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
모리에이꼬의 눈물 (2)
(260)
구건호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모리에이꼬는 공항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용돈이라도 주고 가려고 했는데 그냥 가버렸네.”
구건호는 돌아가는 항공권 예약이 내일로 되어있어 변경을 시킬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기왕 일본에 온 김에 전 디욘사의 세계적 기술자 사카다 이쿠조씨와 아카사카의 한식당 최지연 사장을 만나 보기로 했다.
“이쿠조씨와 점심 먹고 저녁엔 최사장 집에 가서 꼬리곰탕이나 먹지.”
구건호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10시네.”
구건호는 흩어진 방안을 대충 청소하고 쓰레기도 버려주었다. 침대의 이불도 새로 개어 놓고 다이칸아먀의 맨션을 빠져 나왔다.
구건호는 전철역을 가면서 이쿠조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쿠조상 데스까? 와다꾸시와 강꼬구노 구사쪼상 데스 (한국의 구사장입니다.).”
“오우, 구사쪼상, 시사시부리데스네. (오, 구사장님, 오래간만입니다).”
구건호는 모리에이꼬 때문에 약간의 일본말을 더듬거릴 줄은 알았다.
“여긴 시부야의 다이칸야마입니다. 요꼬하마로 가겠습니다. 점심이나 같이 하시죠.”
“오, 그러십니까? 제가 사는 곳은 요꼬하마의 변두리인 모토마치(元町)입니다. 역으로 마중 나가겠습니다.”
구건호는 이쿠조씨를 만났다.
이쿠조씨는 전보다 더 늙고 등이 더 굽은 것 같지만 아직은 건강해 보였다.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쇳조각 냄새가 났다.
이쿠조씨는 장어구이 집으로 구건호를 안내하였다. 구건호는 요꼬하마 백화점에서 산 술을 한 병 선물로 주면서 말했다.
“건강하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일을 하고 있어 그런 모양입니다.”
“일감은 여전히 있는 모양이네요.”
“전에 거래했던 회사들이 손으로 꼭 깎아야할 금형 의뢰가 간간히 옵니다. 요즘 금형 깎는 기계들 성능도 좋아져 의뢰 물량은 많이 줄었습니다. 많다고 해도 내가 이제 늙어 소화도 못시킵니다.”
“이쿠조 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무라이 장식물은 서울에 있는 신사동 빌딩의 제 사무실에 있습니다. 그 작품을 볼 때마다 항상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고맙습니다. 참, 박종석 이사는 잘 있지요?”
“잘 있습니다. 결혼해서 딸을 낳아 요즘 가정에 아주 충실합니다.”
“오, 그렇습니까? 축하한다고 말씀 전해주십시오.”
식사 후 이쿠조씨는 자기의 집으로 구건호를 안내했다. 이쿠조씨의 집은 전통가옥도 아니고 신식가옥도 아닌 중간형의 단독주택이었다. 마당에는 노란 꽃들이 피어있는 화단이 있었고 화단 옆에 이쿠조씨의 작업장인 창고가 있었다.
이쿠조씨는 작업장을 구경시켜 주었다. 쇳조각이 널브러져 있었고 나무를 깎은 톱밥 같은 것도 있었다.
[웬 톱밥이... 나무도 깎나?]
이쿠조씨는 다다미방에서 차를 내왔다. 이쿠조씨는 무릎을 꿇고 차를 따랐다. 구건호는 무릎을 꿇는 것이 불편하여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편한 대로 앉으시면 됩니다.”
이쿠조씨가 일본 전통 창호지인 화지가 발라진 문을 열었다. 뜰에 있는 노란 꽃들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꽃이 아름답네요.”
“괭이밥과 유채꽃입니다. 들판에 흔하게 있는 걸 심은 것입니다.”
이쿠조씨가 핸드폰을 담는 포장지처럼 생긴 작은 박스 하나를 들고 왔다.
“박종석 이사에게 전해주십시오. 새로 태어난 딸에게 주는 늙은이의 선물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이게 뭡니까?”
“열어보십시오.”
구건호가 열어보았다.
종이박스 안에는 작은 나무상자 하나가 또 들어있었다. 구건호가 나무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어보았다. 나비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
“박제품입니까?”
“제가 만든 겁니다.”
“만들어?”
구건호는 나비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오, 정말 나무로 만든 거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진짜 나비 같을까?”
“나무를 깎는 것은 젊어서부터 심심하면 깎아왔습니다. 쇠만 만지다보니 금(金)의 기운이 강해 목(木)의 기운으로 중화를 시키려고 했지요.”
“그렇습니까?”
“제가 만든걸 보고 요코하마 미술관에서 개인 전시회를 하자고 합니다. 마침 지금 시간도 있고 해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오, 그래요?‘
이쿠조씨는 그러면서 출품작 몇 개를 더 구경시켜 주었다.
“허, 이건 진짜 잠자리 같네.”
이쿠조씨가 쟁반에 가져온 것은 잠자리, 개구리, 참새 같은 것들이었다. 정말 진짜와 같이 만들었고 채색을 입혀놓으니 진짜와 구별이 안갈 정도였다.
“와,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가져온 쟁반에 멸치가 들어있어 구건호가 빼내려하였다.
“쟁반에 멸치가 잘못 들어왔네요.”
멸치를 집어든 순간 구건호는 또 놀랐다.
“힉! 이 멸치도 만든 거네요!”
이쿠조씨는 입을 앙다문 채 미소를 지었다.
이쿠조씨의 방 안에는 여전히 벽에 잇쇼겐메이(一生懸命)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건다는 그의 생활철학이 그대로 목각 조각품에 묻어 나오고 있었다. 다다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카다 이쿠조씨를 보고 구건호는 전설의 일본검객 미야모도 무사시가 연상되었다.
“훌륭하십니다. 요꼬하마 전시회는 언제입니까?”
“6월입니다.”
“그때 한번 보러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팜프렛이 나오면 사쪼상(사장님)께 우송해 드리겠습니다.”
구건호는 6월 달에 미디어의 신정숙 사장과 함께 구경을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구건호는 이쿠조씨와 헤어져 동경 아카사카에 있는 뉴오따니 호텔로 왔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올라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 호텔에서 두 여자와 추억이 있었지.”
유리창에는 모리에이꼬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 설빙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모리에이꼬와 첫 정사가 이곳에서 있었지? 설빙의 손을 잡은 것도 이곳이고.]
구건호는 두 여자를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았다.
[설빙이야 키스만 했지 몸을 섞은 건 아니니까 안 만나도 상관이 없는데 모리에이꼬는 그게 아니란 말이야. 15년이란 나이 차이를 뛰어 넘어 연정이 생겼으니 그게 문제네. 모리에이꼬는 바보같이 22살 짜리가 15살이나 많은 나에게 왜 연정을 품나? 그냥 후견인으로만 알지. 에이, 바보 같은 것.]
창문에 비친 모리에이꼬가 하염없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구건호는 마음이 아팠다.
구건호는 뉴오따니 호텔의 400년된 정원을 거닐었다.
[한때는 이 난간에서 설빙과 함께 연못의 비단잉어를 바라보고 손목을 잡기도 했었지. 설빙은 그 후 연락도 없는 나를 실없는 사람이라 안 여길까? 이 호텔서 만나자는 약속을 내가 지키지 못했는데 설빙도 이제는 나를 포기했겠지?]
구건호는 설빙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익명으로 사는 게 좋아. 유명하니까 얼굴을 가리고 선그라스나 마스크를 하고 다니니 얼마나 불편해. 같이 음식점이나 커피숍 같은데 같이 가기도 힘들고 말이야. 또 촬영한다고 계속 집을 비우고 아무리 영화라고 하지만 남자배우와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는 건 내가 봐주기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구건호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설빙의 무삭제 동영상 같은 건 아예 보지도 않았었다.
구건호는 최지연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건호입니다. 뉴오따니 호텔에 있습니다.”
“어머, 구사장님, 언제 오셨어요?”
“어제 왔었습니다.”
“모리에이꼬는 타이완에 촬영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만나셨어요?”
“어제 만났습니다. 에이꼬는 다시 타이완으로 갔습니다.”
“아, 그러세요? 저녁 안 드셨으면 저희 집 오세요. 저 가게에 나와 있어요.”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구건호는 호텔을 나와 걸어서 최지연 사장이 있는 한정식 집을 찾아갔다.
손님은 아직 뜸했고 최지연 사장은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사장님.”
“벌써 오셨네? 김군아, 손님 방으로 모셔라.”
“아니, 됐습니다. 홀에서 식사하지요. 여기 꼬리곰탕 한 그릇 주세요. 아사히 맥주도 한 병 주시고.”
“알겠습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20대가 맥주와 빈 컵을 먼저 가져다주었다. 최지연 사장이 구건호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왔다.
“사업 잘되시죠?”
“예, 사업은 그런대로 잘 하고 있습니다. 맥주 한잔 하시겠어요?”
“아니, 됐습니다. 저는 영업 때문에 못합니다.”
그러면서 최지연 사장은 구건호의 잔에 맥주를 채워주었다.
“결혼하셨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어떤 소식은 한국보다 더 빠릅니다.”
“대단하십니다.”
“결혼은 잘 하셨어요. 구사장님 나이도 있고 한데 진작 결혼하셨어야죠. 축하합니다.”
“모리에이꼬에게 좀 미안하군요.”
“어차피 모리에이꼬는 결혼 상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후견일 뿐 그 이상의 발전은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미안하군요.”
“그 사이에 정이 들어서 그렇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겁니다. 문제는 모리에이꼬인데 이상하게 모리에이꼬가 구사장님에게 깊은 연정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어제 많이 울더군요.”
“결혼했다고 이야기 하셨습니까?”
“그 이야기는 차마 못했습니다.”
“여자의 육감이란 것이 있습니다. 구사장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랬을 겁니다.”
“흠...”
“게이샤는 후견인이 있어도 나이 차이가 많아 진짜 자기 또래 애인은 따로 사귑니다. 그런데 모리에이꼬는 그러지 않은 것 같더군요. 그 미모에 추근거리는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왜 그랬을 가요? 아저씨 같은 사람을.”
“일단은 구사장님의 매너가 좋아서 그랬을 겁니다. 고약한 후견인들은 자기가 들인 밑천을 뽑으려고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는 경우가 있잖습니까? 또 에이꼬는 일찍 부모를 잃어서 더욱 그랬을 겁니다. 자기가 상상했던 아버지나, 오빠나, 애인 같은 모든 매력을 갖춘 구사장님이 나타나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그런가요?”
“남녀 간의 일이라 제가 중간에 들어서서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겠네요. 시간을 두고 차차 정리하는 방향으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구건호는 아사히 맥주를 한 병 더 시켰다.
“얼마 전 모리에이꼬가 혼자 우리 집에 왔었어요.”
“그랬나요?”
“구사장님이 앉아있는 바로 이 테이블에 앉아 혼자 맥주 2병을 마시고 갔어요. 춤을 추는 아이라 입에 통 술을 대는 아이는 아닌데 이상하게 그 날은 술을 마시더군요. 아마 구사장님이 결혼하던 그 때 쯤일 겁니다.”
구건호는 최지연 사장의 말을 듣기가 괴로웠다.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혹시 에이꼬가 돌아오면 이 돈을 전해주시겠습니까? 생활비 조금 담았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해 드리지요.”
“고맙습니다.”
“사실 에이꼬는 일류 무희라도 손에 쥐는 돈은 별것 없을 겁니다. 물론 구사장님이 사준 집은 있지만 말입니다.‘
“출연료가 있을 것 아닙니까?”
최사장이 옅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춤추는 게이샤 한명을 양성하는데 3억내지 5억원의 돈이 들어갑니다. 기모노 옷값이나 장신구, 화장비 등이 만만치 않습니다. 또 먹여주고 재워 줘야하고 분장사나 운전기사 같은 딸린 식구도 많습니다.”
“흠.”
“제 몫을 할 때쯤 되면 출연료가 들어오는데 기온 측이나 마마상들은 투자한 돈을 회수해야지요. 출연료에서 공제하고 남는 돈이 없어요. 그래서 예술 활동에 도움이 되기 위해 후견인을 두기도 하지요.”
“흠.”
“구사장님은 생활비를 따로 안 주셔도 됩니다. 평생 걸려 장만하지 못하는 맨션 아파트를 사주셨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하지만 주신 이 봉투는 제가 꼭 전해드리지요.”
구건호는 최지연 사장의 음식점을 나왔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 때문인지 모리에이꼬 때문인지 구건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