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
연말 정기 인사 (3)
(362)
구건호가 신사동 빌딩의 지에이치 개발 사장실에 앉아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었다. 설빙의 기사가 뜬 것을 보았다.
[설빙, 5년 연하의 야구선수와 열애설.]
야구선수와 설빙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도 게재되어 있었다. 사진은 한눈에 봐도 야구선수가 훨씬 어려 보였다.
[연애하는 건 좋은데 5년이나 어린 사람하고 잘 맞을까? 어린남자면 이해심도 부족할 텐데. 설빙이 잘 감싸줘야 할 것 같군.]
구건호는 김영은이 출산도 임박했고 모리 에이꼬와도 만난 지가 얼마 안 되어 다른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설빙의 열애설에 무덤덤하기만 했다.
마침 BM엔터테인먼트 이사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사장님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중국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시광여몽>이 초반 시청율이 높다니 말입니다.”
“시청율 높으면 수입이 좋은가요?”
“물론이지요. 방송사의 제작비는 시청율과 연동되어 지급됩니다. 방송사도 1차 판권수익이 올라가잖습니까? 방송사 내의 PP사업과 VOD사업에 영향을 끼칩니다.”
“PP와 VOD요?”
“PP(Program Provider)는 채널 사용 사업자를 말하고 VOD(Video on Demand)는 주문형 비디오를 말합니다. 상해 방송국은 <시광여몽>을 방영후 채널사용 사업자와 VOD를 통해 수익을 창출합니다.”
“흠.”
“드라마 <시광여몽>은 심운학 감독이 중국 상해의 30대, 40대 여성을 타킷으로 한 것이 주효했을 겁니다. 이 연령대가 드라마를 많이 보지요. 사장님은 드라마 잘 안보시죠?”
“예, 나는 잘 안봅니다.”
“또 드라마는 2차 수입도 발생합니다. 케이블TV나 인터넷TV, DMB수입도 발생하고 수출도 합니다. 상해 방송국에서 시청율이 좋으면 중화권의 다른 곳에도 수출될 확률이 높습니다.”
“흠, 그래요? 그런데 제작비는 방송국에서 언제 주나요?”
“관행상 한 달에 한 번씩 합니다.”
구건호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았다.
[100만불 들어갔으니 다음번 2차 출자 100만불은 천천히 주어도 되나? 주연 배우 캐런티가 비싸서 그건 안 되나?]
“드라마에 대해선 내가 잘 모릅니다. BM엔터테인먼트가 좋은 배우를 소개해 주었고 또 앞으로도 편집이나 촬영 등 기술적 부문도 자문해 준다니 고맙습니다.”
“뭘요, 저희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심감독이 매일 우리한테 귀찮을 정도로 전화를 해오고 있습니다.”
“전화 오면 많이 도와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아 참, 오늘 인터넷 보니까 전에 우리 갤러리 전시회 때 초청했던 설빙이 야구선수와 좋아한다는 기사가 떴네요. 축하해줄 일이네요.”
“글쎄요. 축하해줄 일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 설빙의 엄마가 재벌 집 아들하고 엮어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된 모양입니다.”
“둘이 좋아하면 되지 꼭 재벌하고 할 필요가 있나요?”
“걔 엄마가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설빙의 아빠는 저도 잘 압니다. 제가 방송국 다닐 때 선배 PD였습니다. 재혼한 여자가 돈에 집착이 유별납니다.”
“재혼요?”
“예, 그 선배가 설빙 엄마랑 재혼했습니다. 그 선배님은 사람이 좋습니다. 하지만 설빙 엄마는 너무 설친다고 할까? 뭐, 좀 그런 게 있습니다. 재벌 사위를 못 보니 실망은 했겠네요.”
“흠, 그렇군요.”
“설빙도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 설빙뿐만 아니라 강남여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나이어린 신랑을 얻으면 능력 여성이란 걸 증명하기 때문에 그런 모양입니다. 그래서 강남 유부녀는 나이어린 남자 애인을 두면 목에 힘을 준다고 하잖습니까?”
구건호는 BM엔터테인먼트 이사의 이 말을 들으면서 그가 눈웃음을 치고 말하는 것이 눈에 선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요. 일부에서 그러겠지요.”
구건호는 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서울대학교 정책 대학원도 다음 주면 종강을 하고 졸업식을 갖는다고 하였다. 1년짜리 과정이라 학위는 없고 대신 총장 명의의 수료증을 준다고 하였다.
이진우 장관이 낄낄거리며 국회의원에게 말했다.
“야, 박의원! 자네는 선거 홍보물 만들 때 학력 난에 서울대학교 정책대학원 졸업이라고 한줄 더 들어가겠다.”
“아주 수석 졸업이라고 쓸까?”
원생들은 이러면서 낄낄 거렸다.
“어이, 회장. 그런데 이렇게 끝내고 말거야? 망년회 안 해?”
“아휴, 내가 망년회가 많아. 12월말까지 일정이 꽉 잡혀 있어.”
“그래도 섭섭하잖아?”
“그럼 12월 22일 할까? 주중인데 괜찮아?”
이진우 장관이 일어서서 앞으로 나왔다.
“에, 다음 주면 이 과정도 끝이 납니다. 앞으로 졸업생 모임은 계속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우리를 지도했던 교수님 몇몇을 모시고 종강 파티 겸 망년회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옳소.”
“좋아요.”
“그럼 22일 하자는 의견들이 있는데 22일 못 나올 분만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럼 장소는 좀 널찍하고 주차하기 편한 대로 하겠습니다. 63빌딩 중식당 백리향이 어떨까요?”
“63빌딩 57층에 있는 중국집말이오?”
“예, 맞습니다.”
“거기 비싸지 않나요?”
“한 사람당 10만원씩 걷으면 될 것 같습니다.”
“10만원? 이 장관처럼 재벌 집 사위라면 몰라도 우리 같은 공무원은 살림 거덜 나겠는데.”
말들은 이렇게 했지만 총무인 구건호가 10만원씩을 걷으러 다니자 다들 5만 원짜리 두 장을 척척 뽑아서 주었다.
아침부터 제법 눈발이 날리던 날이었다.
“어마 눈 봐라!”
비서 오민수가 좋아서 탄성을 질렀다.
구건호는 운송사업체인 지에이치 로지스틱스는 걱정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문재식이도 로지스틱스를 맡았을 때 운수회사의 최대의 적은 눈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구건호는 로지스틱스 사장으로 있는 매형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경리담당 홍과장이 전표 결재 때문에 사장실을 들어왔다.
“저, 이번 주 금요일 지에이치 미디어의 망년회가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한다고 그럽니다.”
“사무실에서?”
“그날 개발 직원들도 모두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요?”
“사장님도 참석하시면 좋겠다고 신사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난, 다른데 가봐야 되요.”
홍과장이 구건호가 싸인한 전표를 챙기면서 말했다.
“지난주에 성환에서 지에이치 산하 경리 담당자들은 다 모였었습니다.”
“성환에서?”
“1호선을 타고가면 모두 만날 수 있다고 해서 성환에서 모였습니다. 거기로 모빌의 김민화 이사님과 디욘코리아의 조명숙 차장님이 차를 가지고 나와서 매실농장에 가서 놀았습니다. 좋던데요?”
“누구누구 왔어요? 다들 모였어요?”
“모두 5명 모였습니다. 모빌의 김민화 이사님, 디욘의 조명숙 차장님, 미디어의 노형숙씨, 로지스틱스의 은형남씨, 그리고 개발의 저 이렇게 모였었습니다.”
“흠, 그래요?”
“지에이치 모빌의 공장도 구경해 보았습니다. 엄청 크고 좋던데요? 처음 가보았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디욘코리아는 못 가보았습니다.”
“재미있게 놀았어요?”
“네, 그날 식대는 김민화 이사님이 쏘셨어요. 김민화 이사님이 제일 맏언니고 미디어의 노형숙씨가 제일 어렸습니다. 서로 정보 교환도 하고 사장님께 올리는 월차 손익은 되도록 빨리 뽑아서 올리자는 이야기들도 했습니다.”
“흠, 그래요?”
“경리의 제일 목적은 회계 자료를 최고 경영자한테 올려들어 판단을 하게끔 하는데 있으니까요.”
“흠,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 간 모양이군요.”
홍과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중국의 김민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구건호는 홍과장에게 이만 나가보라고 손짓을 하였다.
“심양의 이석호는 가게 판다고 신문에 광고를 냈다고 하네.”
“잘 했어. 그게 답이야.”
“아직은 보러 오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야.”
“지금 시기가 안 좋다. 12월 중순이 넘어가고 있으니 겨울 지나야 누가 입질이라도 할 거야.”
“춘절(중국의 음력 설)지나야 가게 보러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그러겠지.”
“참, 나도 드디어 아이 들어섰다.”
“그래? 축하한다. 얼마나 됐니?”
“3개월이야. 다른 것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알았어.”
“고자는 아닌 모양이구나.”
“그러지 않아도 고자 아니냐는 소리 많이 들었어.”
“듣던 중 반가운 희소식이다. 제수씨한테 잘해드려라.”
“고맙다. 그런데 지금은 괜찮지만 임신 말기가 되면 회사일도 걱정이야.”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해도 돼. 지금 있는 직원들 잘 키워보도록 해봐.”
“봐서 한국인 남자 직원을 한사람 채용할까 해.”
“디욘코리아에?”
“응, 지금 한국기업이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실직하는 애들이 있는데 얘들 중에서 쓸 만한 애 데려오면 좋을 것 같아.”
“알았다, 그런 사람 찾아봐라.”
“디욘코리아가 월 판매액이 120톤 넘으면 한번 찾아볼게.”
“알았다.”
목요일이 되었다.
구건호가 직산의 모빌 공장으로 출근했더니 송사장이 조직 개편안과 품질관리담당 이사 승진품의서를 들고 들어왔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구건호가 그 자리에서 서명을 하였다.
“그리고 이건 중간관리자 승진 품의서입니다. 임원들로 구성된 인사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총 승진 대상자는 20명입니다.”
구건호가 슬쩍 서류를 보았더니 맨 위에 박종석이사가 추천한 차장이 부장으로 승진한 것이 눈에 띄었다.
“중간관리자는 송사장님 서명하셨으니 됐습니다.”
구건호는 송사장이 준 중간관리자의 승진 품의서를 도로 송사장에게 주었다.
“그럼 오늘 날짜로 발령을 내어 각 부서로 통보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저희 모빌은 인원이 많아 망년회는 별도로 갖지 않고 강당에서 종무식과 시무식만 갖겠습니다.”
“흠, 그렇게 해야겠지요.”
“종무식 하는 날 구내식당 특식만 준비하도록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종무식과 시무식은 사장님도 참석했으면 합니다.”
“내가요? 됐습니다. 송사장님 주관으로 그냥 하세요.”
“그리고 연말에 모범사원이나 제안 우수자 각각 두 명씩 포상도 실시할 예정입니다. 모범사원은 각 부서에서 올리면 임원회의에서 최종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부상도 좀 듬뿍 주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구건호는 디욘코리아로 넘어갔다.
윤상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승진 품의안을 들고 사장실로 왔다.
“뭡니까?”
“이번 연말 승진인사 품의서입니다. 지난주 임원회의 때 상정한 내용들입니다. 전무님께서는 구두로 사장님께 이미 보고를 드린 사항이라고 하셨습니다.”
구건호가 품의서 서류를 보았다. 지난번에 김전무가 말한 대로 공무과장을 차장으로 올리고 통역 채명준 사원을 대리로 올리는 품의안이었다. 구건호가 힘차게 서명을 해주었다.
“인사발령은 오늘 날자로 하여 각 부서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모빌의 이야기를 들으니 별도로 망년회는 갖지 않고 강당에서 종무식과 시무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저희도 종업원 숫자가 많아졌으니 망년회는 생략하고 강당에서 종무식과 시무식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종무식 때는 모빌처럼 구내식당 특식이라도 만들어 주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종무식과 시무식 땐 나 없어도 되지요?”
“그건 안 됩니다. 모빌은 공동대표이사로 되어있어 송사장 주관이 가능하지만 여기는 대표이사가 사장님으로 되어있어 참석 하시는 게 좋습니다.”
“거 참, 되게 귀찮네.”
“귀찮더라도 참석하셔야 합니다. 종무식이나 시무식때 사장님 인사말은 저희들이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럼 종무식은 내가 일이 있어 빠지고 시무식만 참석하지요.”
“잘 알겠습니다.”
윤상무가 서류를 들고 사장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