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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11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월요일 아침.
강주혁 다음으로 출근한 사람은 안다정이었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주말은 잘 보내셨습니까?”
안다정 대리는 인사를 하려다가 발걸음을 딱 멈췄다.
“얼굴은 왜 그래요?”
강주혁의 얼굴 여기저기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입술 언저리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고.
“일이 좀 있었습니다.”
<서울 5절>의 일원이자 한국 최고의 권사에게 가르침을 빙자한 구타를 당했다고 하면 믿어주려나.
“싸웠어요?”
“...네.”
안다정이 미간을 좁혔다.
혈기왕성한 젊은 헌터들이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 치고받는 건 흔한 일. 지난주에도 최석도와의 대련으로 주가를 올린 강주혁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음 날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되는 것.
“죄송합니다.”
강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사냥은 몸을 쓰는 일이다. 그리고 사냥터에서는 팀워크가 중요하다. 회사 밖에서 부상을 입거나 컨디션이 떨어져서 오면 자신뿐만이 아니라 동료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서 헌터에게는 운동선수 이상의 자기관리가 요구된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요. 공략에 지장을 주는 건 아니니까.”
강주혁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자 안다정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다른 분들이 보면 트집 잡을 수 있으니까 다음부터는 물약 꼭 써요. 힐러가 있는 곳에서 싸우든가.”
“네. 대리님. 명심하겠습니다.”
강주혁은 원래 종로투왕에게 가르침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자주 만나서 친분을 쌓다가 때가 되면 정치적인 힘을 빌릴 생각이었지.
하지만 돈가스 김밥에 눈이 먼 권대호가 가르침을 주겠다고 바득바득 우겼고 그 결과가 지금의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명성이 자자한 <귀멸풍신권(鬼滅風神拳)>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저 강주혁의 동작을 보면서 훈수를 뒀고 빈틈을 보이면 꿀밤을 날리는 게 전부였다.
권대호는 검이 없는데도 강주혁이 검사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고 권법을 가르치기보다는 싸움의 기본기를 다져주는 데에 집중했다.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기대이상으로 좋았다. 권사가 아닌 게 후회될 정도로.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권대호는 강주혁에게 검을 가르쳐준 아버지보다 몇 배나 뛰어난 스승이었다.
20년 경력의 강주혁조차도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헌터에게는 코흘리개나 마찬가지. 오히려 그 경력 덕분에 권대호가 건성으로 툭툭 내뱉는 말들 속에 얼마나 유익한 가르침이 들어있는지 캐치할 수 있었다.
결국, 강주혁도 권대호의 가르침이 유용하다는 걸 인정했다. 권대호는 다음 주 주말에도 청계산을 찾아오라고 말했다. 빈손으로 오면 죽이겠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치유 물약이 필요한데...’
두들겨 맞는 거야 상관없지만 이런 몰골로 출근하면 상사들이 눈치를 준다. 그걸 상황을 피하려면 치유 물약이 일주일에 최소 한 병은 있어야한다.
한 달에 최소 20에서 최대 40만 원이 더 필요한데 인턴 월급으로는 생활비도 빠듯하다. 광부 일을 하면서 모아놓은 돈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어야한다.
앞으로 돈이 나올 구멍들은 잘 알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 나올 곳은 없다.
‘좀 더 빨리 움직이는 수밖에.’
강주혁은 인턴 신분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
다음 출근자는 유덕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주말은 잘 보냈...얼굴은 왜 그러냐?”
“싸웠습니다.”
“누구하고요?”
“서울 5절 중 한 사람하고요.”
“오! 그럼 우리 회장님이랑 동급이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으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안 죽고 출근한 게 어디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꼭 이겨요.”
“네. 팀장님.”
강주혁과 킬킬거리는 유덕현에게 안다정이 눈총을 쐈다. 유덕현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냉큼 자기자리로 갔다.
“안녕하세요.”
마지막으로 이지혜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웬일로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다.
“오는 길에 커피 좀 사왔어요. 향이 좋더라고요.”
“오, 땡큐.”
“고마워요.”
강주혁은 상사들에게 커피를 권하는 이지혜를 보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커피를 꺼낼 때마다 손이 잠시 머뭇거리는 걸 눈여겨봤다.
“주혁 씨, 얼굴은 왜 그래요? 누구랑 싸웠어요?”
“일이 좀 있었습니다.”
“괜찮아요?”
“네.”
“커피 마셔요.”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한 잔 마셔서.”
“주혁 씨 거까지 딱 맞춰서 샀는데...”
이지혜는 캐리어에 남아있는 두 잔의 커피를 보면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좀 있다가 마실게요.”
“히히. 잘 생각했어요.”
“감사합니다.”
분명 이맘때쯤이었다. 아무리 훈련을 해도, 몬스터를 잡아도 내공이 쌓이지 않던 시기가.
그냥 슬럼프가 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 지금,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특히, 이맘때쯤 부쩍 마실 걸 많이 줬던 이지혜가.
강주혁은 이지혜가 화장실에 간 틈을 이용해 커피를 자신의 텀블러에 옮겨 담았다.
“주혁 씨, 지혜 씨.”
이지혜가 돌아오자 안다정이 두 사람을 불렀다.
“학교에서 <표준공략절차> 배웠죠?”
“네. 대리님.”
“지혜 씨가 한 번 읊어 봐요.”
안다정의 갑작스러운 시험에 이지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우선, 정찰팀이 가장 먼저 던전에 투입됩니다.”
“정찰팀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죠?”
“정찰능력에 특화된 헌터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특별한 지각능력을 갖춘 헌터들입니다.”
“주혁 씨가 한 번 대답해 봐요.”
“정찰팀 헌터가 되기 위해서는 민첩성 테스트에서 B랭크 이상을 받아야합니다. 그리고 팀에는 반드시 지도제작자와 함정전문가가 포함되어야합니다. 전투가 권장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높은 전투력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들었죠?”
“...네.”
“정찰팀이 정찰을 한 후에는 뭘 하죠?”
“공략팀이 공략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채광팀이 마석을 채취합니다.”
“끝이에요?”
“...네.”
“주혁 씨가 보충해 봐요.”
“정찰팀이 정찰보고서를 제출하면 그 자료를 바탕으로 공략팀이 공략계획서를 작성합니다. 계획서가 결재라인을 통과해서 결재가 떨어지면 공략에 들어갑니다. 공략 후에는 정찰팀이 다시 한 번 투입됩니다. 위험요소와 히든피스를 찾기 위해서죠. 위험요소가 발견되면 공략팀이 다시 한 번 투입됩니다. 위험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것이 확인될 때까지 이 과정이 되풀이됩니다. 그 후에 채광팀이 투입됩니다. 표준공략절차는 리스폰 데이가 지날 때마다 다시 적용됩니다.”
“지혜 씨.”
“네.”
“정찰팀은 한 번이 아니라 최소 두 번 들어가요. 이건 상식이에요.”
모닝커피로 약칠(?)을 해놓은 덕인지 상소리를 하지는 않았으나 얼음장처럼 싸늘한 표정을 보면 언짢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지혜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분명, 신입생 때 개론수업에서 들은 내용이다. 성적도 A플러스.
하지만 그 후 마법관련 전공지식만 공부하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다. 마법사는 어딜 가나 왕족대우를 받으니 그런 하찮은 지식은 몰라도 된다는 분위기도 있었고.
“오늘 우리가 할 일은 공략계획서를 작성하는 거예요. 써 본 적 있어요?”
“네. 대리님.”
“학교에서 써봤습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 거예요. 인트라넷에 들어가면 정찰팀이 업데이트 해놓은 자료들 있어요.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어느 지역을 어떤 식으로 공략할지 계획해 봐요. 팀장회의에서 이미 우리가 맡아야할 지역들이 정해졌어요. 두 사람 아이디로 로그인하면 지도에 따로 표시가 될 거예요. 그 지역들 중 하나를 고르면 돼요.”
“네. 대리님.”
“계획서 샘플 메일로 보여줄 테니까 참고해서 써요. 점심시간 끝나고 곧바로 회의할 거니까 그 때까지 완성해요.”
“네. 알겠습니다.”
“얘기 다했어요. 가서 일 봐요.”
이제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
강주혁은 인트라넷에 들어가서 정찰팀이 올려놓은 자료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자료들을 대충 훑어본 후 보고서를 쓰는 대신 해외포탈로 해외신문들을 검색했다.
“주혁 씨는 어디로 할 거예요?”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있던 이지혜는 강주혁에게 말을 붙였다.
“98-A113이요.”
“거기는 뭐가 있는데요?”
“고블린이요.”
“고작 고블린? 그거 가지고 실적이 나오겠어요?”
“어차피 언젠가 우리 팀이 공략해야 하는 곳이잖아요.”
이지혜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자기 이름으로 올리는 첫 계획서인데 이왕이면 실적을 팍팍 올릴 수 있는 지역을 택하고 싶을 것이다.
강주혁도 실적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팀의 업무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스케일만 키운 계획서는 퇴짜를 맞을 확률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강주혁은 12시까지 계획서를 완성한 후 점심을 먹었다. 이지혜는 식사도 거르고 계획서 작성에 몰두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회의시간.
“누구부터 해볼래?”
유덕현은 노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점심을 먹고 식곤증이 몰려올 때여서 다들 좀 몽롱한 상태였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이지혜가 자신 있게 외쳤다.
“오케이. 한 번 해봐.”
다들 준비해온 발표 자료로 눈을 돌렸다. A4용지 5페이지에 달하는 계획서. 이지혜는 낭랑한 목소리로 부연설명까지 곁들어가면서 발표에 열을 올렸다.
그녀가 고른 지역은 07-A72로 맹독구울과 역병좀비, 그리고 지옥벌레가 출몰하는 협곡지대였다.
“이 지역의 특징은...”
처음에는 유덕현도 안다정도 경청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다들 눈에 띄게 피곤해했다.
안다정은 속으로 하품을 했는지 눈에 눈물이 맺혔고 유덕현은 꾸벅꾸벅 졸다가 안다정의 핀잔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지혜 씨, 잠깐.”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안다정이 이지혜의 말를 잘랐다.
“네. 대리님.”
“그거 다 읽을 거예요?”
“네? 아...”
“요점이 뭐에요?”
“요점이요? 다 중요한데...”
“여긴 2007년에 처음 발견된 지역이에요. 리스폰 주기는 한 달이고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팀들이 이 지역을 공략했겠어요. 그 중에 지혜 씨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 같아요?”
이지혜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지역 공략의 가장 큰 난관이 뭐라고 생각해요?”
“매복입니다.”
“맞아요. 그럼 지혜 씨 공략 방법의 문제점이 뭔지도 알겠죠?”
이지혜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미친 듯이 눈알을 굴려댔으나 정답을 찾지는 못한 것 같았다.
“주혁 씨 생각은 어때요?”
“진입 전에 매복지점을 화염마법으로 소각해서 안전을 도모한다는 공략 방법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뭐가 문제죠?”
“보급입니다. 매복지점이 산발적으로 흩어져있기 때문에 소각에 많은 시간과 마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습도가 높고 강우확률도 높습니다. 화염마법의 효율과 성공가능성도 그만큼 떨어지겠죠. 마나소모를 감당하려면 마나 물약이 추가로 필요한데, 그렇게 되면 마석을 아무리 많이 수거해도 보급품 점수에서 감점을 받아서 실적 점수가 낮아집니다.”
강주혁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그를 바라보는 유덕현과 안다정의 눈이 더 커졌다. 반면에 이지혜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게다가 이 지역의 몬스터들은 각종 상태이상을 야기합니다. 항생제와 해독제를 반출하면 그만큼 실적 점수가 더 깎이겠죠.”
“그럼 주혁 씨는 어떻게 공략할 거예요?”
“현재 인원으로 07-A72를 공략하는 건 지나치게 비효율적입니다. 정상적인 공략을 위해서는 힐러가 필요합니다.”
“팀장님 들으셨죠? 힐러가 필요하대요.”
안다정의 타깃이 유덕현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회의실 바닥이 꺼질 정도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지혜가 고른 07-A72는 다른 팀들도 꺼려하는 지역이다. 배보다 배꼽이 큰 지역이니까.
그냥 방치하면 다른 지역으로 몬스터들이 넘어오기 때문에 누군가는 반드시 정리를 해줘야한다.
힐러도 없는 공략 3팀에게 이 지역이 할당된 것은 팀장인 유덕현이 사내정치를 안 하기 때문이다.
“인사팀에서 힐러 보내줄 때까지 미루자.”
안다정은 쌍심지를 킨 채 유덕현을 노려보았다.
“공략마감일까지 안 보내주면요?”
“뭐 어떻게 해. 전에도 그랬듯이 우리끼리 약 먹어가면서 정리해야지. 주혁아.”
유덕현은 안다정이 더 따지고 들기 전에 냉큼 화제를 바꿨다.
“네. 팀장님.”
유덕현은 강주혁이 준비한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한 페이지.
“98-A113이라...고블린 신전 있는 곳이지?”
“네. 맞습니다.”
“여긴 좀 심심한 곳인데? 명색이 하이오크 슬레이어인데 너무 소심한 거 아니야.”
대개 신입들에게 공략계획서를 써오라고 하면 이지혜처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마왕성 공략계획처럼 거창한 걸 써온다.
하지만 강주혁은 하급 몬스터의 대명사인 고블린만 있는 지역을 택했다.
“이 계획서가 채택될 경우, 결재라인을 통과하는데 일주일 정도가 소요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대개 그렇지.”
“일주일 후에는 신입사원 교육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는 못 들었는데요?”
강주혁의 말에 이지혜가 화들짝 놀랐다.
“맞다. 그게 있었지. 다음 주가 맞아. 아마 오늘 오후나 내일쯤 공지 올라올 거야. 근데 주혁이 너는 누구한테 들었냐?”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직원 분들이 하시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인사팀 분들인 것 같았습니다.”
“일주일 후에 지혜 씨가 빠지니까 무난하게 간다?”
“네. 그래서 3인 팀만으로도 무난하게 공략할 수 있는 곳을 골랐습니다.”
“일리는 있네. 근데 사실, 여기는 안 대리 혼자서도 공략이 가능한 곳이야.”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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