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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저는 어르신께 바라는 게 없습니다.
10화 저는 어르신께 바라는 게 없습니다.
절벽 위에 선 노인은 마치 하늘을 짊어지고 있는 거인처럼 보였다.
“누구세요?”
강주혁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자네 헌터인가?”
“네.”
“근데 나를 몰라?”
“모릅니다.”
강주혁은 노인을 잘 알고 있었다. 청계산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건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걸 알면 언짢아할 수 있으니 일단은 모른 척을 했다.
“헌터라는 놈이 대선배도 못 알아봐.”
“어르신.”
“선배님이라고 불러라.”
“아, 네. 선배님.”
“그래.”
“등산 중이신 것 같은데 갈 길 가시죠.”
노인은 등산복이 아니라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헤어스타일도 산신령. 오른손에 금도끼를, 왼손에 은도끼를 들고 있으면 더 그럴 듯해 보일 것 같다.
“네 놈이 주먹 휘두르는 꼬락서니를 보니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져서 발걸음까지 무거워지는구나.”
“제 주먹이 어떤데요?”
“그걸 꼭 가르쳐줘야 알겠느냐?”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럭저럭 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쯧쯧쯧.”
노인은 혀를 차더니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탓!
노인은 마치 나뭇잎이 내려앉은 것처럼 사뿐히 지상에 착지했다. 거의 이십 미터 정도 되는 높이에서 뛰어내렸는데도 무릎조차 굽히지 않았다.
“주먹이란 말이다.”
노인은 몸을 돌리지도 않고 절벽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딱!
“이런 것이다.”
주먹이 절벽에 닿자마자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쩌적!
주먹을 꽂은 지점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금이 생겨났다. 그렇게 쪼개졌는데도 절벽에서 부스러기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는 강주혁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제가 영감님 나이가 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뭐라!”
“아, 소리 좀 지르지 마세요. 귀청 떨어지겠습니다.”
“이, 이놈아. 헌터란 놈이 이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안 들어?”
“잘 치시네요. 앞으로도 영감님 주먹 생각하면서 열심히 할 테니 그만 갈 길 가세요. 저 바쁩니다.”
“네 이놈, <서울 5절>이라고 들어봤느냐?”
서울 5절은 서울에서 가장 강한 다섯 명의 헌터를 지칭하는 말이다. 태원공략의 회장인 강남검제 신태원이 서울 5절의 수좌(首座).
“들어는 봤죠. 우리 할아버지 코딱지 파던 시절 헌터들 아닙니까.”
“허, 이놈이...그럼 <전국 10대 고수>는?”
서울 5절에다가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대표하는 5인의 헌터를 추가한 것이 전국 10대 고수다.
10대 고수 중에서도 지존은 강남검제다.
“언제 적 전국 10대 고수입니까. 요즘 그런 거 얘기하고 다니면 꼰대 소리 듣습니다.”
“뭐? 꼰대?”
노인의 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놀리는 건 이 정도로 해야 하나.’
전생에 시달린 게 생각나서 골려주기는 했으나 선을 넘을 생각은 없었다. 이 영감은 새끼발가락만으로 강주혁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니까.
노인의 이름은 권대호. 별호는 종로투왕(鐘路鬪王).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권사(拳士)다.
강남검제 신태원 회장의 의동생으로 서울 5절과 전국 10대 고수 중에서도 2인자다. 신태원과 함께 태원공략을 세웠고 수십 년간 부회장으로 있었다.
하지만 강주혁이 모르는 어떤 이유로 인해 신태원과 관계가 틀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신태원이 권대호에게 큰 잘못을 했고 신태원이 거듭 용서를 구했으나 권대호가 받아주지 않는 상황.
회귀 전 회사에서 두각을 드러낸 강주혁은 신태원 회장의 눈에 들었고 그의 개인적인 심부름으로 권대호를 여러 차례 찾았었다.
회장님이 시켜서 왔다는 말 한마디에 온갖 쌍욕을 퍼붓고 꼬장을 부려서 고생만 진탕 하고 돌아왔지만 자꾸 만나다 보니 미운 정이 들기는 했다.
“아, 영감님이 꼰대라는 게 아니라 그런 얘기를 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다고요.”
“하여간 요즘 것들은...”
권대호는 빈정이 상했는지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강주혁은 웃음을 지었다.
속세와 연을 끊은 은자를 자청하지만 권대호에겐 관심종자 같은 면이 있다.
은거하는 산이 설악산이나 지리산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20분 만에 강남에 갈 수 있는 청계산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살펴 가세요.”
강주혁은 권대호가 떠나는 걸 확인한 후 자리에 앉아 준비해온 김밥을 꺼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해도 될 것 같았다. 자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테니까.
강주혁은 김밥을 맛있게 먹었다.
딱히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지만 운동을 하고 먹으니 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딱!
그렇게 한창 식사 중인데 갑자기 누가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눈알이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아팠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 틈엔가 등 뒤로 다가온 권대호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왜 때려요?”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어른이 계시는데 맛있는 게 있으면 ‘한 번 잡숴 보십시오.’하면서 먼저 권해야할 거 아니야!”
“아, 가신 줄 알았죠.”
“이거 가만 보니까 지 혼자서 처먹으려고 자꾸 나를 보내려고 한 거구만.”
“생판 모르는 남인데 피 같은 김밥을 나눠먹어야 합니까.”
“젊은 놈이 욕심은 왜 그렇게 많아.”
“젊으니까 많죠.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합니다.”
“이 놈아, 너도 잘 먹어서 잘 클 나이는 지났어.”
종로투왕이 김밥을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다. 강주혁은 잽싸게 몸을 틀면서 팔을 뻗어 김밥을 지켜냈다.
“어쭈.”
“깡패도 아니고 남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뺏으려고 하십니다. 체통 좀 지키시죠.”
“크흠...”
체통이라는 말에 권대호는 침음을 흘리며 손을 거두었다.
강주혁은 김밥의 일부를 내밀었다.
“이거 말고 저거.”
“...”
권대호는 다른 김밥을 가리켰다.
강주혁이 권한 건 참치김밥, 권대호가 가리킨 건 돈가스김밥.
강주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주인도 아껴서 먹는 걸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좋은 건 어른에게 양보하는 법이다.”
“가난한 청년이 큰마음 먹고 산 돈가스김밥입니다.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양보하겠느냐?”
권대호는 지금의 태원공략을 있게 한 원로급 헌터들의 정신적 지주다.
중립을 고수하는 네 번째 파벌의 실질적인 수장이며 가지고 있는 회사 지분도 신태원 회장 다음으로 많다.
만약 권대호가 신대길에게 힘을 보태준다면 왕위계승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행히 권대호는 신태원의 세 아들 중 신대길을 가장 좋아한다. 신대길의 친우이자 태원공략의 사장인 이윤철에게 용산철검이란 별호를 지어준 사람도 종로투왕이다.
“저는 어르신께 바라는 게 없습니다.”
강주혁이 이 괴짜 영감의 고약하고 변덕스러운 심보를 잘 알고 있었다. 해달라고 하면 안 해주고 필요 없다고 하면 해주려고 한다.
이 점을 잘 이용해야한다.
“한 수 가르쳐주마.”
“뭘요?”
“주먹 쓰는 법을.”
* * *
태원전자 사장실.
신대승 사장이 아들의 얼굴을 손바닥을 후려쳤다.
짝!
“윽!”
옆으로 튕겨져 나간 김태현은 벽에 처박혔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입안이 터져서 피가 쏟아졌다. 골이 울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공을 실진 않았다고는 해도 S급 초인이 휘두른 손바닥이다. 이 정도로 끝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한심한 새끼...”
신대승은 아들을 보면서 으르렁거렸다.
“일어나. 어서.”
김태현은 안간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통과 공포로 인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런 하찮은 일 하나 똑바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앞으로 뭘 할 수 있겠냐.”
“...죄송합니다.”
“내가 너한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시킨 거냐?”
“아닙니다.”
“사장 놈 망신 한 번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아닙니다.”
“근데 왜 망신을 주지는 못할망정 망신을 당하고 와!”
“죄송합니다.”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이윤철 사장이 처음으로 틈을 보였다. 아주 작은 틈이지만 쑤셔보면 커질 수도 있는 틈이다.
때마침 태원공략에 들어간 아들에게 일처리를 맡겼더니 웃음거리가 되어 돌아왔다. 망신을 당한 건 최석도지만 김태현이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이유가 뭐야?”
“그 놈이...너무 강했습니다.”
“강해? 고작 하이오크 한 마리 잡았다고 강함을 논해!”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다시 노기를 드러내자 김태현은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신 씨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그 나이 때 그 이상을 보여줬다.”
아버지의 말이 비수가 되어 아들의 마음에 꽂혔다. 마음이 흘린 피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김태현은 아직 신태현이 아니다. 아버지의 기대가 사라지는 순간 ‘아직’은 ‘영원히’가 될 것이다.
“다시 묻겠다. 이유가 뭐냐?”
신대승의 서슬 퍼런 시선이 계속해서 김태현을 찍어 눌렀다. 김태현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변명거리를 찾아야만 했다.
“영약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제조법에 따라서 재료를 적절히 배합하기만 하면 만들 수 있는 치유 물약과는 달리 영약은 각성한 초인만 만들 수 있다.
만들 때마다 특수한 방식으로 마력을 부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초인은 흔하지 않다.
만드는 사람은 적은데 찾는 사람이 많다 보니 평범한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만큼 가격이 비싸다.
영약에 대한 정보도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 서민들이 외제 스포츠카 가격이 얼마인지 잘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돈이 좀 있는 놈이냐?”
“그런 건 아니고 헌터집안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헌터들 중에 강 씨는 없다. 보나 마나 고만고만한 떨거지겠지. 그런 놈 잡아보겠다고 이 백 만원이 넘는 영약을 써?”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려다가...”
“그 최석도란 녀석이 너보다 강해?”
“아닙니다.”
“확실하게 처리할 거면 네가 나섰어야지.”
“죄송합니다.”
“왜 직접 나서지 않았냐?”
김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말해.”
“최석도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짝!
신대승은 또 한 번 따귀를 올려붙였다. 김태현의 눈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김태현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아프다고 엎어져 있다가는 정말로 죽을 지도 모른다.
“...살려주세요. 아버지.”
김태현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기어가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니 죄송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서워서 그랬어요. 지는 게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제가 지는 건 괜찮지만 아버지까지 욕보이게 될까봐 그랬어요.”
김태현은 울먹이면서 말했다.
만약 강주혁에게 패배하게 되면 영영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럼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백 실장!”
비서실장 백규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 사장님.”
“물약 하나 가져와.”
“여기 있습니다.”
비서실장은 이미 손에 치유 물약을 들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으니까.
“일어나.”
김태현이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신대승은 손수 물약을 발라주었다.
터져버린 핏줄이 빠르게 아물고 얼굴에서 붓기가 빠졌다. 물약은 상처를 지워줬지만 눈물자국까지 지워주진 못했다.
“그냥 인턴이라면 너랑 급이 안 맞는 게 맞다. 하지만 싹수를 보였다면 얘기가 다르지. 들어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직원들이 전부 인턴 얘기만 한다. 그 놈이 그러다가 회장님 눈에라도 들어봐라. 그럼 이윤철 사장의 자리만 더 공고해지는 거야.”
“죄송합니다.”
“내가 말했지. 태원공략을 먹는 놈이 그룹 전체를 먹게 되는 거라고.”
“네. 아버지.”
“사냥꾼을 빛내는 건 결국 사냥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꼭 이기겠습니다.”
“이기지 못하면 넌 내 아들이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가 봐.”
김태현은 인사를 꾸벅 하더니 도망치듯이 사장실을 벗어났다. 김태현이 나간 후 신대승은 백규진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백규진은 신대승이 무엇을 묻는지 정확하게 캐치했다.
“다른 수단을 쓰지 않는 이상 이기기 힘들 겁니다.”
백규진의 직함은 태원전자 비서실장이나 원래는 태원공략 출신의 헌터였다.
신대승 역시 지금은 CEO로 태원전자를 이끌고 있으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태원공략에서 헌터로 일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지금도 그룹의 심장부인 태원공략에 머물고 있었다.
“그 정도야?”
“보통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그런 놈이 공채에서 떨어져? 작년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거 맞지?”
“맞습니다.”
“인사팀 새끼들은 도대체 뭐하는 거야? 그런 놈이 있으면 제 때 뽑아서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거 아니야.”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인사팀의 곽진섭 부장은 신대승을 라인이었다.
“죄송합니다. 곽 부장에게 단단히 일러놓겠습니다.”
“됐어. 내가 김재후한테 직접 얘기하지.”
신대승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만졌다. 백규진이 신대승의 왼팔이라면, 태원공략의 부사장 김재후는 오른팔이었다.
“저, 사장님.”
“왜?”
“실은 태현 군이 강주혁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
“네. 사장님께서 명하셔서 일단 망신을 주려고 했으나 내심 탐을 냈던 것 같습니다.”
신대승은 짜증이 조금 가시는 걸 느꼈다. 벌써부터 사람 욕심을 낸다는 건 그만큼 포부와 야심이 있다는 거니까.
아들이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 생각하는 좀생이가 아닌 건 마음에 들었다.
“백 실장.”
“네. 사장님.”
“이윤철이가 언제 나한테 고개를 숙인 적 있나?”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이윤철이 태원공략의 사장인 이유는 동년배의 헌터들 중에서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신대승은 이윤철을 꺾지 못했고 헌터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
“칼밥 먹는 헌터들이 다 그렇지. 자존심 빼면 시체야. 그 강주혁이란 놈이 자기가 주인보다 강하다는 걸 알면 태현이 말을 고분고분 따르겠냐.”
“태현 군이 강주혁을 꺾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태현 군에게 큰 힘이 될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근데 이윤철이 내민 줄을 타고 들어온 놈이 편을 바꿀까.”
“인턴으로 뽑아주기만 했지만 정규직으로 만든 건 아니니 아직 여지가 있을 겁니다.”
“정규직으로 만드는 데에는 인사팀의 입김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태현이 녀석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결정하지. 그 놈을 거둘지 아니면 죽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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