕 김재후라는 고수를 스승으로 붙여주었다.
김태현은 김재후에게 사사받은 <지옥멸살검(地獄滅殺劍)>을 펼쳐 보이면서 강주혁을 압박해갔다. 힘과 속도에서 열세인 강주혁은 서서히 빈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걱!
마침내 김태현의 칼날이 강주혁의 팔을 베었다.
서걱! 스걱!
강주혁이 비틀거리자 김태현의 검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강주혁은 여기저기에 자상을 입고는 뒤로 물러섰다.
‘저건?’
두 사람의 싸움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이윤철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떻게...”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김태현도 공격을 잠시 멈췄다.
강주혁은 칼에 베이면서도 단 한 번도 신음을 토해내지 않았다. 더 신기한 건 난도질을 당했는데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점.
‘호신강기(護身罡氣)를 저렇게 쓴다고?’
이윤철은 머리를 한 데 맞은 것처럼 충격에 휩싸였다.
호신강기는 내공으로 만들어낸 보호막. 몬스터들이 두르고 있는 오러 스킨도 일종의 호신강기다.
김태현은 가까이에서 검을 휘두르면서도 제대로 못 봤지만 이윤철은 봤다. 강주혁이 어떤 식으로 김태현의 공격을 받아냈는지.
내공으로 호신강기를 만들어 공격을 방어하는 건 헌터라면 할 수 있는 기본기다. 대개는 적의 공격에 맞서 전신에 강기를 두른다. 그만큼 내공의 소모도 크다.
하지만 강주혁은 공격을 당하는 부분에만 강기를 두르는, 평범한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테크닉을 선보였다.
김태현의 연격(連擊)이 시작되는 순간, 강주혁은 모든 공격을 막지 못한다고 판단을 내리고 막을 것과 피할 것, 그리고 맞을 것을 구분했다. 그리고 공격이 닿기 직전 예상되는 피격지점에 소량의 내공을 투여해 반창고만한 강기를 씌운 것이다.
불과 몇 초 만에 이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실천에 옮겼다.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전부 살짝 긁힌 정도. 피부가 찢어져 피가 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내가 뭘 본 거지...’
이윤철 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다냐?”
강주혁이 멈춰선 김태현에게 갑자기 반말을 했다.
“뭐?”
“그게 다냐고?”
“이 새끼가...”
강주혁이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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