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
동창 이석호 (3)
(353)
서울대학교 정책대학원의 원생들은 그동안 많이 친숙해져 쉬는 시간엔 늘 시끄러웠다.
원생들은 사회 저명 급 인사들이 많아 풍부한 정보들로 넘쳐났다. 어디서 들었는지 비하인드 스토리도 재미있게 이야기들 하였다. 국회의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날씨도 좋은 늦가을인데 이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야외 단합대회라도 한번 합시다. 이런 건 회장이 알아서 해야 되는 데 회장이 너무 점잖아 누가 총대를 메는 사람이 없네요. 어때요? 여러분!”
“좋아요, 좋아!”
“옳소!”
“단풍구경은 가야지.”
“내장사로 갈까?”
“거긴 너무 멀어. 관광버스 대절해야 돼.”
“강화도로 갈까?”
“거긴 단풍도 없잖아?”
“그러지 말고 여기 관악산 뒤쪽에 안양유원지나 가지.”
“거긴 복잡해.”
“아냐, 저녁에 가면 사람 없어.”
“안양 유원지 가깝고 좋아. 이 시각에 가면 사람도 없어.”
이렇게 되어 원생들은 다음 주에 안양유원지 예술공원을 가기로 했다. 수업은 한 시간만 하고 가기로 하였다.
“총무가 예약을 해. 그리고 5만원씩 걷어.”
“누구 술 가져올 사람 없어?”
“지난 번에 이진우 장관이 가져왔잖아?”
“이 장관이 또 가져오지. 그런 건 재벌집 사위가 조달 해야지.”
이진우 장관이 발끈하는 척 했다.
“야, 내가 양조장집 사위냐? 이번 모임 발의한 박의원이 가져와. 제 지난번 선거 치루고 남은 돈 있을 거야.”
“야, 지역구 관리하느라 돈 없어.”
”바렌타인 같은 양주 말고 너 지역구에 유명한 전통주 박물관도 있잖아. 그 술 몇 병 가져와.“
“흠... 그럴까?”
“총무 뭐해? 돈 걷어야지. 말 나온 김에 걷어.”
구건호가 돌아다니며 5만원씩을 걷었다.
“그런데 5만원 가지고 될까?”
“모자라면 나중에 더 걷어.”
돈들은 많이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라 대부분 5만원짜리 한 장씩을 척척 내었다.
“저는 돈 받았으니까 내일부터 안 나옵니다.”
“안 나와? 안 나오면 총무 회사 쳐들어 갈 거야!”
이런 농담을 하고 있는데 강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조용해 졌다.
다음날 구건호는 안양유원지 예술공원을 답사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찬호는 근방의 맛 집으로 식사를 하러 가는 줄 알았다.
“어디로 모실가요?”
“안양유원지로 가자.”
“안양 유원지요?”
“다음 주에 안양 예술공원에서 대학원 원생들 단합대회를 하기로 했어. 좋은 장소가 있나 한번 찾아봐야겠다.”
“그럼 오늘 점심도 거기서 하죠.”
“그러자.”
안양 예술공원은 주중인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저기 뒷길로도 한번 가보자.”
구건호는 안양 예술공원을 두어 번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시설이 좋은 갈비집을 찾았다. 3층까지 있는 갈비집이었다. 2층, 3층은 주로 회식 같은걸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주인 남자가 나왔다.
“몇 분이 오실 겁니까?”
“20명요.”
“20명요?”
“아, 기사들도 20명 있겠네요.”
“기사가 20명요?”
기사가 20명이라는 소리에 갈비집 사장은 다시 한 번 구건호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메뉴는 뭘로 하실 겁니까?”
“암소 갈비요.”
“그럼 3층으로 하시죠. 3층이 전망도 좋고 한갓집니다. 회식 끝나고 노래도 부를 수 있는 마이크 시설도 있습니다. 기사님들은 2층에서 식사하시면 되겠습니다.”
구건호는 서울대 정책대학원 이름으로 예약을 하였다.
구건호와 엄찬호는 예약한 집에서 갈비탕을 먹고 커피가 든 종이컵을 손에 쥔 채 계곡 쪽으로 왔다.
“물이 많이 흐르네.”
“네, 계곡치고는 물이 많이 흐르네요. 저도 어렸을 때 엄마 따라서 여기 온 기억이 나요.”
엄찬호도 추억에 젓는 듯 했다. 구건호는 엄찬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애잔한 느낌이 들었다.
[짜식, 아빠도 없고 엄마도 재혼했으니 부모가 그립겠네. 그런데 엄찬호 엄마는 찬호가 보고 싶지 않은가?]
구건호는 어느 때 이런 일이 궁금하여 물어볼까 하다가도 남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아 부모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피했다.
구건호가 나무 밑 벤치에 앉아 편한 자세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음미하고 있는데 중국서 전화가 왔다. 문재식이었다.
“구사장? 통화 가능해?”
“가능해.”
“지금 점심 먹고 낮잠 즐기는 시간 아니야?”
“아니야. 아직.”
“이석호가 방금 갔어. 귀양 공항까지 내차로 서비스 해줬네.”
“잘 했다.”
“그놈 때문에 노선답사를 못 갔는데 이제 가게 됐네.”
“이석호가 단순 관광인가?”
“아니야. 심양에 있는 자기 상가를 사라고 했어. 돈은 나누어 받을 테니 일 년만 묵혀두면 큰 돈이 된다고 날 꼬셨어.”
“그래서 안한다고 했나?”
“당연하지. 또 돈도 없고, 있다하더라도 뭐 하러 그 먼데 투자해? 그래서 못한다고 했지. 그랬더니 뭐라고 한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
”너 같은 놈은 사업할 놈이 아니라고 하면서 화를 내더라고.“
“흠, 그래?”
“그러면서 입에 담기 어려운 이야기도 했어.”
“뭐라고 했는데.”
“됐어. 그 말은 나중에 하지.”
“괜찮아. 해봐.”
“나중에 할게.”
“해 보라니까!”
“네가 구건호 그늘에서 빌어먹을 줄이나 알지 사업적 안목은 하나도 없는 놈이라고 화를 내더라고.”
“쯧쯧, 아직도 철이 덜든 인간이군.‘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나는 사업적 안목이 없어 지금 하는 일이나 열심히 할뿐이라고 했지. 그랬더니 그러니까 네가 지하실 신세를 못 면한다고 나를 칠 기세까지 보이더라고.”
“저런!”
“그래서 내가 말해 줬지. 우리 부모님 지금 동인천역 앞에 30평짜리 아파트 살고 나도 여기서 고급아파트에 산다고 하면서 우리 집을 보여주었지. 상당히 놀라는 눈치더라고.”
“그럴 테지.”
“더구나 기사 딸린 아우디 승용차 타고 다니면서 여기선 고속버스터미널 사장 아니냐고 하면서 터미널 사무실까지 보여주었어. 제복 입은 터미널 직원과 공안원들까지 나한테 인사하는 걸 보고 이석호가 시무룩해졌던 것 같아.”
“거기까지 가서 너한테 상가를 할부라도 사라는 걸 보니 급하긴 급한 모양이구나.”
“같이 온 친구도 있었는데 이번 여행경비는 그 친구가 데는 것 같았어. 볶음머리 한 방모라는 친구인데 가라오케 할 만한 지역을 찾는다고 했어. 도우미 여자들이 나오는 그런 가라오케를 운영하려는 모양이야.”
“그래?”
“그래서 내가 아직은 중국에 온지 얼마 안 되고 중국말도 서툴러 그 방면엔 잘 모른다고 답해주었어.”
“잘했다.”
“대접은 잘해서 보냈어. 그렇지 않아도 구사장이 이석호가 온다는 소릴 듣고 잘 대접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어. 좋아하더군. 가라오케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가라오케까지 데리고 갔었어.”
“하하, 그랬나?”
“두 놈 다 놀긴 잘 놀데. 도우미 여자들하고 춤추는 솜씨들이 보통이 아니었어. 춤을 어디서 배운 모양이야.”
‘하하, 그래?“
“이제 그놈들 갔으니 시원해.”
‘하하, 고생했다.“
구건호는 안양 예술공원 벤치에 앉아서 이석호를 생각해 보았다.
[이석호가 학교 다닐 때 활동적이긴 했었지. 조원철이나 황병철은 남들을 무시하고 같이 노는 것 까지 거부했지만 이석호처럼 폭력적이진 않았지. 그런데 이석호는 싸움도 잘했고 사람이 폭력적이었어.]
[특히 평상시 말할 때도 사람을 툭툭 치는 나쁜 버릇이 있었지. 특히 문재식은 그놈한테 하도 맞아 걔만 지나가면 공포스런 눈으로 쳐다보곤 했지. 지금 상황이 어렵게 되었지만 평상시의 태도로 보아 도움 받을 만한 데가 없을 것 같군. 안됐네. 이석호!“]
구건호는 조원철이나 황병철의 부모들도 기억이 났다. 조원철은 대 놓고 남을 무시해 자기 집 근처에는 구건호나 김민혁과 문재식을 얼씬도 못하게 했었다. 황병철은 그래도 얌전하여 집에 새로 사온 만화책이나 게임기 같은 것을 자랑하기 위해 구건호나 김민혁을 자기 집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그때 황병철의 엄마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새로웠다.
[너 또 숙제 안하고 만화책 보니? 축대 위에 사는 애들 부르지 말라고 했지? 다 떨어진 농구화 신고 온 아이 아빠는 경비원 한다며? 그런 애들하고 놀지 말라고 했지? 걔들 왔다 가면 집안에 없어지는 것도 있는 것 같아. 기념주화 사논 것도 안 보이는 데 틀림없이 가난한 동네에 사는 걔들이 가져갔을 거야.]
황병철의 엄마는 중학교 교사다. 지금 생각하면 교사라는 사람이 아이들 듣는데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황병철의 엄마는 인천에서 아파트도 있고 연금도 있어 아직도 금테 안경을 끼고 깐깐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황병철 역시 전교 일등을 했고 카이스트를 나와 판교에서 박사급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나무랄 데 없는 집안이지만 황병철이 평범한 월급쟁이일 뿐 더 큰 세계로 나가기엔 그의 사고나 세계관은 울안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
하지만 구건호는 달랐다. 청담동 이회장을 만난후로 전산회계를 배우고 천부적 그의 계수감각에 힘입어 사업가로 또 투자자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구건호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 조원철이나 황병철이처럼 업무에 쫓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경영관련 서적을 많이 읽고 날마다 경제신문을 빠트리지 않고 보아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판단력은 그들을 훨씬 앞서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서울대 정책대학원 원생들은 1시간 특강을 듣고 저녁 8시경 모두 안양 유원지로 몰려가기로 했다.
“저, 5만원씩 추가로 더 걷겠습니다.”
“또 내? 두당 10만 원짜리 갈비인가? 거, 되게 비싸네.”
“그게 아니라 기사들도 있어서 아무래도 5만원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흠, 그렇지. 기사들도 이 기회에 갈비 한 대 뜯으면 좋지.”
이렇게 해서 구건호는 5만원씩 추가로 걷었다.
“혹시 돈이 남으면 제가 갖겠습니다.”
“가져! 총무 월급도 없는데!”
서울대학교의 정문을 빠져나와 미림여고 쪽에서 좌회전하여 호암사쪽 고개 길을 넘어가니 금방 안양 예술공원이 나왔다. 차량 20대가 비상 깜박이를 넣고 구건호가 탄 벤틀리 승용차의 뒤를 따랐다.
예술공원은 밤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뜸했다. 간혹 산책 나온 시민들이 있었지만 사람이 뜸해 차를 아무데나 주차하기도 쉬었다.
음식이 나왔다.
갈비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국회의원 기사가 술이든 종이박스 상자를 가져왔다.
“이게 우리 지역구에서 나오는 전통주입니다. 상표를 잘 봐두었다가 술맛이 좋으면 나중에 선물용으로 많이 구입해 주세요. 저는 이 지역 국회의원 박00입니다.”
“야, 너 여기서도 선거운동 하냐?”
장관 한사람이 어딘가에 열심히 전화를 걸었다.
“어이, 김장관. 자네는 고기 안 굽고 어딜 그렇게 전화해? 부인한테 하나? 이런 모임도 일일이 보고 하나?”
이진우 장관이 핀잔을 주자 김 장관이란 사람은 멋쩍게 웃었다.
“그게 아니고 안양에 사는 국악인이 있어. 내가 잘 아는 사람이야. 여기 오라고 했어.”
“여긴 왜?”
“밥 먹고 흥 한번 돋아야지.”
“허허, 그래?”
갈비가 구워지고 전통주가 돌았다. 한적한 유원지에서 이렇게 떠들고 마시니 다들 유쾌한 모양이었다. 구건호가 이진우 장관에게 술을 한잔 올렸다.
“총무! 사업 잘 하고 있지요?”
“예, 잘 하고 있습니다.”
“금년도 매출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천억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것 밖에 안 돼?”
“장관님이 밀어 주십시오.”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아보니 한복을 입은 국악인 두 사람이 정말 이곳으로 왔다.
김장관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런 중요한 모임에 국악 한마당 안 들을 수 없어서 인간문화재 국악인을 초청했습니다. 평소 저하고 잘 아는 분들입니다. 뜨거운 박수 부탁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났다. 국악인 한사람은 마이크를 잡고 또 한사람은 자리에 앉더니 장구채를 잡았다.
“띵땅, 땅땅.”
장구 소리에 맞추어 국악이 울려 퍼졌다. 프로들이라 그런지 정말 국악을 잘 불렀다. 맛있는 한우 갈비에, 슬슬 넘어가는 전통주에, 국악 가락을 들으며 안양 유원지의 밤은 깊어갔다.
돈 있으면 최고로 좋은 나라가 대한민국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