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9
대어(大魚) (2)
(499)
박사장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H그룹은 납품 량이 좀 늘었습니까?”
“예 차츰 늘고는 있습니다.”
“저는 오늘 구회장님을 만난 지도 오래되어 얼굴도 한번 보고, 납품하는 제품 품질에 대하여 좀 더 신경을 써달라는 말을 하려고 만나자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냥 형식적인 말이었다. 오늘 만남의 핵심은 광주 강연회였다.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좋은 제품 만들어 내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박사장이 승용차 시동을 걸었다. 구건호는 박사장 차에 내려서 다시 벤트리 승용차로 올라갔다.
“찬호야, 우리 이태원가서 점심 먹을까?”
“네, 그럴까요? 그런데 이태원은 술집이 많아서 저녁때나 문을 여는 식당들이 많아요.”
“그래, 그럼 주차하기도 나쁘니 삼각지 국밥집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삼각지 국밥집에서 식사를 하고 신사동 빌딩으로 돌아왔다.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작전을 짜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모빌에서 보내준 1,200억을 자기의 강북증권 계좌에 옮겨 놓았다. 이렇게 되니 강북 증권은 기존에 있던 돈 2,200억과 합하여 3,400억이 되었고 강남 증권은 3,300억이 있게 되었다.
“모두 합쳐 6,700억이 있군.”
구건호가 디욘 코리아 주식을 보았다. 옛날처럼 25,000원 대에서 놀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유통주식이 적은 회사라 단기간에 대량으로 사기도 어려웠다.
[디욘 코리아는 대주주인 W케미컬과 디욘 본사에서 가지고 있는 주식과 우리사주를 빼면 유통 물량은 불과 600만주다. 현재가가 25,000원대에서 놀고 있으니까 유통주식은 1,500억 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야.]
[내가 열흘 사이에 얼마나 모을 수가 있을까? 현재 보아하니 나오는 물량도 별로 없는 것 같아. 아직 누군가가 정보를 입수하고 매집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어. 그럼 이걸 어쩌지?]
[더군다나 내가 대량으로 매입한다면 대주주로 등극하게 되고 공시도 하는데 구건호란 이름이 튀어나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부거래로 의심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회사에 대표이사로 있던 사람이 대량으로 사들인다면 틀림없이 조사 대상이 될 거야.]
구건호는 A전자그룹 박사장의 정보가 좋은 정보이긴 하지만 별로 자기가 활용할 만한 가치는 못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처럼 300만주 정도 사놓고 먹는 수밖에 없었다. 구건호가 가지고 있는 6,700억이 움직이기에는 놀 수 있는 마당이 너무 좁았다.
“A전자 같은 대형주가 움직여주면 좋은데 거긴 회장이 정치와 담을 쌓는다고 해서 선을 그어놓고 있으니 올라가긴 힘들겠지.”
그러면서 구건호가 A전자를 클릭해 보았다.
“엉? 이게 뭐야?”
좀처럼 움직이기 힘든 A전자 대형주식의 거래량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워낙 무거운 주식이다 보니 거래량이 터졌어도 4%정도 상승선에 머무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A전자 주식을 대량 매집하고 있다. 수천억 원어치를 쓸어 담고 있어!]
A전자는 종업원 15,000명에 매출 15조를 자랑하는 한국 굴지의 재벌 회사다. 주식도 현재는 12만 원정도 하였다. 이른바 귀족주였다. 발행주식 시가 총액도 8조원이나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6,700억도 매집 들어가면 사흘 만에 바닥나겠네.”
구건호는 A전자 주식을 사려다가 또 한 번 망설였다.
[최근에 너무 많이 올라와 있어. 누구가가 대량 매입하고 이렇게 가파르게 올라갔네. 국민연금이나 군인공제회 같은 기관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닌데 개미가 이렇게 사고 있어. 무언가 증권사 찌라시가 돌았나?]
[내가 지금 사게 되면 추격매수가 되어 혹시 막차 타는 건 아닌가? 하지만 A전자 박사장 말이 맞는다면 발표일 때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
[그래, A전자 주식을 사면 내가 내부거래도 해당이 안 되고 혹시 누가 알게 되어도 의심을 하지는 않는다. 납품을 하고 있는 협력업체라 주식을 샀다고 하면 이상하게 볼 이유도 없다. 무릎에서 사고 어깨에서 판다.]
구건호는 A전자의 주식 매집에 들어갔다.
다음 날도 과감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들린 사람처럼 매입을 해 나갔다. 디욘 코리아처럼 작은 주식은 냄비에 물 끓듯이 금방 뜨거워졌다가 금방 차가워지지만 이건 대형주라 움직이는 게 무겁다. 하지만 대선이라는 호재가 있으니 구건호는 못 먹어도 30%는 먹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구건호는 비서 오연수를 불렀다.
“옆 사무실에 가서 손사장님 좀 오시라고 해요.”
그 말이 떨어지자 오연수는 쪽 거울을 꺼내들고 얼굴부터 다듬었다. 아마 자산운용사 사무실에는 젊은 펀드 매니저들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잠시 후 손사장이 왔다.
“젊은 직원들 수익을 좀 올리고 있습니까?”
‘실수들은 잘 안하는데 너무 신중해서 그런지 수익률은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흠, 그래요?”
“다행인 것은 우리 펀드매니저들은 철저히 챠트나 거래량 분석 위주이지 증권사 찌라시 같은건 잘 안 믿습니다.”
“그런 투자방식은 좋습니다.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까지지가 않아야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디욘 코리아 주식 조금만 사 보세요.”
“전에처럼 어떤 재료가 있습니까?”
“그건 내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젊은 매니저들이 회장님 말은 믿을 겁니다.”
“증권사 찌라시도 아닌 내 말을 믿어요?”
“회장님, 특히 오너 회장님들은 가장 질 좋은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니까요.”
“그래요?”
“회식 자리에서 이번에 들어온 키 큰 친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스텐포드 대학 나온 친구 말입니다. 증권사 찌라시는 말 그대로 소문인 경우가 많지만 오너 회장님들 정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에서 노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가장 신뢰하는 정보 집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거야 재벌 회장들 이야기고 난 지금 변변한 상장기업도 없는 사람입니다.”
“아닙니다. 회장님은 역시 고수이십니다. 지난번에 디욘 코리아를 가지고 수익 올리는 걸 보고 엄청 놀랐었습니다. 일류대학을 나오고 저같이 대형 은행 글로벌 팀장을 한사람 100명을 모아 놓아도 구회장님 한사람을 당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저는 직원들한테 디욘 코리아를 과감히 지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지에이치 모빌에서 납품하는 A전자가 있습니다. 요즘 거래량 붙으면서 올라가고 있는데 왜 그런 가 살펴보십시오. 직원들한테도 물어보시고요. 납품처라 아무래도 관심이 갑니다.”
“알겠습니다.”
구건호가 개인적으로 4천억 원어치 A전자 주식을 샀을 때 손사장이 구건호 방엘 왔다.
“직원들이 회장님 말씀이라는 소릴 듣고 자기가 갖고 있는 주식 다 팔고 디욘 코리아로 갈아 탔습니다. 지금 우리가 운용하고 있는 돈이 100억 밖에 안 되고 또 개인이 아닌 법인이 사는 것이라 내부정보 문제는 염려 없을 것 같습니다.”
“흠, 그래요? 그러다가 주식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는 쪽팔리게 생겼네요.”
“상관없습니다. 주식의 등락을 미리 아는 건 어차피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잖습니까?”
“A전자는 알아보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직원들이 벌써 관심종목으로 선정해 놓고 예의주시하고 있는 종목이었습니다. 증권사 찌라시가 나돈 것은 없는데 이렇게 대형주식이 움직이는 건 무언가 큰 빅딜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따라가 사면 어떨까요?”
“빅딜은 깨질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큰 인수 합병이나 새로운 획기적 사업계획이 있다거나 국제 유가 하락에 대한 고급 정보가 있거나 하는 것들이지요. 하지만 우린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흠.”
“결론은 사도 나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래량이 늘고 챠트가 우상향 하고 있어 추세가 살아 있는 한 사두면 나쁠 것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이것도 국제지수가 나쁘면 영향은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것은 디욘 코리아입니다. 시가 총액이 얼마 안 되는 주식이라 폭등을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폭락할 가능성도 많지요.”
‘흠.“
“안전성을 위해선 A전자는 지금 들어가도 좋습니다. 단 욕심 부리지 않는다면 은행 이자율보다는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구건호가 빙그레 웃었다.
[잘 보았소. 그 정도 답변이면 내가 만점은 아니더라도 90점은 주겠소.]
구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보신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디욘 코리아 매집이 끝났으니 직원들과 봄놀이라도 다녀올까 합니다.”
“그렇게 하세요.”
구건호는 자산운용사의 손근수 사장이 나가자 공격적으로 A전자 주식을 다시 사들이기 시작했다.
[대어(大魚)를 낚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구건호는 사흘 만에 6천억 원어치의 주식을 사들였다. 워낙 대형주라 사흘 만에 다 사들일 수가 있었다.
“가지고 있는 돈 6,700억에서 6,000억 원어치를 샀다. 이제 하늘에 맡기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대형주는 고꾸라져도 하한가를 맞는 일은 드무니까 구건호는 크게 조바심하지는 않았다.
구건호는 사흘 동안 모니터 화면만 쳐다봐서 그런지 눈이 어른거리고 침침했다. ‘하이눈’이란 안약을 사서 눈에 넣었다. 안약을 넣고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미디어에 근무하는 마츠이 요시타카 선생이 올라왔다.
“웬일이십니까? 요시타카 선생.”
“일본 신쥬꾸 요정의 세가와 준꼬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마마상 말입니까?”
“마마상이 구회장님께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요?”
“이번에 모리 에이꼬가 또 다시 중국영화 <항왜영웅>에 출연하게 되어 세가와 준꼬는 아주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캐런티를 50만 달러나 받게 되어 고마운 모양입니다.”
“그거야 에이꼬가 인기가 있어 그런 거니까 나한테 고마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가와 준꼬는 이 모든 것이 구회장님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실이 또 그렇고요.”
“난 한 일이 없습니다.”
“마마상은 모리 에이꼬를 이제 금년 말로 독립시키겠다고 했습니다. 원래 30세가 되어야 독립을 시키는데 모리 에이꼬는 이미 투자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아 독립을 해주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제부터 모리 에이꼬에게 생기는 수입은 모두 100% 모리 에이꼬의 통장에 들어갑니다. 모리 에이꼬는 이제 프리랜서입니다.”
구건호는 날짜를 짚어보았다.
“이진우 대표의 광주 강연회는 아직 엿 세나 남았다. 조용히 모리 에이꼬나 보러 가야겠다.”
구건호는 내일 동경 가는 항공권을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였다. 그리고 모리 에이꼬에게 내일 동경엘 간다고 연락을 했다.
구건호가 동경엘 가기로 하자 바로 상민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까르륵거리며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의 넥타이를 잡아 다니는 모습도 떠올랐다.
“어째 동경 가는 것이 상민이한테 미안한데. 이제 영은이가 미안한 게 아니라 상민이가 미안하네.”
구건호는 모리 에이꼬 만나는 것을 이젠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은 간다고 연락까지 했으니 안 갈수도 없었다. 또 모리 에이꼬의 흰 피부와 작고 도톰한 입술도 자꾸 생각이 났다. 출산 후 몸이 많이 불은 영은이 보다는 훨씬 젊은 피부와 가는 허리의 에이꼬가 더 생각나는 것은 남자로써 참기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