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양평 나들이 (1)
(281)
신정숙 사장이 마츠이 요시타카 선생과 함께 구건호가 있는 지에이치 개발 사장실로 왔다.
“오늘은 아침부터 두 분이 올라오셨네요.”
“이것 한번 보세요.”
“이게 뭡니까?‘
“잡지 발행 기획서에요.”
“아, 코스프레 잡지 말입니까?”
“매체이름과 제작진, 분량, 대상 독자층 등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요시타카 선생님이 만드셨습니다.”
“전 봐도 잘 모릅니다.”
“잡지 제목이름은 코스튬코리아로 하고 ISBN신청하려고 합니다.”
“두 분이 머리 맞대고 하셨다면 잘 기획하셨겠지요. 잘 만들어보세요.”
구건호는 서류를 대강 보는 척 하고 신정숙 사장에게 돌려주었다.
“저,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하신 드라마 제작은 어떻게 진전이 있습니까?”
“아니요. 내가 상해를 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잡지 발행은 구사장님도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제작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건 알아서 하세요.”
“저희 미디어 홈페이지에 코스프레 대회 참가 했던 아이들이 잡지 언제 나오냐고 벌써부터 성화입니다.”
“하하, 그래요? 조짐이 괜찮네요.”
신사장과 요시타카 선생이 나가고 난후 구건호는 절강대학의 왕지엔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여, 구건호 오래간만이다. 네 목소리 들은 지도 오래된다.”
“나도 네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했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귀주성 안당시와 터미널 사업 추진한다고 그랬나?”
“지난번에 거기 가면서 오다가 너한테 들릴까 하다가 못했어.”
“터미널 사업도 캐시카우(Cash Cow)사업이야. 여유자금 있으면 해도 좋아. 대박은 아니라도 은행 이자보다는 훨씬 나아.”
“글쎄. 투자자금이 너무 많아 생각중이다.”
“한국도 터미널 망했다는 소리 들어봤어? 없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지난번 내가 한국에 세미나 참석하러 갔을 때 한국 터미널 들려봤어. 강남 고속버스터미널하고 남서울터미널인가 어딘가 들러봤는데 땅값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 같더라.”
“안당시야 내륙 깊숙이 있는 지방 도시인데 그렇게 땅값이 오르겠어?”
“그런 공공시설이 들어오면 무조건 올라가게 되어있어. 사업 감각은 나 같은 학삐리보다 훨씬 더 동물적 감각이 있는 분이 왜 이러실까?”
“너 상해는 잘 안 오니? 리스캉하고 가끔 만나니?”
“아무래도 상해와 항주는 거리가 떨어져있어 자주는 못 만나. 상해에서 국제행사가 있거나 그쪽에 있는 대학들이 나를 특강에 초청했을 때나 만나.”
“리스캉이 드라마 제작사에 투자를 한번 해 보라고 하네.”
“드라마 제작? 거긴 중국의 거대한 자본들이 투자를 하는데 외자까지 필요한가?”
“거대자본?”
“중국의 거대자본들이 드라마제작이 황금시장이라고 해서 관심들이 많아. 투자액도 장난이 아니야.”
“그래?”
“사극 같은 건 제작비도 엄청난데 큰손들이 팍팍 질러. 중국 사극 봐라. 전쟁 씬에 엑스트라 나오는 거 보면 거리낌 없이. 수천 명씩 동원하잖아.”
“하긴 그런 것 같아. 중국 스케일은 장난이 아니지. 편집기술이 좀 떨어지는 것 같지만 말이야.“
“편집기술 뿐만이 아니야. 당에서 너무 검열도 까다롭고 지나친 중화주의를 내세워 나도 그게 못마땅해.”
“유능한 젊은 제작자들을 밀어달라고 하는데 리스캉을 한번 만날까 그래.”
“그럼 이달 17일 같이 만나자. 내가 그날 상해 복단대 특강이 있어. 그거 끝나고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 너 소주에 있는 합자사도 들릴 겸 해서 말이야.”
“그럴까?”
“꼭 와. 솔직히 말해 난 구건호가 보고 싶어도 한국 가기 힘들어. 학삐리가 무슨 돈이 있냐? 법인카드가 있냐? 그러니 여러 개 회사 가지고 있는 구사장이 오는 게 좋지.”
금요일 저녁 이불속에서 김영은이 양평을 가자고 하였다.
“양평? 최 화가님한테?”
“전에는 내가 일요일이면 자주 갔는데 결혼 후에는 자주 못 갔어. 이모가 자식도 없는데 너무 외로울 것 같아.”
‘외로운 건 신림동 아버님이 더할 것 같은데?“
“신림동 아버님은 친구도 많고 취미활동도 많이 해. 사진동호회나 테니스동호회, 약초동호회 같은 데서도 활동해 그래도 좀 나.”
“그러셔?”
“또 서울 사시니까 친구들이 가깝게 살아 자주 만나서 술도 한잔씩하고 그래.”
“흠, 다행이네.”
“하지만 이모님은 양평에 사시니까 서울에 있는 친구들과도 잘 못 만나. 아무래도 서울과 달라 가까운 거리에 친구도 없잖아. 오로지 그림만 그리는데 한번 들여다는 봐야겠지.”
“이모님은 왜 결혼 안 하셨데?”
“미술과 결혼 하셨데.”
“허허, 거참. 말년에 자식도 없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도 혼자 사시니까 아직도 젊어 보이잖아. 몸매도 처녀 같잖아. 누가 50이 가까운 아줌마로 보겠어.”
“그럼 내일 가볼까?”
“마트에 가서 식료품이나 사가지고 가면 돼.”
이날 저녁 구건호는 김영은과 성관계를 가졌다.
김영은은 결혼 초기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이불 속에서 언제나 나무토막같이 뻣뻣했는데 요즈음은 제법 팔로 구건호의 목을 감싸 안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분이 좋으면 먼저 뽀뽀도 해주곤 하였다. 이렇게 되다보니 구건호도 모리에이꼬나 설빙의 생각이 덜 나게 되었다.
구건호는 마트에서 산 커피세트와 과일 등을 랜드로버에 실었다. 김영은은 등산용 가방에 뭔가를 잔뜩 넣고 차에 탔다.
“그건 다 뭐야? 가방이 왜 그렇게 두꺼워?”
“장 종류 담았어.”
“장?”
“어제 이모님과 통화했어. 올 때 뭘 사가면 되느냐고 하니까 간장이나 사다달라고 해서 간장 실었어.”
“간장만 담았나?. 가방이 두꺼운걸 보니까 다른 것도 담은 것 같은데?”
“응, 고추장하고 된장하고 식용유도 담았어.”
“어이구 가방이 완전히 돌덩이처럼 무겁네. 이걸 마트에서 들고 왔어? 나보고 들어달라고 하지.”
“오빠가 먼저 나간 걸 어떡해?”
구건호는 김영은과 함께 오래간만에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구건호가 음악을 틀었다. 옛날에 털털거리는 폐차 직전의 차를 몰고 포천과 양주에서 공돌이로 출근할 때 부르던 보헤미안 랩소디가 아니었다. 양파의 노래를 틀고 서영은과 왁스의 노래를 틀었다.
“난, 조용한 음악이 좋아.”
김영은은 구건호가 잘 모르는 클라식 음악을 틀었다. 김영은은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구건호는 김영은을 위해서 성능 좋은 핸드폰을 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의 집에 도착하였다. 이모 대신 강아지가 먼저 뛰어나와 왈왈대고 짖었다. 강아지는 구건호를 보고 유난히 짖어댔다.
“이놈은 날 보고 악착같이 쫓아다니며 짖네.”
이모가 웃으면서 구건호에게 멸치를 한 웅큼 쥐어 주었다. 구건호가 멸치를 던져주자 강아지가 조용해졌다.
[역시 개를 다루려면 몽둥이와 먹이야.]
이런 생각을 하다가 구건호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지노팩 회장 얼굴이 떠오르고 충남지역 사장단 회의에서본 얼굴에 개기름 번들번들한 몇몇 사장들 얼굴이 생각났다.
[이들은 종업원들을 꼭 개 다루듯이 할 거야. 몽둥이와 먹이로 말이야. 그들은 종업원들이 개로 보이니까 그렇게 갑질을 하겠지.]
구건호는 지금 한말에 개 대신 사람을 대입시켜 보았다.
[역시 사람을 다루려면 몽둥이와 먹이야.]
구건호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을 다루려면 칭찬과 보상이야.]
구건호는 이렇게 말을 바꾸어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청담동 이회장과 괴산에 잇는 박도사가 옆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람을 다루려면 몽둥이와 먹이가 아니었다. 몽둥이와 먹이는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강아지는 사람을 물게 되어있다.
[지금 갑질한 회장님들에게 OUT을 외치는 건 외부 인사들이 아니라 종업원들이다. 종업원들을 개나 돼지가 아닌 인간으로 대접해 주어야 회장이나 사장이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구건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먹이를 더 달라는 강아지의 눈을 쳐다보았다.
“구서방! 왔으면 윗옷 벗고 이리와요!”
최 화가는 이제 구건호를 구사장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조카사위라고 구서방이라고 불렀다. “구서방? 조금 이상한데?”
그 말에 김영은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어떻고?”
“뭘, 어때?”
“코스프레 대회 하는 날 오빠네 회사 직원들이 날 사모님이라고 불렀잖아? 아주 이상했어.”
이모가 찐 감자를 내오며 말했다.
“사모님이니까 사모님이라고 하지. 얘는 별 이상한 소리하네.”
“사모님 소리 듣는 순간 내가 굉장히 나이 먹은 아줌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게 다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다. 찐 감자 먹어봐라. 여기서 캔 거다.”
최 화가가 소금을 갖다 주었다. 구건호와 김영은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감자의 껍질을 손으로 벗겨 소금에 찍어 먹었다.
“흠, 맛있는데?”
“아, 황홀해.”
김영은은 눈을 반만 감은 채 정말 황홀한 표정으로 찐 감자를 먹었다.
“물 마셔가며 먹어.”
최 화가가 보리차를 가져왔다. 최 화가는 식탁 의자에 같이 앉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구서방이 신사장 편에 보낸 샤넬 핸드백은 잘 받았어요. 왜 쓸데없이 그런 돈을 썼어요?”
“고마워서 보냈는데 너무 약소합니다.”
“그런 비싼 핸드백은 영은이한테나 사주지 그랬어요?”
“영은이도 사 줬습니다.”
“그래요? 잘하셨어요. 그럼 나도 그 백 잘 사용할게요. 신사장도 사주었다면서요?”
“신사장님도 고맙지요.”
“신사장도 과분한 선물을 받았다고 구서방에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구건호와 최화가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잇던 김영은이 말했다.
“이모! 오늘 내가 사온 선물은 안 고마워?”
“뭘 사왔는데?”
“이거!”
“아휴, 웬 가방이 이렇게 무거워!”
“열어봐!”
“어머나! 간장, 고추장, 된장 다 들었네! 식용유까지 사왔네. 한 달간 내가 마트에 안가도 되겠다. 얘.”
이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이번엔 삶은 국수를 건져내더니 얼음조각이 든 열무김치를 끼얹어 가지고 왔다.
“열무김치 국수에요.”
열무김치 국수 또한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이것도 드셔보세요.”
최 화가는 호박전과 막걸리도 내왔다. 거실에서 화단이 있는 마당을 바라보며 마시는 막걸리 또한 일품이었다. 김영은도 잘 먹었다.
“이 집에만 오면 살찔 것 같네요.”
“이모 얼굴이 좀 나아진 것 같아.”
“그래? 친구가 하나 이곳으로 이사 와서 그런 모양이다.“
“친구?”
“그림 그리는 애는 아니고 저 아래 동네 초입에서 갤러리 해. 차도 팔고 그림도구 같은 것도 팔고 그래.”
“그래? 잘 됐네. 말동무도 되고.”
“요즘 아주 거기 가서 산다. 염난영이라고 너도 알지?”
“염난영? 글쎄 이름은 들어 본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는데.”
“관광회사 다니던 애 있어. 은행에 다녔던 걔 신랑도 이곳에 와서 같이 일해.”
“그런데 이모 발이 많이 부었네.”
‘글쎄. 이거 어제부터 그렇다.“
“신장이 나쁘면 그럴 수 있어. 아니면 운동 부족이던가. 병원에 가봐.”
“그래? 조카가 의사니 좋긴 좋네. 그런 것도 금방 알고. 걱정할 수준은 아니냐?”
“걱정할 수준은 아니야. 혈압이 좀 높아도 그럴 수 있어.”
구건호는 김영은과 함께 사는 한 큰 병 걸릴 염려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