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 3464077
#
6화 한 번 확인해보시죠
6화 한 번 확인해보시죠
부사장 김재후가 눈을 치켜떴다.
“그 친구가 E급이었던가?”
이윤철 사장이 비서에게 물었다.
“서류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공식보고서가 올라오면 알려주게.”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이윤철이 김재후에게 돌아왔다. 김재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별일이 다 있군요. 대리급도 잡기 힘든 몬스터를 인턴이 다 잡고. 이 정도면 공채로 뽑은 친구들보다 나은 것 같은데요.”
이윤철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분명 실적을 몰아줬을 겁니다.”
“1부 3팀에는 안다정 대리가 있습니다.”
안다정의 출중한 실력뿐만이 아니라 대쪽 같은 성격으로도 회사에서 유명했다.
“공략보고서를 조작했다고 자기 상관을 날린 사람입니다. 고작 인턴을 위해 없던 얘기를 지어냈겠습니까.”
“그 인턴을 누가 뽑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재미있군요. 몇 년 동안 독불장군처럼 굴던 직원이 갑자기 사장한테 잘 보이려고 한다고 하니.”
김재후는 말문이 막혀서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인턴을 굳이 안 대리가 있는 팀으로 보낸 건 부사장님이 아니었습니까?”
“...곽진섭 부장이 내린 결정입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윤철은 씩 웃었고 김재후는 체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턴을 뽑은 건 사장이지만 어디에 배치할 지를 결정한 건 인사팀이었다.
안다정 대리는 좋은 부하도 아니지만 좋은 상사도 아니다. 본인의 높은 스탠더드를 따라가지 못하면 가차 없이 깎아내리니까. 그녀 밑에 있다가 회사를 떠나거나 부서이동을 요청한 직원이 꽤 된다.
인사팀은 다분히 고의적으로 인턴을 1부 3팀으로 보낸 것이다.
“그렇군요. 어쨌든 잘 적응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좀 더 지켜보도록 합시다. 아직 3개월이나 남았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인턴을 뽑은 일로 따지려고 온 김재후는 도망치듯이 사장실을 벗어났다.
혼자 남겨진 이윤철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인턴이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고 있지만 지금 상황이 영 달갑지 않았다.
‘인턴한테 사장 목숨이 달린 꼴인가.’
* * *
지원팀 사무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장비 반납하러 왔습니다.”
“어. 일찍 왔네. 공략은 잘 했어요?”
“네. 덕분에 무사히 마쳤습니다.”
강주혁은 사용한 장비를 손강우 대리에게 반납했다.
‘깨끗하군.’
예상대로였다.
일정이 아무리 빠듯해도 준비가 안 된 인턴을 첫 날부터 전투에 투입하는 것은 무리다. 던전에 데리고 들어가더라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구경이나 하게 했을 것이다.
“보급품 여기에 있습니다.”
“어? 거의 안 썼네?”
반출했던 보급품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전투식량 빼고는 손도 안 된 것이다.
“유덕현 팀장님과 안다정 대리가 너무 잘 싸우셔서 쓸 일이 없었습니다.”
“의외네? 3팀은 원래 좀 많이 썼었는데. 신입이 잘 했나봐?”
“네. 이지혜 사원도 열심히 싸웠습니다.”
“간만에 가산점 좀 받겠는걸.”
“가산점이요?”
“아, 주혁 씨는 모르겠구나. 공략팀 실적을 계산할 때, 보급품을 얼마나 썼는지에 따라서 가산점이나 벌점이 붙거든. 이런 건 다른 곳에서도 비슷하니 알아두면 좋아.”
“감사합니다. 대리님.”
사실, 강주혁도 잘 아는 내용이다.
생명력 물약의 원가는 1ml 당 250원. 가장 작은 사이즈인 200ml가 5만원이다. 잘려나간 팔도 몇 초 만에 재생시켜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비싼 건 아니다.
그래도 마구잡이로 써대면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감당이 안 된다. 실제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실력도 안 되면서 상위 몬스터에게 도전해 물약 수백 만원치를 쓴 헌터들도 있었다.
그래서 공략지역과 팀에 따라 보급품의 양을 제한해놓고 추가로 요청하면 실적에 벌점을, 남겨오면 가산점을 부여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던전에서 써놓고 다른 곳에서 가져온 걸로 채워놓은 건 아니지?”
뒷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는 배재훈 과장이 고개를 들지도 않고 물었다.
실적을 위해서 보급품을 사용한 만큼 자비로 구매해 제출하는 헌터들도 많다.
회사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었기에 딱히 제재를 가하진 않는다. 그러나 모자란 실력을 돈으로 때우는 셈이기에 동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한다.
“제가 보급품을 담당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 일 봤으면 가봐.”
“네. 팀장님. 가보겠습니다.”
강주혁은 손강우에게도 고개를 꾸벅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떠날 녀석인데 뭘 그렇게 신경 써.”
배재훈이 손강우에게 말했다.
“제가요?”
“오늘 본 인턴인데 이름까지 외우고.”
“하하, 사원증에 있는 걸 본 겁니다.”
“이름 잘 못 외워서 허구한 날 나한테 깨지던 건 생각 안 나냐.”
“에이, 팀장님. 왜 그러세요. 저 이제는 잘 외우지 않습니까.”
“...잠깐.”
“왜 그러세요?”
배재훈 과장이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인사팀 박동수가 이상한 소리를 하네.”
인사팀 박동수 대리는 배재훈 과장의 학교 후배다. 사내 메신저로 박동수에게 무슨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무슨 소리요?”
“좀 전에 온 인턴이 오늘 하이오크 대전사를 잡았대. 혼자서, 그것도 단칼에.”
“에이, 그게 말이 됩니까. 박동수 대리가 팀장님 놀리는 겁니다.”
“그렇지. 근데 박동수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는 친구는 아니거든.”
배재훈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렸다.
“이 자식 완전 정색하면서 진짜라고 하는데? 박살 낸 머리통도 가지고 나왔대.”
배재훈의 말에 손강우는 강주혁이 반납한 칼을 슬쩍 들어봤다. 아무것도 베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이런 경우는 두 가지.
정말로 아무것도 베지 않았거나 아니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내공을 적절하게 둘러서 검신을 완전히 보호했거나.
손강우가 알기로 공략 3팀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안다정 대리가 한 게 아닐까요?”
“그 안다정이 인턴한테 자기 실적을 몰아줬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안다정의 성격을 잘 아는 손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인턴이?’
손강우는 하이오크의 두꺼운 살가죽을 베고도 조금도 상하지 않은 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공략 1부 3팀 사무실.
유덕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안다정은 강주혁과 이지혜에게 공략보고서 작성을 명령했다.
톨게이트에 있는 인사팀 직원에게 마석을 제출하면서 구두로 대략적인 결과를 보고하기는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까지 포함된 공략보고서를 별도로 제출해야한다. 다음 공략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팀 단위의 실적은 죽은 몬스터에게서 추출한 마석을 통해 평가하지만 헌터 개인의 실적은 이 공략보고서를 보고 평가한다.
당연하게도 인턴은 이걸 쓸 필요가 없다.
“내가 보낸 보고서 파일 받았어요?”
하지만 안다정은 강주혁에게도 일을 맡겼다.
“네. 대리님.”
“그거 참고해서 퇴근 전까지 작성해요.”
현재 시각은 5시. 퇴근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았다.
‘이 정도면 껌이지.’
강주혁은 30분 만에 보고서를 작성했다.
20년 간 공략회사를 다닌 베테랑 헌터의 노하우가 집대성된 보고서. 던전에서 찍은 사진을 스캔해서 첨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리님. 지금 메일로 보고서 초안 보냈습니다.”
안다정과 이지혜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서 강주혁을 쳐다봤다.
“벌써 다했어요?”
“네.”
“대충 한 거 아니죠?”
“아닙니다. 한 번 확인해보시죠.”
“알겠어요.”
안다정은 미심쩍다는 눈으로 보고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지혜는 강주혁을 힐끗거리다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녀는 퇴근 1분 전에야 간신히 제출할 수 있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유덕현은 한참을 졸다가 퇴근시간이 되자 저절로 깨어났다.
“자자, 오늘은 이쯤하고 퇴근합시다.”
다들 짐을 챙기고 유덕현을 따라나섰다.
“신입들이 왔으니 환영식을 해야지. 어디로 갈까?”
1층에 도착했을 때 유덕현이 말했다.
“전 됐어요.”
안다정이 찬물을 끼얹었다.
“에이, 그래도 이 친구들 첫날인데 서로 얼굴은 익혀야지.”
“얼굴은 낮에도 지겹도록 봤잖아요. 업무 끝나고도 회사사람들이랑 시간 보내고 싶지 않아요. 두 사람도 그럴 걸요. 먼저 갑니다. 내일 봬요.”
안다정은 바람처럼 떠나버렸다.
“저, 저걸...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두 사람이 이해해. 원래 안 대리가 좀 저래.”
유덕현은 이지혜와 강주혁을 보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빵빵.
어색한 분위기 속에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길가에 선 포르쉐가 경적을 울려왔다.
“지혜야, 타.”
김태현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손짓을 했다. 하루 종일 똥을 먹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이지혜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오, 남자친구?”
유덕현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 김태현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 그게. 하하...”
이지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면서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상사가 신입환영을 위해 회식을 한다는데 첫 날부터 빠지기 난감했던 것이다.
“안 대리도 없는데 가 봐. 회식은 다음에 정식으로 하자고.”
사람 좋은 유덕현은 아빠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줬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어서 가봐. 내일 늦지 말고.”
“네.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이지혜가 총총 걸음으로 포르세를 향해 달려갔다. 둘만 남겨지자 유덕현은 강주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자 친구는 있지?”
“없습니다.”
“그 얼굴로 여자 친구가 없다고?”
“정말 없습니다. 하지만 술 한 잔 사줄 팀장님은 계시죠.”
강주혁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사내대장부들끼리 뜨거운 술잔을 나누는 것도 나쁘진 않지.”
“제가 전골 잘 하는 곳을 알고 있는데 한 번 가보실래요?”
“전골? 주혁 씨도 전골 좋아해?”
“좋아합니다.”
사실,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유덕현이 전골이라면 환장하는 건 알고 있었다.
“오케이. 안내해.”
* * *
두 남자가 전골집을 향해 걸어갈 무렵, 이지혜는 김태현의 포르쉐에 몸을 맡긴 채 달콤한 꿈에 젖어있었다.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친구. 스포츠카를 타고 하는 드라이브.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날을 꿈꿔왔던가.
시트에 엉덩이가 닿는 순간, 오늘 하루 동안 느꼈던 굴욕감과 짜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대로 한강변을 달리다가 근사한 레스토랑에 코스 요리를 먹으면 완벽할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김태현의 질문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야, 곡괭이가 하이오크 대전사 잡았다는 거 진짜냐?”
“네? 아...네.”
이지혜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단칼에 머리통을 날려버렸다던데 어떻게 한 거야?”
“기술을 썼어요.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사실, 화염구의 시전을 중단하고 하이 오크 쪽으로 돌아서있었기에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그걸 설명하기는 싫었다.
“그렇게 잘 싸워?”
“음...인턴 치고는?”
“골치 아프네.”
“왜요?”
“인턴이 잘 하면 안 되거든. 3개월도 못 채우고 나가야하는데 첫 날부터 저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고작해서 인턴인데 신경 쓸 필요가 있나요?”
“그냥 인턴이 아니고 사장이 직접 뽑은 인턴이잖아.”
“사장님은...힘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힘이 없으니까 인턴이 중요해지지. 그걸로 사장을 몰아낼 수도 있으니까.”
사장을 몰아낸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김태현을 보니 이지혜는 갑자기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겨우 신입사원인데 너무 위험한 싸움에 끼어든 것 같았다.
처음 김태현이 이런 얘기들을 해줬을 때는 자신도 이제 큰물에서 놀게 되었다는 생각에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첫 날부터 된통 깨지고 나니 회사생활이 너무 무서워졌다.
“그게 쉬울까요?”
“이윤철은 회사지분도 없고 지지하는 세력도 없어. 끈도 떨어졌고. 회장님이 지지해줘서 겨우 그 자리에 앉아있는 거야. 그 말인즉슨, 회장님 말 한마디면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지.”
“그거랑 인턴은 무슨 상관이에요?”
“예전에 인턴 뽑았다가 사고가 나서 회사가 엄청 욕을 먹었거든.”
“아, 저도 그거 뉴스로 봤어요.”
“그 때, 회장님이 길길이 날뛰셨대. 관리 똑바로 안 한다고. 그래서 인턴 제도를 없애버렸는데 이윤철 사장이 독단적으로 인턴을 다시 뽑은 거지.”
“왜 그러셨을까요?”
“몰라. 회사 내에 자기 사람이 없으니 답답해서 그랬겠지. 인턴 하나 가지고 치사하게 구는 것 같긴 하지만 잘만 하면 이걸 자충수로 만들 수 있어.”
이지혜는 김태현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가만히 되새겼다.
첫 날부터 맹활약을 해서 회사 전체에 소문이 쫙 퍼진 강주혁. 그런 강주혁과 계속해서 비교를 당하면서 욕을 먹어야했던 자신.
만약 강주혁이 없었다면 이렇게 첫 날부터 인상을 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기...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김태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씩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