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
물품 공급 확약서 (3)
(309)
구건호는 오전엔 신사동 빌딩에 있다가 오후에 직산의 지에이치 모빌 공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중국으로 간 문재식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중국 공상은행 안당시 지점의 안당 객운 유한공사의 계좌번호였다. 그리고 바로 전화도 받았다.
“구사장? 방금 안당시 객운공사의 계좌번호 보냈는데 받았지?”
“받았어.”
“합자사 출자금 송금은 거기로 해줘.”
“알았다.“
“오늘 안당시 객운공사 본사에 첫 출근하여 여기 간부들과 상견례를 했어.”
“그래? 통역과 같이 갔지?”
“지금 같이 있어. 김민혁이가 상해로 데리고 나와 같이 귀주성으로 왔어. 통역 없으면 난 이곳에서 한발자국도 못 나가.”
“잠은 어디서 잤니?”
“난 중국 측에서 호텔을 잡아주었고 조은화는 초대소에서 잤는데 조은화는 어제 방을 아예 얻었어. 방 얻는 값은 내가 줬어. 야찐(보증금) 한국 돈 30만원에 월세 10만 원쯤 해.”
“싼 방이구나. 중국식이겠구나.”
“돈이 안들어 왔기 때문에 합자사는 아직 발족 안 되어있고 현재는 준비위원회만 구성된 상태야. 중국 애들은 준비위원회가 아니고 주비(籌備) 위원회라고 하네. 킥킥, 오늘 중국 측에서 내 명함을 가져왔는데 주비위원회 주임이라는 명함을 가져왔어. 이상해. 킥킥.”
구건호는 주임이라는 소리를 듣자 5년 전에 자기가 양주시의 영세기업 방일가스에 다녔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철물점을 하는 방일가스 사장은 당시 구건호 부르길 구주임이라고 불렀었다. 대리나 계장도 아니고 주임이라고 불러서 이게 무슨 일제 때 직함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웃었던 기억이 있다.
“너 중국에서 주임은 굉장히 높은 직급이다. 우리 말로하면 준비위원회 회장쯤 된다. 중국 중앙당 정치위원회 주임이면 엄청난 직급이다. 그런 줄만 알아라.”
“하하, 알았다. 참, 오늘 보니까 중국 측 통역으로 사회과학원에 다닌다는 조선족 최선생이 나왔었어. 합자사 설립 전까지 주비위원회 회의 때 나온다고 하네.”
“그래? 잘 됐구나.”
“그래서 오늘 저녁에 최선생과 조은화와 나, 이렇게 셋이서 식사를 할 거야.”
“중국 애들 하고는 식사했지?”
“응, 처음에 온 다음날 객운공사 사장과 기획실장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어.”
“교통국장이나 부시장은 안 나왔지?”
“안 나왔어. 내가 물어보니까 구사장이 오면 나온다고 하는걸 보니까 자기들 나름대로 의전 격식이 있는 것 같았어.”
“그래?”
“아직 사무실이나 책상을 배정 받은 건 아니야. 우선은 2, 3일에 한 번씩 회의 참석하고 시내 구경이나 하고 지내라고 했어.”
“그래?”
“내일은 아예 지화쓰(기획실) 직원이 따라붙어 여기 풍경구를 관광시켜주겠다고 했어.”
“돈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럴 거다. 용의주도한 중국 애들은 돈 들어오는 거 보고나서 한 단계씩 일을 하는 애들이니까 그럴 거다.”
“흠, 그런 것 같아.”
“관광시켜준다면 관광이나 실컷 해라.”
“하하, 알았다.”
“내일 우선 준비금 5만 달러를 보낼 예정이다. 중국에서 인출은 2, 3일 후에나 될지 모르겠다. 이쪽에서 돈 보낸 송금 영수증은 중방(中方: 중국측)측 팩스로 보내줄 테니까 나중에 중방 측 팩스번호나 문자 보내다오.”
“알았다. 나는 여기 처음에 와서 중국 애들이 한방(韓方), 중방(中方)이라는 소리를 많이 해서 무슨 한약재 이름인가 했더니 중국 측, 한국 측을 그렇게 이야기 하더군. 킥킥.”
“많이 배워간다. 하하.”
구건호는 곤산시에서 금계산업단지 합자를 할 때의 자기가 생각이 났다. 그때 구건호도 중국 사람들이 자꾸 한방(韓方)이라는 표현을 써서 무슨 경동시장의 한약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구건호가 지에이치 모빌에 들렸더니 송사장은 자리에 없었다. 박종석도 없었다. 비서 박희정이 녹차를 갖고 들어오며 말했다.
“오전에 송사장님하고 박종석 이사님은 A전자 당진 공장에 간다고 했습니다. 뭘 자동차에 싣고 가던데요?”
“흠, 그래요? 두 사람만 갔나요?”
“아닙니다. 영업부 서창운 차장님하고 같이 갔습니다.”
구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제품 샘플을 뽑아서 가지고 간 모양이군.”
구건호는 사내전화로 연구소장을 불렀다.
“A전자 수원 연구소를 방문하셨다고요?”
“예, 도면도 5가지를 받아왔습니다.”
“만들 수는 있는 것들이지요?”
“예,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벌써 3가지는 시제품이 나와 성능테스트를 하고 있습니다.”
“흠, 그렇습니까?”
“모두 수출품들이라 자외선이나 태양열 테스트도 합니다. 산과 염기 테스트도 해야 합니다.”
“염기요?”
“수출품들이라 여러 날 배 위에서 요즘 같이 더운 날 열에 견뎌야하고 해풍이나 바다의 염기성에도 노출이 되면 변색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제품이 녹거나 부식이 된다면 선적한 수많은 제품들이 클레임이 걸려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 연구실 직원들은 모두 사직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흠.”
“연구소 직원들의 사직도 문제지만 회사도 큰 데미지를 입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시험도 한 번에 끝내지 않습니다. 1차 실험, 2차 실험, 3차 실험을 해야 합니다.”
“고생들이 많군요. 잘 알겠습니다.”
“모두 완성이 되어 시제품을 수원으로 들고 가 합격을 한다면 사장님께 별도 보고 올리겠습니다.”
“저한테 보고할 필요 없습니다. 송사장님께 보고하시면 됩니다. A전자 수원연구소에서 합격 통지가 오면 실험에 참가했던 연구소 직원들과 회식이라도 한번 하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50대 중반의 독일 뮌헨공대의 박사출신 연구소장은 30대 후반의 구건호에게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나갔다.
구건호는 송사장이나 연구소장이나 다들 성실히 근무하는 자세들이 좋았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엄격했고 회사의 생활에도 엄격했다. 조그만 중소기업에서 야생마처럼 길들여지지 않았던 박종석 이사도 이러한 조직 문화에 서서히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구건호가 디욘코리아에 가서 애덤 캐슬러를 만났다. 사실 애덤 캐슬러는 국내 영업엔 제대로 끼질 못했다. 김전무가 설치고 다니니까 끼어들지 못했지만 중국과 인도에서는 영문리포트가 올라오니까 일거리가 생겨 신이 난 모양이었다.
“하하하, 구사장님. 드디어 딩딩이 한건 했습니다.“
“뭘 한건 했단 말이오?”
“옌청(염성)에 회사를 뚫었답니다.”
“거긴 전에도 조금씩 나간다고 했잖습니까?”
“아닙니다. 이번에 제대로 왕창 한건 했습니다.”
“얼마나 했는데요?”
“월 20톤 했답니다. 그럼 지금 월 70톤씩 나가니까 이제 매월 90톤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럼 년간 매출이 40억이 넘겠네요. 김민혁 사장도 좋아하겠네요.”
“40억은 문제없이 돌파합니다.”
“그렇게 되겠지요. 톤당 450만원에 나가니까 90톤이면 4억 5백, 일 년이면 48억 6천만 원이군요.”
애덤 캐슬러와 통역 채명준이 구건호의 암산 실력에 놀랐다. 자기들이 전자계산기를 두드려보고 방금 구건호가 말한 것이 계산과 그대로 맞자 놀랐다.
[전에도 구사장님 암산 실력에 놀랐는데 이번에도 틀림없네.]
애덤 캐슬러가 구건호에게 웃으며 말했다.
“딩딩에게 뭔가 좀 보상해 주었으면 하는데요. 사장님.”
“어떻게 보상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구건호는 딩딩이 종전처럼 스톡옵션을 받으면 몰라도 디욘코리아의 직원으로 편입이 된 이상 그렇게 하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애덤 캐슬러는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구건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매출이 월 100톤 넘으면 주택 보조금을 지불해 주겠다고 하세요. 당신도 한국에 와서 주택을 공짜로 받고 있으니 딩딩도 주택비 정도는 일부 보조해 주는 것이 좋지 않겟소?”
통역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던 애덤 캐슬러가 얼굴을 활짝 폈다.
“고맙습니다. 보스!”
“인도는 어떻습니까?”
“인도도 월 50톤은 무난히 나갑니다. 지난번에 김전무가 인도 다녀온 후에 S기업과 만동전장, 이지노팩에 물건이 들어가기 시작했답니다. 현재 자기가 공략하고 있는 유럽기업은 아직 성과가 없는 모양입니다.”
“흠, 그래요?”
“어제 100톤을 인도에 보냈습니다.”
“월 50톤 나간다면서요?”
“운임비가 많이 들어 한 번에 나갈 때 많이 보냈습니다.”
‘그럼 두 달치 판매량인가요?“
“그렇습니다.”
“인도 잘 챙기세요. 인도나 중국은 다 대국들입니다. 좁은 한국에서보다도 앞으로 매출이 더욱 커질 시장들입니다. 잘 체크하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한국도 대단히 저력 있고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요?”
“이 작은 나라가 월 600톤을 소화하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더 많이 나가야 해요. 600톤만 판다면 난 미국의 라이먼델 디욘사와 합자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사장님의 배포와 결단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애덤 캐슬러와 통역이 사장실을 나가자 구건호는 김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아산의 디욘코리아에 와 있어. 네 와이프가 옌청을 뚫었다는 보고를 지금 방금 받았어. 축하한다.”
“뭘, 20톤 가지고. 부끄럽게 그러냐. 김전무는 한국에서 월 600톤을 판다는데.”
“김전무야 이 바닥에서 20년 이상을 굴러먹은 사람이지만 네 처는 아니잖아.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이 그 정도의 실적이면 대단한 거지.”
“더 노력해야지.”
“일단 내가 뭔가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 보라고 애덤 캐슬러에게 지시했다.“
“그런 거 바라고 일한 것은 아닐 텐데. 어쨌든 고맙다.”
“잘한 사람은 상을 주고 못한 사람은 벌을 주는 게 사장의 임무 아니냐? 너도 거기서 네 종업원들에게 그렇게 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참 문재식이하고 통화했다. 이제 합자사 주비위원회 설립했단다.”
“안당시는 돈 아직 안 들어갔지?”
“안들어 깄어. 내일쯤 착수금 5만 달러 보낼 예정이야.”
“구사장도 잘 알다시피 돈 들어가 전에는 아마 중국 애들 움직임이 없을 거다.”
“그러겠지. 국제 거래에선 아무래도 돈을 믿지,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니까.”
“참, 그리고 이석호 한테서 연락이 왔었어.”
“심양에 있는 이석호? 잘 있데?“
“나보고 돈을 빌려달라고 전화했어.”
“가게를 3개나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왜 돈을?”
“심양 서탑에 좋은 가게가 나왔는데 같이 하지고 했어. 가게가 비싸니까 같이 1억씩 투자하자고 하던데? 자기는 이미 가게 3채 사놓은 것 때문에 돈이 묶여서 그렇다고 하면서 같이 이익금을 반반씩 나누자고 했어.”
“뭐 하는 가게인데?”
“악세사리 가게 한다고 했어.”
“악세사리?“
“중국 악세사리 뿐만 아니라 한국 악세사리도 갖다놓고 마스크 팩 같은 것 갖다 놓으면 불티나게 팔릴 거라고 하면서 요즘 자꾸 전화가 와.”
“그래서 한다고 했나?”
“솔직히 말해 떼돈을 번다고 해도 그 새끼하고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아. 또 돈도 없고.”
“그래?”
“네가 많이 도와줘서 인천에 아파트도 사고 그랬지만 약간의 융자금도 있고 지금 소주시에 있는 아파트도 융자가 많이 있는데 내가 무슨 여유가 있겠어? 그래서 단호히 거절했지.”
“그랬더니 뭐래?”
“너 같은 놈은 사업할 놈이 아니라고 막 욕을 하더라.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입에 떡을 넣어줘도 먹을 줄도 모르는 빙신 새끼라고 하더라. 병신도 아니고 빙신이라고 했어.”
“한마디 해주지. 그랬어.”
“그래 나는 빙신이다.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 구건호가 왜 너 같은 빙신들과 같이 일하는 줄 모르겠다고 하더라. 하하.”
“하하. 알았다. 이석호가 가끔 그런 코메디를 하는구나.”
“걔는 고등학교 때의 정신연령 그대로인 것 같아.”
“하하,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