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 3477635
#
14화 새로운 피가 주인이 된다.
14화 새로운 피가 주인이 된다.
“알아요. 주혁 씨 잘못이 아니란 걸.”
안다정은 목덜미를 문지르면서 난감해하는 강주혁을 보면서 작게 웃었다. 항상 당당하고 침착한 모습만 보여줬는데 처음으로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다정은 강주혁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휘청거리게만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 기술을 응용한 거죠?”
안다정은 대전차 지뢰라도 터진 것처럼 푹 파여 있는 땅을 보면서 물었다.
“네.”
강주혁은 무극의 힘을 실어 오거가 디딘 바닥 자체를 부셔버렸다.
오거의 두꺼운 피부를 뚫기에는 내공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균형을 무너뜨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바로 옆이 낭떠러지였기에 지반붕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고마워요. 주혁 씨가 아니었으면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강주혁이 때맞춰 휘청거리게 하지 않았다면 안다정은 오거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았을 것이다. A급 헌터니까 죽지는 않아도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아닙니다. 대리님.”
안다정은 강주혁이 최선의 판단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거 같은 대형몬스터와 싸우기 위에서는 탁 트인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야지만 공격을 피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비좁은 통로에서 오거와 정면으로 싸우는 건 안다정에게도 부담스러운 일. 공간이 충분하지 않으니 공격경로도 한정적이다. 실제로 단조로운 공격을 시도했다가 반격을 당할 뻔했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안다정은 오거에게 장점으로 작용한 지형을 역으로 이용해서 오거를 처리해버린 강주혁의 판단력에 혀를 내둘렀다.
실적계산에 마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마석채취는 몬스터퇴치보다 우선시될 수 없다.
강주혁은 위기 상황에서 헌터로서 가장 적절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오늘 나나 안 대리나 주혁이한테 신세만 지네.”
“아닙니다. 팀장님.”
“이 놈 이거 완전 복덩이야. 복덩이.”
유덕현이 강주혁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웃어젖혔다.
습관적으로 투구를 벗으려고 손을 올렸다가 안다정이 도끼눈을 하니까 다시 내렸다.
“마석은 제가 수거해오겠습니다.”
강주혁은 계곡 아래를 보면서 말했다. 깊기는 하지만 이럴 때 쓰라고 지원팀이 준 로프가 있다.
“됐어. 시간 없으니까 일단 히든 피스부터 찾아보자.”
유덕현이 결정을 내렸다.
공략은 공략계획수립 때 정해놓은 시간 안에 진행되어야 한다. 한 두 시간 정도 초과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
특히나 이런 곳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으면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
“신전을 뒤져보고도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저거라도 가져가자고.”
“네. 팀장님.”
“오케이. 출발.”
공략 3팀은 곧장 고블린 신전으로 진입했다.
신전은 피라미드 형태였는데 인간들이 지은 것만큼 크지는 않았다.
신전을 구성하는 돌들도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상당히 기괴해보였다.
“키익! 키익!”
고블린들은 피라미드 위에서 돌멩이를 던지면서 저항했다.
하지만 상급 헌터가 포함된 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행은 어렵지 않게 신전 바깥에 있는 고블린들을 모두 도륙했다
“이상하네.”
유덕현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안다정을 쳐다봤다. 그녀는 유덕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세요?”
“나랑 안 대리는 여기를 여러 번 공략했거든. 리스폰 주기가 빠른 곳이니까. 게다가 오랫동안 합을 맞춰오기도 했고.”
두 사람의 합동공격을 보고 있으면 확실히 잘 짠 군무(群舞)를 보는 것 같았다.
“근데 너는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껴있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강주혁이 오리발을 내밀자 안다정도 가세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우리 세 사람이 몇 년 동안 같이 공략한 줄 알았을 거예요.”
강주혁은 별 생각 없이 상사들을 돕는다는 느낌으로 싸웠다.
회귀 전 10년 간 함께 싸웠던 경험 탓에 무의식중에 상사들의 움직임에 스며들어 버린 모양이다.
“그냥 팀장님과 대리님께 뒤처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싸웠을 뿐입니다.”
유덕현은 강주혁의 변명에 어물쩍 넘어갔지만 안다정은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엄청난 고수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안다정이 강주혁이 힘을 숨긴 고수라고 확신했다.
싸울 때 자연스럽게 합을 맞추려면 팀원의 능력과 특징을 정확히 꿰고 있어야한다. 그리고 그 정보에 맞춰 자신이 싸우는 방식을 교정해야한다.
둘 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
강주혁은 아주 단 시간에 아무런 연습도 없이 그 일을 해내버렸다.
그러니 안다정이 강주혁을 엄청난 실력자로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강주혁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싸우게 되면 혼자서 따로 놀게 될 것이다.
“히든 피스는 보스 룸에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그럴 거 같습니다.”
“허접한 녀석들이긴 해도 바깥에 있는 놈들보다는 강하니까 조심하자고.”
“네. 팀장님.”
“가자.”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신전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안에는 지팡이를 든 고블린 샤먼이 홉고블린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키에! 키에!”
고블린 샤먼은 절룩거리면서 입구 쪽으로 걸어오다가 팀원을 발견하고는 고함을 질렀다.
홉고블린들이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꾸웩!”
홉고블린이 고블린보다 강하다고는 해도 그래봤자 D급이다.
A급 딜러에게는 D급이나 E급이나 별 차이가 없다. 안다정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홉고블린의 머리가 하나씩 떨어졌다.
“전방에 파이어 볼!”
유덕현이 외쳤다.
후방에 있던 고블린 샤먼이 지팡이를 위로 치켜든 채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마법진 전방에 생성된 화염구가 불티를 토해내면서 몸집을 불려갔다.
홉고블린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안다정이 활로 견제하는 건 힘들어보였다.
유덕현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서걱!
강주혁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홉고블린의 손을 잘랐다. 홉고블린이 들고 있던 단검이 손과 함께 날아올랐다.
강주혁은 단검을 공중에서 낚아챈 후 곧바로 고블린 샤먼에게 던졌다. 상사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빗맞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큭!”
단검이 샤먼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전이 중단된 파이어 볼은 작은 불씨를 흩뿌리면서 사라져버렸다.
“우오오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덕현이 샤먼을 향해 황소처럼 돌진했다.
퍽!
“꾸웩!”
유덕현의 방패에 치인 샤먼이 뒤로 멀찍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유덕현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샤먼에게 돌진했다.
“팀장님! 안 됩니다!”
강주혁이 외쳤다.
유덕현이 자동차가 급정거를 하듯 앞으로 쭉 미끄러지면서 멈춰 섰다.
“왜?”
“그 놈 죽이시면 안 됩니다!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못 도망가게만 만들어 주세요!”
“오케이!”
새파랗게 젊은 인턴이 알 수 없는 얘기를 하는데도 유덕현 팀장은 군말 없이 따랐다.
그는 기절한 샤먼의 다리를 발로 밟아서 부러뜨려놓고 부하들을 도우러갔다.
“끝났나?”
전투는 길지 않았다.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상대들이었으니까.
“다친 데는 없어?”
“저는 괜찮아요.”
안다정은 날을 확인한 후 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저도 이상 없습니다.”
“좋아. 주혁아.”
“네. 팀장님.”
“뭔가 알아낸 거야?”
“싸우다가 우연히 벽화를 봤습니다.”
유덕현과 안다정은 강주혁의 말을 듣고 신전 내부의 벽을 둘러봤다.
유인원들이 동굴에 남겨놓은 그림처럼 조잡스럽기 짝이 없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조잡함 탓에 정찰팀도 벽화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딱 하나.
읽을 수 있는 단어가 있었다.
“저거 보이십니까?”
“룬 문자잖아.”
룬은 던전에서 발견되는 문자로 한자처럼 표의문자다. 던전에서 발견되는 비급이나 마법서들은 모두 룬 문자로 이루어져있다.
언어학자들의 노력으로 꽤 많은 문자들이 해석된 상태다. 헌터들이 사용하는 전투기술과 마법의 대부분은 룬 문자로 쓰인 문서들을 해석해서 얻어낸 것이다.
“생명이란 뜻이네요.”
안다정이 말했다.
룬 문자를 공부하는 건 아카데미 필수교과 중 하나다. 하지만 암기해야할 양이 워낙 방대해서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맞습니다. 이제 글자 바로 아래에 있는 그림을 한 번 보시겠어요.”
“스켈레톤인가?”
작대기 몇 개로 엉성하게 그려놓아서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이족보행을 하는 생명체라는 건 분명했다.
“아마 고블린일 겁니다.”
“우리 딸내미가 그려도 저것보단 낫겠다.”
“다른 고블린 그림과 비교해보십시오.”
“...지팡이를 들고 있네.”
손에 세로 선이 하나 더 그어져있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 놈을 살려주자고 한 거야?”
유덕현은 기절해 있는 고블린 샤먼을 가리켰다.
“네. 죽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요. 일단 이 수수께끼부터 풀어보죠.”
“좋아.”
“벽화의 그림을 따라가 보는 겁니다.”
강주혁은 벽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그는 영감에 가득 찬 예술가처럼 보였다.
상사들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를 따라갔다.
“이건 칼인 것 같습니다.”
칼처럼 보이는 세모가 샤먼의 두 발목을 향하고 있었다. 샤먼의 발아래에는 가로선 하나가 그어져있었다.
“이 선은 저 제단을 뜻하는 게 아닐까요?”
강주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신전의 한복판이었다.
“제단?”
“정중앙에 보시면 다른 타일보다 10센티미터 정도 올라와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싸우다가 발이 걸리더군요.”
유덕현과 안다정은 강주혁이 가리키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게 제단이라고? 그냥 공사 잘못한 것 같은데?”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신전의 정중앙에 있으니 뭔가 다른 용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흠...듣고 보니 그러네.”
중앙이라는 위치는 언제나 상징성을 띠기 마련이다.
“일단, 저 벽화가 시키는 대로 한 번 해볼까요?”
“어, 그래.”
유덕현은 반신반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혁은 기절한 고블린 샤먼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몸에서 무기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 중에는 강주혁이 찾던 물건도 있었다.
고블린의 물건치고는 꽤나 고급스러운 단검. 딱 봐도 전투용이 아니라 의식용이다. 칼을 그려놓은 그림처럼 손잡이 부분에 동그란 구슬이 박혀있었다.
단검을 따로 챙긴 강주혁은 지원팀에게 받아온 다용도 로프를 이용해서 샤먼의 손과 발을 묶었다.
안다정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수갑처럼 튼튼한 매듭을 만들어내는 강주혁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강주혁은 마지막으로 샤먼의 옷을 뜯어내 돌돌 만 후 입에 쑤셔놓았다.
“읍, 끄윽...”
그 때쯤 샤먼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손발이 묶이고 입이 막혀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강주혁은 샤먼을 끌고 가서 단 위에 주저앉힌 후 단검으로 발목을 그었다.
“끕! 끕!”
샤먼은 입이 막혀있어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발목에서 흐른 피가 제단 위에 떨어졌다.
“팀장님, 대리님. 이것 좀 보시죠.”
유덕현과 안다정이 강주혁에게로 다가왔다.
“스며드네?”
샤먼의 발목에서 흘러내린 피는 옆으로 흘러내리는 게 아니라 제단에 곧장 스며들었다. 돌바닥이 스펀지처럼 피를 빨아들인 것이다.
쿵!
그 때,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철컥! 드르륵.
정체불명의 소음과 함께 제단이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오!”
유덕현은 탄성을 토해냈다.
아직 뭔가 나온 건 아니지만 정찰팀도 몰랐던 무언가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견이다. 실적에 대한 기대로 흥분한 유덕현은 강주혁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해냈구나!”
“팀장님! 좀 가만히 있으세요. 아직 끝난 거 아니잖아요.”
“어, 그래. 그렇지. 허허.”
강주혁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지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벽화를 유심히 살펴봤다.
“다음은 손목이군요.”
강주혁이 단검으로 샤먼의 두 손목을 그어 제단을 적셨다.
드르륵.
피를 머금은 제단은 옆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걱.
마지막으로 샤먼의 목을 그은 후 제단 위에 누였다.
화르르.
제단에서 푸른 불꽃이 치솟더니 샤먼을 집어삼켰다. 샤먼은 몸을 버둥거리면서 발악했으나 잠시뿐이었다. 강주혁이 뒤로 물러나 소각이 다 끝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뭐야, 끝이야?”
강주혁은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걸 찾아냈다.
“저거 좀 보십쇼.”
벽에 좀 전에는 보이지 않던 룬 문자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글자가 네 개.
“뭐야? 무슨 뜻이야?”
룬 문자에 대한 지식이 짧은 유덕현은 답답해했다. 안다정은 뜻을 알고 있었으나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예상대로 강주혁이 해석을 했다.
“새로운, 피, 되다, 주인. 새로운 피가 주인이 된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피?”
강주혁은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갑자기 자해를 하는 강주혁을 본 안다정이 화들짝 놀랬다.
“주인이 되려면 피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강주혁의 피가 제단 위에 떨어졌다.
덜컥!
갑자기 디디고 있던 바닥이 꺼지면서 강주혁은 아래로 추락했다.
“주혁 씨!”
안다정의 비명이 빠르게 멀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