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
물품 공급 확약서 (1)
(307)
구건호가 신사동 사옥으로 출근했다.
비서 오연수가 시루떡을 가져왔다.
“웬 시루떡?”
“옥상에서 북카페 하시는 분이 가져왔어요. 우리 사무실 하고 아래층 미디어 사무실 다 돌렸어요.”
“그래?”
“지하실에 기계실하고 정반장님 계신 곳도 다 돌렸어요.”
“뭐, 좋은 일 있었나?”
구건호는 짐짓 모르는 채 했다.
“그런가 봐요.”
구건호는 오래간만에 옥상엘 올라가 보았다.
옥상은 서울시의 옥상 녹화사업 지원으로 새로 단장을 한 후로는 빌딩 입주기업의 젊은 사람들이 자주 올라왔다. 북카페라 책을 보는 것 보다는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북카페의 매출은 제법 짭짤했다. 수입은 전액 지에이치 미디어의 법인 통장으로 들어갔다.
아침이라 그런지 북 카페의 손님은 없었다. 구건호보다 어린 30세 전후의 입주기업 사원 두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카페에 있는 문재식의 처는 청소를 하고 있었다.
문재식의 처는 구건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웃으면서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떡 잘 먹었습니다.”
문재식의 처는 전 같으면 고개를 숙이고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 고개를 들고 웃기까지 했다. 얼굴의 용모도 많이 살아난 듯 했다. 전과 달리 얼굴에 윤기가 있었다. 경제의 힘은 이렇게 사람의 용모까지 변화시키고 있었다.
“결혼식을 위해서 구사장님이 뒤에서 많이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천만에요. 도와준 것 없습니다.”
“더구나 구사장님이 부부 동반하여 오셨다고 해서 감사했습니다.”
“당연히 가야지요. 참, 문사장은 내일 출발하는 가요?”
“그렇습니다.”
“제수씨도 2, 3개월 후에 출발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중국 가시게 되면 불편한 게 많으실 겁니다. 언어도 틀리고 음식과 기후도 틀리고 어려움이 많겠지만 또 재미있을 때도 있을 겁니다.”
“각오해야지요.”
“그럼 해산은 중국 가서 하시겠네요. 거기 의료시설이 어쩔라나 모르겠네요. 워낙 서부지역 지방도시라서요.”
“중국에 있는 제 친구가 알아보니 거기 외국인을 위한 고급 병원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호, 그래요?”
구건호는 문재식의 처가 시를 썼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래서 그런지 문재식의 처가 지성도 갖춘 여성임을 다시 인식했다. 둘이 함께 중국에 가면 성공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문사장도 일을 잘하고 또 제수씨도 북카페를 야물게 운영하시는걸 보니 중국서 크게 성공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호호.”
문재식의 처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구건호가 사장실로 다시 내려와 시루떡 한쪽을 손으로 떼어 먹고 있는데 신사장이 올라왔다.
“구사장님 참 바쁜 모양이네요. 얼굴 뵙기 힘듭니다.”
“요즘 그런 일이 좀 있었습니다.”
“코스프레 잡지는 두 번째 찍었습니다. 8월호가 나왔습니다.”
“아니, 8월 달도 아닌데 나왔습니까?”
“잡지는 미리 나옵니다.”
“그럼 7월 달 것은 많이 나갔습니까?”
“3,500부 나갔습니다. 잡지는 그만하면 대 성공입니다.”
“그래요?”
“8월 달 것은 요시타카 선생의 사진 작품도 많이 들어가고 부록으로 코스프레 그림엽서도 증정합니다. 우리가 발행하고 있는 아마존의 세계사 만화 시리즈도 그 잡지에 전면 칼라 광고도 때렸습니다. 돈 안들이고 광고를 하니 좋잖아요? 호호호.”
“아이들이 비싼 책 사 볼가요?”
“왜요. 부모들이 삽니다. 광고보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세계역사라도 알게 하려고 사줍니다.”
‘흠, 그런가요?“
“구사장님은 어릴 때 부모님이 교양만화 같은 것 사주지 않았나요?”
“우리 부모님이요? 먹고살기 바빠서 그럴 여유도 없었습니다.”
“지금 아래층 갤러리는 문 닫았던데요? 전시회 같은 것 또 없습니까?”
“하기 휴가철이잖아요. 찬바람 돌면 실험 작가 3인 전을 할 예정입니다. 설치미술도 선보입니다.”
“설치미술이요?”
“개성적 진열방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겁니다.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하여 억압된 여성의 성문화를 새로 인식케 하려는 전시회입니다.”
구건호는 오브제가 뭐냐고 물으려다 그만 두었다. 신사장이 그것도 모르냐고 하면서 무식하다고 할까봐 그랬다.
“그럼 3명 작가는 모두 여성입니까?”
“그렇습니다. 페미니즘 성향이 강한 여성 작가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작가들 작품은 누가 사가나요?”
“살수도 있고 안살수도 있겠지요.”
“나는 통 헷갈려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전시회가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신사장은 녹차를 한잔 마시고 말했다.
“지난번 문사장님 결혼식에 영은이랑 부부 동반해서 오니까 참 보기 좋던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참 식사를 하다 보니 두 사람이 없어졌더라고요.”
“하하, 식사 얼른하고 인천 연안부두에 갔었습니다.”
“어쩐지.”
“참, 영은이가 임신을 했다는군요.”
‘오마나! 정말이에요?“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2개월째랍니다.”
“영은이 고 애기 같은 것이 애기를 낳네! 어쩜, 축하드려요. 구사장님.”
“고맙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오늘 점심 사세요.”
“하하. 사지요. 이따 12시에 건너편 스시집으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요시타카 선생과 함께 가지요.”
구건호가 시원한 사장실에서 조간신문 두 가지를 보고나니 12시가 가까워 왔다.
지에이치 모빌의 송장환사장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A전자 수원 연구소장을 만나고 왔습니다.”
“아, 만났습니까?”
“도면 6가지를 받아왔습니다.”
“6가지나요?”
“도면은 6가지이지만 전부 비슷비슷한 제품들입니다. 크기나 길이만 조금씩 다른 것들입니다. 특수 링 종류입니다.”
“우레탄 계열입니까?”
“아닙니다. 엘라스토머 계열입니다.”
“수량은 얼마나 된답니까?”
“수량이나 가격은 모르겠답니다. 자기들은 연구소이기 때문에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는 만 확인하겠답니다.”
“흠, 그래요?”
“수량이나 가격은 나중에 당진 공장이나 창원 공장하고 상의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시제품까지 만들어서 가져오면 자기들이 테스트 하겠다는 이야기이군요.”
“그렇습니다.“
“금형 값은 누가 지불하는 겁니까?”
“자기들이 준다고 했습니다.“
“흠, 그래요? 우리 연구소 오상무하고 같이 갔었지요?”
“그렇습니다.”
“오상무는 뭐라고 그럽니까?”
“어려운 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A전자 연구소장이 우리 오상무를 보고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자동차 분야의 뮌헨공대 박사 출신들과 한번 접촉해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연구과제에 상호 보완적인 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잘 됐군요.”
“그럼 점심 먹고 오후에 바로 당진공장으로 출발하겠습니다. 갔다 와서 보고 또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송사장의 전화를 받느라고 12시가 조금 넘어 빌딩입구로 내려왔다. 입구에는 신사장과 요시타카 선생이 벌써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전화가 걸려 와서 늦었습니다.”
“건너편 스시 집으로 가신다고 했지요?”
“예 그렇습니다.
세 사람은 길을 건너 논현동 방향 골목에 있는 스시집으로 갔다. 요시타카 선생이 말했다.
“그래도 여기 오면 일본에 온 기분이 납니다.”
“그렇습니까? 많이 드십시오.”
스시는 광어회 초밥부터 나왔다. 와사비 간장에 찍어먹는 초밥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스시를 먹으며 구건호가 요시타카 선생에게 물었다.
“요시타카 선생님은 동경 아카사카의 최지연 사장님하고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안지 20년도 넘었습니다. 제가 한국 특파원으로 발령 난 날 한국 체험을 하려고 그 집엘 들렸었습니다. 그때 그 집도 개업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랬나요?”
“그 집엘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요?”
“최지연 사장의 엄청난 미모를 보고 놀랐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많이 망가졌지만 20년전에는 출중한 인물로 사람들도 많이 꼬였습니다.”
옆에 있던 신사장이 물었다.
“최지연 사장이 누구에요?”
“동경에서 음식점 사장하는 한국여성이 한분 계십니다. 신사장님하고 비슷한 연배일 겁니다.”
요시타카 선생은 김말이 초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내가 동경에서 있을 때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그 집엘 자주 들렸었습니다. 내가 있었던 신문사에 그 집을 홍보하는 기사도 써주곤 해서 각별한 사이가 되었었지요.”
구건호는 동경 이야기가 나오자 모리 에이꼬가 생각났다.
[지금은 더우니까 공연이 뜸하겠지. 뭘하고 있을까? 찬바람이나 불면 아끼마츠리 (가을축제)에 나가려나?]
구건호가 뭔가를 생각하자 신사장이 야채 샐러드 접시를 밀면서 말했다.
“무얼 생각하세요? 음식 안 들고.”
“예? 아 예. 들겠습니다.”
구건호는 요시타카 선생에게 마마상 세가와 준꼬를 아느냐고 물으려다 그만 두었다. 잘못하면 모리 에이꼬와의 관계를 눈치 챌 것 같아서였다.
요시타카 선생이 새우 초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참, 사카다 이쿠조 선생이 구사장님이나 여기계신 신사장님이 오시면 대접을 하고 싶답니다. 이번 전시회 작품대금을 수취하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구건호는 점심을 먹고 사장실에서 커피를 마시곤 잠이 들었다. 비서 오연수가 빈 커피 잔을 치우러 사장실에 들어왔을 때 구건호의 목은 옆으로 꺾어지고 있었다. 오연수는 살금살금 뒷걸음으로 사장실을 나갔다.
30분쯤 신나게 잠을 자고 난 구건호는 목이 말랐다. 책상 밑에 있는 비타500 음료수를 찾았다.
언젠가 강이사가 입주회사에서 보낸 거라고 하면서 한 박스를 준적이 있었다. 구건호는 비타 500 한 병을 꺼내 마셨다.
“이 비타 500 종이박스에는 5만 원짜리를 담으면 얼마나 들어갈까?”
구건호는 비타500 박스만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구건호는 인천 구월동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뭐해?”
“연속극 재방송 보고 있다.”
“영은이가 임신을 한 모양이에요.”
“영은이? 영은이가 누구지?”
“누구긴 누구에요. 엄마 며느리지.”
“네 처가 임신했단 말이냐?”
“그런가 봐요. 초음파 검사하니까 임신 2개월 정도 되는 것 같다고 산부인과 의사가 말했데요.”
“그으래? 드디어 들어섰구나. 하하.”
“아직 입덧을 하거나 그러진 않은 모양이에요.”
“곧 할 거다. 잘해줘라. 여자는 힘들 때 누가 뭐래도 남편이 옆에 있어주면 좋다.”
“그래요?”
“네가 잘해 줘라. 특별히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사주고 힘든 일은 절대 시키지 마라. 특히 차 탈 때 조심하라고 일러라.”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요.”
‘아니야. 옆에서 도와줘야 돼. 하이고 이제 손주를 보게 될 라는 모양이다.“
“그럼 그렇게 알고 계세요. 저 바쁘니 전화 끊어요.”
30분도 안돼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처 임신했다며?”
“소식도 빠르네. 초음파 결과가 그렇다는 거야. 아직은 몰라.”
“초음파 결과면 다 나온 거다. 드디어 네 처가 육아맘으로 당첨 됐구나.”
“하하, 그런가.”
“내가 축하한다고 그러고 맘스팩 하나 사서 보낼게.”
“맘스팩? 맘스팩이 뭐야?”
“육아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물품이 든 종합상자야. 그 안에 물티슈도 있고 타올도 있고 미역도 있어. 태교 동화집까지 있어.”
“그런 걸 만들어 파는구나. 별걸 다 파네. 상술이 날로 진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