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 3462224
#
5화 아버지께 배운 기술입니다.
5화 아버지께 배운 기술입니다.
“우리가 왜 97년도에 발견한 지역에 왔을까?”
유덕현이 물었다.
“지혜 씨가 답해 봐요.”
안다정이 말했다.
강주혁보다 먼저 웨이포인트를 넘었다가 안다정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린 이지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보였다.
강주혁의 경험 상, 지금 눈물을 보인다면 안다정은 이지혜를 미친 듯이 갈구어서 반드시 퇴사하게 만들 것이다.
정신력을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니까.
스펙이 한참 모자랐던 강주혁이 안다정의 인정을 받았던 이유도 악바리 근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리스폰(Respawn) 때문입니다.”
소멸된 게이트나 몬스터가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생성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규칙성이 있기 때문에 생성주기만 정확하게 파악하면 계획적인 사냥을 할 수 있다.
“그래. 어제가 리스폰 데이였거든. 아마 지금쯤 이 주위에 오크들이 득실거릴 거야.”
웨이포인트는 언덕 위에 위치했다. 그 아래는 짙은 안개에 잠겨있었다.
“주혁 씨는 앞으로 나서지 말고 지혜 씨가 마법 준비하는 동안 지켜주기만 해.”
“네. 팀장님.”
“주혁 씨가 심하게 다치거나 죽으면 우리가 곤란해져. 절대 무리하지 마.”
강주혁은 새삼스럽게 유덕현과 안다정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인턴에다가 저질 스펙인 강주혁을 그냥 안전한 곳에 내버려두고 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하는 대신, 강주혁에게 기회를 줬다. 그 기회가 있었기에 강주혁은 자신을 증명해 정직원이 될 수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퇴근 전까지 최대한 많이 잡아보자고.”
유덕현이 언덕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안다정이 그를 멈춰 세웠다.
“투구 쓰세요.”
“...의사가 두피 통풍이 중요하다고 했어.”
“머리통 날아가는 것보다 머리카락 날아가는 게 나아요. 빨리 쓰세요.”
“젠장, 나한테는 그게 그거라고.”
유덕현은 툴툴 거리면서도 면으로 된 후드를 뒤집어쓴 후 그 외에 강철 투구를 썼다. 그리고는 방패를 앞세운 채 언덕을 내려갔다.
원거리 딜러인 안다정은 활을 꺼내들고 뒤따랐다.
“전방에 스물. 넓게 퍼져있어요.”
일행들 중 가장 시야가 넓고 감이 발달한 안다정이 보고했다. 안개가 있어도 적들이 뿜어내는 오러를 이용해 위치와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해냈다.
“오케이. 주술사가 있을 수 있으니까 3미터 간격 유지해. 뒤에 언덕을 끼고 싸운다.”
“알겠습니다.”
“우워어어!”
전방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스걱!
유덕현은 선두에 있는 오크 전사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뒤따르는 오크들이 유덕현을 둘러쌌다.
챙! 캉!
동시에 네 마리를 상대하는데도 유덕현은 전혀 밀리지가 않았다. 충분히 더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거리유지를 위해서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싸우는 중에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고 적들이 들이닥치는 방향으로 미리 움직여 진로를 막았다.
베테랑 탱커다웠다.
“좌측 정리할게요.”
안다정이 좌측에서 몰려드는 오크들을 향해 시위를 놨다.
슉! 펑!
화살은 선두의 오크에 꽂히자마자 폭발했다. 화살을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내공이 발산되었다.
“크아악!”
선두를 따르던 오크 여덟 마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다.
“저도 지원할게요.”
이지혜는 유도능력이 있고 아군에게 피해도 주지 않는 매직 미사일을 사용했다.
퍽! 퍽!
“큭!”
하지만 공격력이 약해서 여러 번을 맞춰야 겨우 하나를 잡는 정도였다.
이지혜는 큰 도움이 안 되었지만 유덕현과 안다정이 워낙 출중해서 어려움은 없었다. 오크들이 오기도 전에 상사들한테 갈려나가는 바람에 강주혁이 검을 휘두를 일도 없었다.
‘슬슬 때가 됐는데...’
전투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던전에서는 언제나 뜻밖의 상황이 생기는 법.
투두두.
지면을 통해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진동은 서서히 강해졌다.
강주혁은 뒤를 돌아봤다.
언덕에서 다른 오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피부가 붉은 오크가 내려오고 있었다.
하이오크 대전사. 일반 오크보다 강한 엘리트 몬스터였다. 내리막길을 전력질주로 내려오는 모습이 꼭 트럭처럼 보였다.
정면에서는 답이 없다는 걸 알고 우회한 후 언덕을 올라 일행의 뒤를 노린 것이다.
“후방 조심해요!”
안다정도 대전사를 발견했다.
그러나 마치 양동작전을 계획한 것처럼 전방의 오크들이 갑자기 몰려들었기에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지혜 씨, 뒤에 적!”
하이오크 대전사의 타깃은 이지혜였다. 하지만 그녀는 파괴력이 강한 파이어 볼을 준비하는 중이라 움직이지 못했다.
강주혁이 대전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안다정도 유덕현에게 전방을 맡기고 후방으로 질주했다.
가까이에 있던 강주혁이 한 템포 빨랐다.
하이오크가 들고 있는 도끼는 강주혁이 아니라 안다정을 노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누가 더 큰 위협인지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건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강주혁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하이오크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무극검(武極劍).
칼날은 선이다. 그래도 칼날이 처음 닿는 지점은 항상 점이다.
강주혁은 검을 휘두르면서 날과 살이 만나는 최초의 지점을 계산했고 바로 그곳에 전신의 내공을 모두 쏟아 부었다.
한 치의 오차만 생겨도 평범한 베기가 된다.
E급 헌터인 강주혁은 C급 몬스터인 하이오크의 신체스펙을 감당할 수 없다.
칼날은 오러까지 두른 두터운 피부를 뚫지도 돌진을 저지하지도 못할 것이다. 하이오크와 부딪힌 강주혁은 차에 치인 사람처럼 날아갈 것이다.
하지만 손바닥이 찢어질 때까지 수십 년을 연습해온 감각은 정확한 타격점을 찾아냈다. 눈이 아니라 본능이 그렇게 한 것이다.
푹!
오러가 담긴 칼날이 하이오크의 오른쪽 목에 닿았다. 목이 얼마나 두꺼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극점에 모인 내공은 송곳처럼 날카로워져 피부를 뚫고 안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펑!
목의 왼쪽과 아래턱의 절반이 터져나갔다.
성대가 날아간 하이오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속이 터져서 반쯤 허물어진 목을 칼날이 말끔하게 잘라냈다.
스걱!
대전사의 목이 피를 흩뿌리면서 날아올랐다.
하지만 추진력이 붙어있던 몸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막아설 수도 있었으나 강주혁은 그렇게 하는 대신 몸을 틀어서 진로에서 벗어났다.
서걱!
강주혁이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안다정이 대전사의 복부를 그으면서 지나쳤다.
두 사람이 1초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X자로 교차한 것이다.
“어, 어...”
조심하라는 얘기를 듣고 시전을 중단한 이지혜는 피하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으악!”
그러다가 머리가 잘린 하이오크의 시체에 깔리고 말았다. 속도가 많이 줄어있어서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무거운 몸에 깔려서 움직이지 못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요!”
안다정이 시체를 옆으로 치우면서 고함을 질렀다.
“죄송합니다! 우윽!”
하이오크의 피를 뒤집어 쓴 이지혜는 일어나려다가 구역질을 했다.
“어이구...”
안다정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하이오크의 시체를 살폈다.
배에 난 자상의 크기와 깊이, 그리고 산탄총을 바로 앞에서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간 목덜미와 턱이 눈에 들어왔다.
A급 헌터는 자상을 입히는 것에 그쳤는데 E급 헌터는 같은 적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안다정은 원거리 딜러를 맡고 있으나 검도 활만큼이나 잘 썼다. 공격력만 따지면 검이 활보다 낫다.
“괜찮아요?”
안다정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지혜를 부축해주고 있는 강주혁을 쳐다봤다.
‘어떻게 한 거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 * *
전투는 오후 2시쯤 끝났다.
강주혁의 활약을 목격한 안다정은 무리하지 않고 오크들을 그에게 보냈다.
강주혁은 어렵지 않게 오크들을 도륙했다. 일반 오크들은 무극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E급 스펙으로 D급 몬스터와 싸우는데도 강주혁은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20년간 축적된 전투경험이 스펙을 상회하는 전투력을 발휘하게 해준 것이다.
강주혁은 대량학살에 특화된 이지혜보다도 많은 오크를 잡았다.
“이야, 이 놈 완전 물건이네. 안 대리 사진기 있지?”
전방에서 고군분투 하느라 하이오크 대전사의 시신을 뒤늦게 확인한 유덕현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네.”
“찍으면서 좀 가르쳐줘.”
“두 사람 이리 와 봐요.”
안다정은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꺼냈다.
“왜 이걸 쓰는지는 알죠?”
“던전에서는 전자장비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여기서 찍은 걸 사무실에서 스캔해서 공략보고서에 첨부할 거예요. 실적은 보통 몬스터에서 나온 마석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사진까지는 필요 없어요. 하지만 오늘처럼 특이사항이 있으면 사진이 있는 게 좋아요.”
“특이사항이요?”
이지혜가 물었다.
“E급 헌터가 C급 몬스터의 머리통을 단칼에 박살냈어요. 내가 알기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에요.”
안다정은 하이오크 시체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살해현장을 확인하는 감식반 직원처럼 보였다.
“팀장님, 이거 보세요.”
안다정이 찍은 사진을 유덕현에게 내밀었다.
“나도 이런 건 처음 보네. 어떻게 한 거야?”
유덕현이 강주혁에게 물었다.
“아버지께 배운 기술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도 헌터셨습니다.”
“이야, 뼈대 있는 집안이었구먼. 춘부장께서는 존함이 어떻게 되시나?”
“강 수 자, 혁 자입니다. 지방에서 중소공략회사를 운영하셨습니다.”
“주혁 씨 검술 보면 한 가닥 하셨을 거 같은데.”
“이름을 떨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이런, 괜한 걸 물어봤네. 미안해.”
“아닙니다.”
“이 사진들 잘 챙겨. 이런 건 전부 주혁 씨 실적이 되는 거야.”
“감사합니다.”
“주혁 씨 생각은 어때? 태원에 계속 있을 거야? 아니면 경험 쌓고 다른 곳으로? 편하게 얘기해도 돼.”
“공략회사 중에 이곳보다 나은 곳이 있나요?”
“크흐흐, 요놈 봐라. 그럼 앞으로도 잘해 봐. 혹시 아나.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정직원으로 뽑아줄지.”
“헛바람 넣지 마세요. 팀장님이 하실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흠흠, 그건 그렇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다정은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강주혁에게 넘겼다.
“어떻게 하는지 잘 봤죠? 오늘부터 주혁 씨 담당이에요.”
예전에는 눈치도 경험도 없어서 몰랐다.
3개월짜리 인턴에게 제법 중요한 일을 가르치고 시킨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하지만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일 시키는데 감사랄 것까지야...”
안다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 * *
1세대 헌터들은 슈퍼히어로였다. 그들은 몬스터와 싸워서 지구를 지켜냈다.
2세대 헌터들은 영웅호걸이었다. 몬스터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자 그들은 최강자가 되기 위해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공권력은 그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헌터들은 수입원이 되는 게이트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한 후 서로 자웅을 겨뤘다.
유명한 헌터들에게 별호를 지어주는 전통은 이맘때쯤 생겨났다. 이 전통은 헌터들이 공략회사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사회에 완전히 편입된 3세대까지 이어져왔다.
태원공략의 사장실.
부사장 김재후가 사장 이윤철을 찾아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태원공략의 사장, 이윤철이 물었다.
그의 별호는 용산철검(龍山鐵劍). 용산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헌터들 중 최강자였다.
“인턴을 뽑으셨더군요.”
부사장 김재후가 말했다.
별호는 서초패왕(瑞草覇王)으로 서초구를 대표하는 헌터였다.
“일찍도 물어보시는군요.”
이윤철이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해외출장 중이라서 소식이 늦었습니다.”
“곽 부장이 게으름을 부렸군요.”
인사팀 팀장인 곽진섭 부장은 김재후의 충복으로 통했다. 김재후가 해외에 있더라도 이런 특이사항은 곧바로 알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재후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이게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건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턴 문제 때문에 홍역을 치른 걸 잊으셨습니까.”
“그건 인턴 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인턴의 문제였지요.”
인턴이 던전에서 부상을 당한 일로 태원공략은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인턴제도가 공략회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이윤철은 생각했다. 인사팀의 실수로 사람을 잘못 뽑은 것이지 제도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회장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김재후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웃음을 가렸고 이윤철은 가만히 그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태원공략에 들어오기 전부터 앙숙이었다. 둘 다 용산구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곳을 기반으로 헌터로 활동했다.
그러나 별호에 <용산>을 박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이윤철뿐이었다.
별호에 관한 전통은 절대 동일 지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윤철을 꺾지 않는 이상 누구도 <용산>이란 지명을 별호에 넣을 수 없는 것이다.
이윤철을 넘지 못했던 김재후는 결국 서초구로 근거지로 옮겨 <서초패왕>이 되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별호에 들어가는 패가 으뜸 패(覇)가 아니라 패할 패(敗)라면서 빈정거렸다.
이제 김재후 앞에서 대놓고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2인자라는 꼬리표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 뽑은 인턴은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던전에서 1년을 보낸 사람입니다. 이전이랑은 다를 겁니다.
“그 친구가 태원공략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는 건 알고 계시죠?”
“인사팀의 일처리가 언제나 완벽할 순 없겠죠.”
“그럼 이번 기회에 알 수 있겠군요. 인사팀의 일처리가 나은지 사장님의 안목이 나은지.”
“그럴 겁니다.”
띠링.
그 때,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잠깐 실례하죠.”
이윤철은 책상으로 돌아갔다. 김재후는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사장과 부사장이 독대를 하고 있는데 비서가 연락을 할까? 회장이 오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김재후는 이윤철이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인가?”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신 인턴이 공략을 무사히 마치고 나왔다고 합니다.”
이윤철은 강주혁에 관한 정보가 들어오면 즉각 보고하라고 했던 걸 떠올렸다.
“그래?”
이윤철은 수화기를 든 채 김재후를 봤다. 어차피 인사팀 부장이 그의 라인이니 곧 알게 될 것이다.
이윤철은 그 인턴이 광부였을 때 보여줬던 특별함을 믿었다. 이윤철은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김재후도 보고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잘 싸웠다고 하던가?”
“인턴이 혼자서 하이오크 대전사를 잡았다고 합니다.”
비서의 말에 이윤철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