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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어쩌라고요.
19화 어쩌라고요.
“주혁아!”
부장실을 나온 강주혁이 3팀의 사무실로 돌아오자 유덕현이 그를 불렀다.
“어떻게 됐어?”
“잘 해결됐습니다. 팀장님.”
“회의실로 가자. 안 대리도. 지혜 씨, 전화 오는 거 잘 받아.”
“네. 팀장님.”
유덕현은 안다정과 강주혁만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남겨진 이지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임재경 부장의 함구령 탓에 공략 3팀의 누구도 히든 피스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이지혜도 자기만 모르는 무언가가 세 사람 사이에 화두가 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답답해하고만 있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관심을 받는 것에 익숙한 이지혜는 비참한 기분을 느꼈고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를 강주혁이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편, 회의실에서 강주혁은 임재경 부장과 나눴던 대화를 상사들에게 모두 얘기했다.
“그 히든 피스를 너만 꺼낼 수 있다고?”
“네. 팀장님. 그래서 저에게 정식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풉!”
가만히 듣고 있던 안다정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안다정이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유덕현과 강주혁은 어색해했다.
“죄송해요. 지금 상황이 너무 통쾌해서.”
“크크크. 그렇긴 하지. 나도 사무실이 떠나갈 정도로 웃고 싶다.”
“그랬다간 부장님이 더 싫어하시겠죠.”
“더 못살게 구시겠지.”
그 동안 맺힌 게 많았던 상사들은 한참을 실실거렸다. 참으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두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강주혁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부장님한테 한 방 먹인 것도 좋지만 주혁 씨가 회사에 남을 수 있다는 게 더 좋네요.”
“감사합니다. 대리님. 근데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기회를 준다면서요? 주혁 씨가 그 기회를 놓칠 만한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요.”
“물론이지. 우리 주혁이라면 어떤 시험이든 통과할 수 있지.”
“네. 팀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근데 시험을 잘 보든 못 보든 어차피 못 자르는 거 아니에요? 회사 입장에서 영약이 나오는 우물을 포기하는 건 너무 큰 손해인 것 같은데.”
“듣고 보니 그러네. 짜식, 부럽다. 나보다 네 명줄이 더 길구나.”
“죄송합니다. 팀장님.”
강주혁은 유덕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기는 뭐가 죄송해. 계획하고 찾는 것까지 전부 네가 다 했는데 당연히 네가 먹어야지. 아무리 내 코가 석자여도 그런 짓까진 하고 싶지 않다.”
강주혁은 실적을 돌려주고 오히려 홀가분해하는 유덕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인턴인 강주혁을 쫓아내고 자기가 독차지하려고 온갖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회사는 원래 그런 곳이니까.
확실히 유덕현은 회사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에는 약간 물렁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강주혁은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를 좋아했다.
“부장님께 어려운 얘기를 대신 해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다.”
임재경 부장이 공략 3팀에게 더 이상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이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으면 강주혁은 퇴사라는 초강수로 맞불을 놓을 수 있다.
“아닙니다. 팀장님. 앞으로 부당한 일이 생기면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우리 임 부장님 주혁 씨한테 완전 잡혀 살겠는데요.”
“흐흐흐, 그러게. 진짜 살다보니 이런 호사를 다 누리는구나.”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주혁 씨.”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리님.”
“다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왜요? 회식하려고요?”
“이렇게 좋은 일이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
“좋아요.”
이번에는 안다정도 흔쾌히 응했다.
* * *
그 날 저녁.
유덕현은 회식자리에서 이지혜에게 그동안 세 사람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임재경 부장이 비밀로 하라고 해서 진작 말해주지 못했다는 사과의 말도 덧붙이면서.
오해를 풀었는데도 이지혜의 표정은 개운하지 못했다.
유덕현의 통금시간 때문에 회식은 밥만 간단히 먹는 걸로 끝났다.
“어? 둘 다 그 쪽이야?”
강주혁과 이지혜가 같은 방향으로 가려고 하자 유덕현이 물었다.
“네. 팀장님. 방향이 같습니다.”
“둘이서만 2차 가는 거 아니지?”
유덕현이 장난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절대 아닙니다.”
강주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같은 방향이면 가다가 차라도 한 잔 마셔요. 얘기도 좀 하고요.”
안다정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응?”
유덕현은 묻는 얼굴로 안다정을 쳐다봤다. 안다정은 유덕현에게 답하는 대신, 강주혁과 이지혜에게 말을 이어갔다.
“경쟁은 다른 팀이랑 하는 것만으로도 족해요. 팀원끼리는 던전에서 등을 맡길 수 있어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죠?”
“네. 대리님.”
강주혁은 안다정의 눈치와 통찰력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무심한 척해도 강주혁과 이지혜의 사이가 썩 좋지 못하다는 걸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상사들과 헤어진 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침묵이 답답해진 이지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축하해요.”
“뭐가요?”
“정규직 된 거요.”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부장님이 도와준다고 하셨으니 거의 확정 아닌가요?”
“사장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을 부장님이 어떻게 합니까.”
“히든 피스가 있잖아요.”
“가치 있는 발견이기는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푼돈일 수도 있어요.”
“그래도 가능성이 커졌잖아요.”
“그건 그렇죠.”
대화가 다시 끊어졌다. 이지혜는 몇 걸음을 더 걷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강주혁은 앞으로 몇 걸음 더 내딛었다가 옆에 이지혜가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주혁 씨.”
“네.”
“남자가 뒤끝이 너무 긴 거 아니에요?”
“뒤끝이요?”
“제가 주혁 씨한테 말실수를 한 건 사실이지만 분명 사과도 했어요. 저한테 계속 이러시는 이유가 뭐에요?”
“계속 이러다니요?”
“절 노골적으로 싫어한다는 거 알아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요. 저는 지혜 씨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딱히 좋아하지도 않지만요.”
“팀장님이랑 대리님은요?”
“아주 좋아하죠.”
“그렇게 보여요. 어떤 점이 좋은 거예요?”
“좋은 분들이니까요. 배울 점도 많고.”
“저는요?”
“잘 모르겠군요.”
“어떻게 하면 주혁 씨랑 친해질 수 있을까요?”
“꼭 그럴 필요가 있나요?”
“대리님도 그러셨잖아요. 우린 한 팀이라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하죠.”
“지혜 씨는 믿고 의지할 사람이 마실 음료에 독을 타는군요.”
“무, 무슨 말이에요?”
이지혜가 화들짝 놀라면서 말을 더듬었다.
“지혜 씨가 저한테 준 커피랑 음료수 안에 마시면 안 되는 것들이 들어있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요!”
“몇 개는 버리지 않고 챙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사를 좀 해봤죠. 대학동기 중에 대기업 연구팀으로 들어간 친구가 있거든요.”
강주혁은 드라마틱하게 변해가는 이지혜의 얼굴을 보면서 기분 나쁘게 웃었다.
“내공이 단전에 쌓이는 걸 방해하는 효과가 있는 약물이더군요. 장기간 복용하면 초인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죠.”
“저,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이지혜는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턱이 덜덜 떨려왔다.
“지혜 씨가 마실 걸 나눠줄 때마다 유심히 봤습니다. 컵을 고를 때마다 항상 뜸을 들이더군요. 엉뚱한 사람한테 독약을 줄까봐 불안해서 그런 거겠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지혜 씨의 지문이 묻어있는 음료수통이 저한테 있어요. 무려 다섯 개나 있죠. 모두 잘 밀봉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놨습니다. 그걸 감사실에 가져가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면 경찰서나? 한 번 시험해볼래요?”
이지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에요.”
“어쩌라고요.”
“용서해주세요.”
이지혜는 강주혁의 손을 잡으려고 했으나 그는 거칠게 뿌리쳤다.
강주혁은 절망에 빠진 이지혜를 내려다봤다. 안타깝다는 마음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그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것도.
“제발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이지혜는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용서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이지혜는 대로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왜 저래?”
“바람 피다 걸리기라고 했나?”
“별꼴이야.”
지나가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끗거리면서 쑥덕거렸다.
“일어나요.”
이지혜는 강주혁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저 회사 쫓겨나면 죽어버릴 거예요. 사람 죽는 꼴 보고 싶어요?”
“그러세요.”
강주혁은 이지혜를 남겨놓고는 고시원을 향해 걸어갔다.
“이 악마 같은 새끼야!”
이지혜는 강주혁의 등에다 대고 저주를 퍼부었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주혁을 쫓아가서 말을 붙였다.
“주혁 씨, 잠깐만 얘기 좀 해요. 네? 제발요.”
강주혁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김태현이 시켜서 그랬어요.”
그제야 강주혁은 발걸음을 멈췄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어떻게 하면 용서해줄래요?”
강주혁은 이지혜를 노려보았다. 살기가 담긴 눈빛에 겁을 먹은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용서는 없어요. 하지만 쓸모 있게 굴면 처벌을 미룰 의향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이거에요. 첫째, 쓸데없이 친한 척 하지 마요. 나는 나한테 독약을 먹이려했던 인간이랑 상종하고 싶지 않으니까.”
“독약은 아니었어요.”
“나는 헌터에요.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던전에서 몬스터와 싸웁니다. 내공흡수를 잘 안 되게 하는 약은 극독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요.”
“...죄송해요.”
“둘째, 김태현한테 가서 내가 약을 꼬박꼬박 마시고 있다고 보고해요. 셋째, 김태현이 꾸미고 있는 일을 전부 나한테 보고해요. 하나도 빠짐없이.”
“그, 그건...”
이지혜는 눈앞이 까매지는 것을 느꼈다.
만약 자신을 배신했다는 걸 알게 되면 김태현이 무슨 짓을 할까? 그가 가진 부와 권력이라면 그녀를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주혁의 협박이 말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이 고민을 덜어주었다.
“싫으면 내일 감사실에 끌려가게 될 겁니다. 그 다음에는 높은 확률로 경찰서로 가겠죠. 콩밥을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전과자가 되는 건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선택은 지혜 씨 몫이에요.”
“...알겠어요.”
“상사들 앞에서는 적당히 친한 척 해요. 나도 어느 정도 호응은 해줄 테니까.”
“네.”
“같이 걷고 싶지 않으니까 있다가 와요. 내일 봅시다.”
강주혁은 이지혜를 남겨놓고 떠났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강주혁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 * *
“총각, 택배 왔어.”
고시원에 도착해 방으로 가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강주혁을 불러 세웠다.
“택배요?”
“집에서 보낸 것 같던데. 엄청 길쭉해.”
“주세요. 지금 가져갈게요.”
아주머니의 말대로 택배상자는 1미터가 넘는 직육면체였다.
‘검이군.’
강주혁은 택배를 챙겨서 방으로 들어갔다. 택배를 뜯어보니 롱소드가 들어있었다. 손잡이중앙에 뿔이 난 마귀의 두상이 새겨져있었다.
보낸 사람은 강수혁. 강주혁의 형이다. 강주혁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강주혁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형인 강수혁이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 형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던전에서 광부로 일했다. 고졸에 제대로 된 스펙도 없는 스무 살 청년이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었으니까.
청춘을 포기하고 매일 같이 고된 일을 하는데도 형은 집에서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소처럼 우직하게 일하면서 어머니와 동생을 돌볼 뿐이었다.
강주혁은 태원공략에서 광부로 일하기 전까지는 형이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명색이 헌터 집안인데 둘 중 하나는 가업을 이어야하지 않겠냐. 네가 나보다 나으니까 헌터는 네가 해라. 집에 한 사람쯤은 번듯한 직장에 다녀야지.’
할아버지 때부터 칼밥을 먹던 집안이다.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헌터수업을 받기도 했고. 형제는 헌터가 되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진심으로 원하기도 했다.
집안이 무너져서 학업을 이어가는 게 어렵게 되자 형은 기꺼이 자신의 미래를 포기했다. 동생이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강주혁이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이긴 했지만 천재라고 하기에는 약간 모자란 감이 있었다. 강수혁도 동생만큼은 아니어도 나쁘지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하지만 동생을 위해 그걸 갈고 닦을 기회를 포기해버렸다. 강주혁은 그런 형에게 평생 고마움과 미안함을 가지고 살았다.
강주혁은 곧장 형에게 전화를 했다.
“택배 받았냐?”
안부인사는 따위는 생략하고 용건부터 말하는 게 참으로 형답다고 생각하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게 뭐냐?”
“보면 모르냐? 아버지가 쓰던 검이잖아.”
“이거 팔았었잖아.”
선산의 던전에서 사고가 터진 후, 아버지는 피해를 입은 인근주민들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해야했다. 그래서 그동안 착실하게 모아놓은 가산을 다 써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빚까지 지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기여서 돈이 될 만한 것은 무조건 팔아야했다. 그 중에는 아버지가 쓰던 장비들도 있었다.
“석준 아저씨한테서 다시 샀다.”
김석준은 아버지의 헌터시절 동료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강 씨 집안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낡은 장비들을 모두 비싼 값에 사줬다.
“형이 무슨 돈이 있다고.”
“동생 놈이 좋은 회사 취직했는데 옷이라도 한 벌 맞춰줘야지.”
“이건 옷이 아니잖아.”
이탈리아에서 수입해온 고급원단으로 만든 경우를 제외한다면 검이 정장보다 비싸다.
“인마, 헌터라는 놈이 전용 검도 없이 다니면 폼이 안 나잖아. 석준 아저씨가 거의 거저로 주셨으니까 걱정 마라. 네 취업선물이라고 하시더라. 잔말 말고 써. 잃어버리지 말고.”
“그래. 정말 고맙다. 잘 쓸게.”
잠시 대화가 끊어지고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형은 한참을 뜸을 뜰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동안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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