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
신쥬꾸 호텔의 추억 (1)
(310)
구건호는 날이 덥지만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어디든 에어컨이 빵빵거리니 더운 줄 모르고 지냈다. 책이나 보고 음악이나 듣기에는 모두 좋은 장소지만 김영은이 임신 중이라 접근을 못하니 그게 불만이었다.
“안되겠다. 이 젊은 나이에 가는 세월이 아깝다.”
구건호는 모리에이꼬에게 영문 문자를 보냈다.
[오빠가 내일 오후 일본에 갈게.]
답장이 왔다.
[하기휴가를 받아서 삿뽀로에 가려고 했지만 오빠가 온다니 기다리겠습니다.]
구건호는 모리에이꼬를 만난 지가 상당히 오래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 가면 생활비라도 좀 주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건호는 급여 통장을 조회해 보았다. 매월 3500만원씩 들어오는 급여는 2억이 조금 넘게 쌓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3억이 넘어갔다.
[자주 못 만나니까 천만 원만 주고 올까? 지난번에 삿뽀로 갈 때 많이 주었으니 이번엔 500만원만 줄까? 그런데 김영은에게는 생활비를 통 못주었네. 영은이는 나에게 생활비 달라는 소리를 한 번도 안하네. 서울대 병원 의사라 돈을 잘 벌어서 그런가? 일본 갔다 오면 영은이에게도 좀 주자.]
[영은이는 내가 생활비 갖다 주면 KOAF 같은 국제 의료단체에 기부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어. 어떻게 보면 돈 욕심은 전혀 없는 사람같이 보여.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비싼 돈 주고 산 샤넬 백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사용하지도 않으니 말이야.]
[일본에 갔다 오면서 면세점에서 화장품이나 사다줄까? 아니야. 그럼 일본 갔다 왔다고 지난번처럼 또 이상한 행동을 할지 몰라. 이번엔 일본 갔다온 걸 감출까?]
어쨌든 구건호는 시원한 사장실에 앉아 모리에이꼬를 만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영은이 몰래 숨겨 논 여인이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영은이가 임신했는데.... 영은이 한테 미안한데. 가만있자. 모리에이꼬도 임신했다고 그러면 어쩌지? 익! 그건 안 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도 모리에이꼬의 도톰한 입술만 생각하면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모빌의 송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A전자 당진공장엔 시제품 합격이라 생산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내일 물품 공급계약서( Contract of goods supply)를 작성하기로 하였습니다.”
“계약서는 공증하셔야 합니다.”
“요청했습니다. 당진에 법원이 없어 서산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서산에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이 있습니다. 당진에서 멀진 않습니다.”
“물품 공급계약서 공증은 갑을 양쪽이 다 가야 되니까 거기 위임받은 직원하고 같이 가야 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산 체제에 들어가면 기계장비도 더 늘리고 생산직 직원도 더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 그건 송사장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공증 끝나고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모리 에이꼬를 만나는 날이 되었다.
구건호는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동경 다이칸 야마의 맨션으로 갔다.
“어휴, 그런데 왜 이렇게 더워. 동경은 서울보다 더 더운 것 같네.”
구건호는 땀을 연신 훔쳐가며 맨션으로 올라갔다. 분홍색 팔 없는 티셔츠에 짧은 바지를 입은 모리에이꼬가 뛰어 나왔다.
“에이꼬!”
“오빠!”
구건호가 에이꼬의 두툼한 입술에 입을 쪽 맞추었다.
“오빠, 덥지? 땀 닦아.“
모리에이꼬는 선풍기를 구건호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넓은 곳에 있다 온 구건호는 25평짜리 에어컨도 없는 맨션이 답답했다.
“이 집에... 에어컨이 없었나?”
“에어컨 없어도 돼요. 혼자 있는 데요 뭘. 공연이 있으면 집에 못 들어올 때도 많아요.”
“흠, 그래도 에어컨이 있어야 할 것 같구나. 에어컨 하나 사라. 돈 주고 갈게.”
“내년에 살게요. 여름이 중반인데 지금 사면 돈이 아까워요.”
구건호는 샤워라도 하고 싶었는데 여기서 하기는 싫었다. 차라리 호텔을 가고 싶었다.
“어디 수영장 있는 호텔 없나?”
“에이꼬, 수영장 있는 호텔이 어디 있지? 뉴오따니는 정원만 좋지, 내가 수영장을 못 본 것 같아.”
“잘 모르겠는데요? 여기 좋잖아요?”
구건호는 호텔 같은 것은 아카사카의 최지연 사장이 잘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걸었다.
“최사장님입니까?”
“어머, 구사장님. 더운데 잘 지내시죠?”
“지금 동경에 와 있습니다.”
“그래요? 어디에요? 뉴오따니에요?”
“아니요. 모리에이꼬의 맨션에 와 있습니다.”
“그래요? 호호. 사모님이 임신 중인 모양이네요.”
“쪽집게네요. 그런데 에이꼬도 그러면 어쩌지요?”
구건호는 슬쩍 에이꼬의 눈치를 보았다. 에이꼬는 구건호가 빠른 한국말로 통화를 하므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깔깔깔.”
이번에는 최지연 사장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렇게 순진하시기는! 에이꼬는 게이샤에요. 지온에서 춤을 추는 게이샤이기는 하지만 게이샤의 세계에서는 임신은 치명적인 위험이에요. 그런 것 교육 안 받았을 것 같아요? 아마 마마상 세가와 준꼬한테도 여러 번 배웠을 겁니다.”
에이꼬는 전화내용이 길어지자 내용도 알 수 없어서 주방으로 가 과일을 깎았다.
“그럼 피임약이라도 먹는다는 말씀입니까?”
“방법이야 그것까지는 내가 잘 모르지만 피임은 철저히 합니다. 조금 나이 들면 아예 수술까지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흠, 그래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동경 시내에 수영장이 있는 호텔이 있습니까?”
“교통이 편리한데는 신쥬꾸역 옆에 있는 게이오 플라자 호텔로 많이 가요. 거기 7층에 스카이 풀이 있어요.”
“거기라도 가야지 안 되겠네요. 여긴 너무 더워요.”
“어머? 거긴 에이컨 없어요?”
“와서 보니 없네요. 선풍기 한 대만 돌아가네요.”
“어머, 구사장님, 너무 하시다. 덜렁 집만 사주고 에어컨도 없으면 어떡해요. 구사장님처럼 강남 큰손으로 소문나신 분이 애인 집에 에어컨도 안 놔주고 산다면 사람들이 욕해요.”
“그렇지 않아도 당장 사주고 갈 겁니다.”
구건호는 전화를 끊고 에이꼬를 불렀다.
“가자! 신쥬꾸역으로 가자!”
“신쥬꾸? 거긴 왜요?”
“거기에 있는 게이오 플라자 호텔에 수영장이 있단다.”
“저, 수영복 없어요.”
“하나, 사줄게. 나도 없어. 가자!”
“참외 들고 가세요.”
구건호는 인터넷에서 게이오 플라자 호텔을 검색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얼른 스마트폰을 에이꼬에게 넘겨주었다.
“방 있냐고 물어봐!”
“아끼베야 아리마스까?(빈방 있습니까?)”
“아리마셍(없습니다.)”
“없다는 데요?”
“그럼 스위트 룸 있냐고 물어봐.”
“소레데와 스위또 룸 아리마스까?(그럼 스위트 룸은 있습니까)?”
“아리마스(있습니다).”
에이꼬는 폰을 손으로 막고 구건호에게 말햇다.
“스위트룸은 있답니다.”
“그럼 이틀만 예약해줘.”
구건호는 신쥬꾸에 있는 게이오 플라쟈 호텔로 왔다. 스위트룸이 있는 VIP층에는 키 카드를 사용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구건호는 샵에서 산 수영복을 갈아입고 선 그라스를 끼었다. 모리에이꼬와 함께 있는 장면을 혹시라도 아는 한국 관광객이 있으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수영할 줄 알아?”
“못해. 어릴 때 삿뽀로에서 여름이면 수영장엘 가고 했었는데 잘 못해.”
그건 구건호도 마찬가지였다. 수영장은 언제나 만원이어서 개헤엄 밖에 할 줄을 몰랐다. 인천의 작약도에 가서도 놀기도 했지만 정식으로 배운 솜씨는 아니었다. 그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나왔다.
그래도 수영을 하니 시원하고 좋았다. 수영장에선 옆의 큰 건물들이 올려다 보였다. 에이꼬 역시 수영을 못해 물속에서 텀벙거리다 나왔다. 머리카락이 전부 몸과 얼굴에 달라붙었다. 에이꼬는 더욱 요염하게 보였다. 한 마리의 인어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우, 기레이(예쁘다)”
호텔에 온 사람들은 에이꼬를 보고 예쁘다는 소리를 연발했다. 간간히 한국말도 들렸다.
“와, 저 일본여자 인물 죽이네. 배우 같은데?”
“몸매도 죽이네.”
한국 관광객들이 이런 소리를 하면 구건호의 기분은 따라서 좋았다. 구건호는 가급적 여기서 한국말을 안했다. 모리에이꼬와 대화를 할 때도 언제나 짧은 반 토막 일본어를 사용했다. 구건호는 여기서 보는 한국인들은 그래도 한국에선 중산층 이상일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구건호와 에이꼬는 20층에 있는 객실 스위트룸으로 올라왔다.
“에이꼬 먼저 샤워해.”
“오빠 먼저 해요.”
“에이꼬가 샤워해야 목욕탕에서 향내가 나.”
에이꼬가 먼저 샤워를 했다.
에이꼬는 샤워 후 호텔용 흰색 유카타를 걸치고 나왔다. 미소를 짓는 흰 피부의 에이꼬 얼굴에 구건호는 자기의 입을 맞추기가 오히려 불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 맞추기를 포기하고 구건호가 옷을 벗었다.
“나도 샤워하고 나올게.”
구건호는 샤워를 했다. 시원한 물줄기가 머리에서부터 발 줄기까지 흘러 내렸다. 구건호는 양치질까지 했다. 온 몸에 비누질을 하고난 구건호는 다시 샤워를 하며 비누 거품을 닦아냈다. 모든 오염물질이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구건호는 자기의 수건을 쓸까 하다가 방금 에이꼬가 자기 몸을 닦고 걸어놓은 수건을 집었다. 에이꼬가 썼던 수선은 물기에 젖어있었다. 구건호는 에이꼬가 방금 썼던 수건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에이꼬가 썼던 수건으로 내 몸을 닦자.”
구건호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구건호 역시 흰색 유카타을 입고 나왔다.
“나, 방금 에이꼬가 썼던 수건으로 몸을 닦았어.”
“에이! 더러운데.”
“”깨끗하던데? 에이꼬가 썼던 거라.“
에이꼬가 미소를 지었다. 에이꼬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에이꼬는 벌써 화장을 했는지 얼굴에서 화장품 냄새가 났다.
구건호는 냉장고 안에서 아사히 캔 맥주를 꺼냈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에이꼬도 같이 창밖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목욕하고 나서 마시는 맥주는 일품이다.”
“네, 정말 시원해요.”
구건호는 정말 행복햇다. 김영은은 친구 같고 동지 같지만, 모리에이꼬는 한 떨기 꽃 그 자체였다.
구건호는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모리에이꼬를 힘껏 껴 앉으며 침대에 눕혔다.
룸에서 두 시간이나 놀던 구건호와 모리에이꼬는 밖으로 나왔다.
“밤 9시가 넘었네. 저녁도 안 먹었으니 배고프지?”
“응, 고파.”
구건호와 모리에이꼬는 신쥬꾸의 화려한 거리를 걸었다. 밤이라 그런지 거리는 더 화려했다. 백화점들은 문을 닫았으나 레스토랑이나 술집들은 지금이 한창이었다.
구건호와 모리에이꼬는 길가의 식당에 들려 스시에 사케까지 걸치고 신쥬쿠 거리를 걸었다.
“오빠, 내일 가?”
“아니, 모레 가. 내일도 여기에 함께 있자. 지금은 백화점들이 모두 문 닫았으니 내가 내일 예쁜 옷 사줄게.”
“오빠, 좀 천천히 가.”
구건호는 에이꼬와 팔짱을 끼고 걸었다. 구건호는 평상시 걸음이 빨랐다. 그래서 팔짱을 낀 에이꼬는 뛰는 것처럼 걸어야 했다.
“저기, 저 집에 가서 한잔하고 가자. 오픈 시간이 내일 아침 5시까지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저 집? 시로키야(白木屋)?”
“그래, 시로키야!”
구건호와 에이꼬는 시로키야라는 간판이 붙은 술집을 들어갔다. 맥주와 꼬치안주를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