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신혼 생활 (3)
(252)
구건호는 자기 인생의 멘토인 청담동 이회장을 찾아갔다.
빈손으로 갈수가 없어서 정관장 건강음료를 한 박스 사들고 갔다.
“제 결혼식 때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당연히 가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구사장 결혼식인데 내가 안 갈수 있나? 그런데 신부를 아주 훌륭한 사람을 맞이했더군. 축하해요.”
“박도사님도 함께 와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그 친구 마침 서울에 볼일 보러 왔다가 구사장 이야기 하니까 꼭 와야 한다면서 왔어요.”
“기회 있으면 괴산에 한번 내려가 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하객들이 엄청나게 많이 왔던데? 구사장이 다 인덕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요.”
“하하, 별 말씀을.”
“신행(新行)은 다녀오셨나?‘
“예? 신행요?”
“신혼여행 갔다 왔으면 신랑이나 신부 부모님께 인사하러 가는 것 말이요.”
구건호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 갔었다고 하면 이회장 같은 어른들은 고얀 놈이라고 그럴 것 같아 둘러댔다.
“가, 갔었습니다.”
“그래, 이제 결혼 했으니 건강한 아들 딸 낳고 잘 살도록 해요.“
“고, 고맙습니다.”
구건호는 이회장에게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회장 빌딩을 나오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가 인사를 했다.
“혹시 구사장님 아니십니까?”
자세히 보니 BM엔터테인먼트의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이사였다.
“엔터테인먼트 이사님 아닙니까?”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 빌딩 소유주 이회장님하고는 아주 가까워 가끔 왕래합니다.”
“아, 예. 그러십니까? 저는 이 빌딩에 입주해 있는 친구 회사에 왔다 가는 길입니다. 혹시 설빙은 만났습니까?‘
구건호는 설빙이야기가 나오자 뜨끔했다.
“만났습니다. 신사동 우리빌딩 지하에 갤러리를 오픈해 초청했었습니다. 그 이후론 만나지 못했습니다.”
“설빙은 일본에 촬영 갔다가 최근에 돌아왔습니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볼가요?”
“아,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합니다.”
빌딩 로비에서 연예인처럼 생긴 젊은이들이 들어오다가 BM엔터테인먼트 이사를 보고 깜짝 놀라 인사를 깍듯이 하였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구건호는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긴 것은 기생 오라비처럼 생겼어도 연예인 세계에서는 선생님 소리 듣는 모양이네.]
구건호가 지하주차장에 있는 벤틀리 승용차를 타고 나오다가 주차장으로 걸어 들어오던 BM엔터테인먼트 이사를 다시 보고선 자동차 창문을 내렸다. 그리고 목을 내놓고 이사에게 말했다.
“시간 있을 때 우리 사무실 한번 놀러 와요. 내가 물어볼 것이 있네요.”
“예, 알겠습니다.”
BM엔터테인먼트 이사와 함께 걸어오던 사람이 물었다.
“이사님, 저 분은 누구입니까?‘
“신사동에 20층짜리 빌딩을 가지고 있는 분이야. 중국에도 높은 사람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야.”
“어휴, 자동차가 3억짜리 벤틀리 승용차네요.‘
구건호는 사무실에 돌아와 김영은에게 문자를 보냈다. 환자 치료 중에 불쑥 전화하면 당황해 할까봐 문자를 보냈다.
[신혼여행후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안가서 집안 어른께 야단맞았음. 토요일은 양가 부모님 댁에 들려야 할 것 같음.]
한참 후 답신이 왔다.
[토요일 점심때 인천 구월동 들리고 저녁에 신림동 들리는 것으로 하지요.]
구건호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토요일 점심에 들릴게요. 신혼여행 갔다 와서 바로 가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일이 있어 못 갔네요.”
“우리 집에 들렸다가 처갓집에도 들려라. 사돈어른 혼자되신 분이라 외로울 거다.”
“알겠어요.”
금요일 저녁에 구건호가 퇴근하니 김영은이 아파트에 먼저 와 있었다. 된장찌개 냄새 같은 것도 났다.
“밥했나?‘
“응, 밥솥에 밥 해놓았으니 한 3일은 먹을 수 있을 거야. 찌개는 이틀 지나면 버려.”
“아파트가 이제 사람 사는 것 같다.”
“밥은 발 씻고 먹어요.”
“밖에 나가서 안 사먹어도 되겠다.”
구건호는 발을 씻고 김영은과 둘이 마주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에 된장찌개가 올라오고 김치와 나물무침, 계란 후라이, 콩자반 같은 음식들이 올라왔다.
“밥하고 된장찌개하고 계란 후라이만 내가 한 거고 나머지는 다 반찬가게서 사가지고 온 거야.”
“잘 먹을게.”
구건호는 난생 처음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었다. 밥은 새로 한 밥이라 맛이 있는데 된장찌개는 영 맛이 없었다. 엄마가 해주던 된장찌개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만든 사람 성의를 보아서 맛없다고 하면 안 되겠지? 인터넷에서 보니까 부인이 해주는 음식은 맛있다고 하면서 잘 먹어주는 게 좋다라고 되어있지만 된장찌개 맛은 영 아니네.]
“맛있어?‘
“응, 괜찮아.‘
“입에 맞아?‘”응, 맞아.“
“근데 왜 안 먹어?
“먹고 있어.”
구건호는 계란 후라이와 김과 김치에만 젓가락이 많이 갔다. 그래도 밥은 새로 한 밥이라 많이 먹었다.
“밥하느라 수고했으니 설거지는 내가 해줄게. 물에 담가만 놔.”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 물건이나 날라줘.‘
“무슨 물건?”
“내 차에 있어. 책하고 내일 부모님 만나러 갈 때 드릴 선물들이야.”
“그래?“
구건호는 김영은을 따라 차고로 내려갔다.
김영은이 끌고 온 SM5 승용차 뒷 트렁크에는 책이 가득 실려 있었다.
“뭔 책이 이렇게 많아?”
“지금 안보는 책들이야. 거기 책장이 좁은데 책이 넘쳐나 안보는 것들은 여기에 갖다놓으려고.”
“핸드카가 있어야 되겠는데? 내 차에 핸드카 있으니 가져올게.”
구건호는 두 번에 나누어서 짐을 올겨 주었다.
“아남아파트에서 내릴 때 혼자 힘들었겠는데?”
“거기선 네 번이나 왔다 갔다 했어. 경비 아저씨가 도와주기도 했어.”
“그래서 남편이 있어야 돼.”
책 정리와 설거지를 마친 구건호와 김영은은 TV를 보다가 안방 더블침대에서 나란히 누었다.
“좋지?”
“뭐가?”
“부부가 되어 이렇게 함께 있으니 말이야.”
구건호는 김영은을 끌어당겨 볼에 뽀뽀를 하였다.
“고마워. 내게 와줘서”
“내가 노총각 구제했지.”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나를 택했지? 좋은 사람도 많았을 텐데 말이야.”
“나도 모르겠어.”
구건호는 다시 입술에 뽀뽀를 하였다.
“오빠는 왜 나를 택했어?”
“내가 노처녀 구제했지.”
김영은이 이불속에서 발로 구건호를 걷어찼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나를 택했지? 좋은 사람도 많았을 텐데 말이야.”
“나도 모르겠어.”
김영은이 팔로 구건호의 가슴을 더듬었다.
“내가 영은이를 택한 건 보상심리 때문이 아닐까?”
“보상심리?”
“서울대학을 못 다닌 한풀이 같은 것 말이야.”
“늙으면 배운 사람이나 안 배운 사람이나 똑 같데.”
“난 중고등학교 시절이 좀 어려웠어. 영은이 아빠는 교사니까 학구적 가풍이 있었겠지만 우리는 당장 먹고살기 바빴어. 우선 또래들한테 기를 못 피고 사니까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도 없었고 환경도 받쳐주질 못했어. 돈을 벌어야겠다는 것도 보상심리에서 출발했다고 보아야겠지.”
“보상심리가 삶의 원동력이었겠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아. 영은이는 공부도 잘했고 어느 정도 인물이 받쳐주니까 히로인 노릇만 했을 것 같아.”
“아니야, 날마다 살벌한 자기와의 싸움만 있었어.”
“왜 그랬지?‘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가 너무 강했던 것 같았어.”
“트라우마?”
“엄마가 50도 안되어 난소암으로 돌아가셨어. 난소암을 치료하는 의학자가 되는 것만이 삶의 목표였었어. 화가의 꿈을 접고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만 했지.”
“반에서 1등 했겠네.”
“반1등이 뭐야. 전교 1등 했어.”
“의과대학을 들어갔지만 내 꿈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어. 불치병 치료약 개발이 어디 그렇게 쉽게 되는 건가? 연구소 같은데서 연구하다보면 세월이 가면 누군가 하긴 하겠지. 그것이 우리 세대에 안 될지라도 말이야.”
“흠.”
“언제 개발될지도 모르는 연구 분야에 돈을 쏟아 부으려면 재벌밖엔 없었지. 그래서 왜 시집 안가냐고 누가 물으면 농담 삼아 재벌 아니면 안 간다고 했지. 그런데 선배가 정말 CY그룹 회장의 동생 아들을 소개했어.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온 머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선도 보았어.”
“그래서 채였나?”
이불 속에서 김영은의 발길이 또 날라 왔다.
“어이쿠, 이거 내가 여자 깡패하고 결혼한 것 같네.”
“재벌 3세를 만났는데 영 아니었어. 우선 껌을 질겅질겅 씹고 다니며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
“미국물 먹어서 그런가?‘
“미국이라고 다 그런가? 미국인들도 의외로 보수적인 사람들도 많잖아.”
“그렇긴 하지.”
“대화를 해보니까 역사의식도 없고 상식도 없는 금수저일 뿐이어서 두말 않고 뒤돌아섰지.”
“흠.”
“그래서 다른 선배가 자기 동창을 소개해 주었어. 난소암 개발 같은 건 못하더라도 같이 의사의 길을 걸으며 아프리카 봉사 활동도 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그런데 막상 만나고 보니 인상이나 가치관이 내 취향이 아니었어.”
“왜?”
“인상도 맘에 안 맞았는데 돈에 집착이 강해서 짜증만 나 그만 두었어. 오빠처럼 어려운 가정에서 열심히 공부해 의사가 된 사람인데 너무 돈 벌려는 의욕이 강해 경험도 없이 융자를 얻어 병원을 차렸어.”
“돈 벌려는 의욕은 나도 강한데?”
“돈은 의욕만 가지고 안 돼. 운과 능력이 있어야 하잖아.”
“임상 경험 없이 너무 일찍 시작했던 모양이네.”
“소문엔 빚만 잔뜩 지고 지금 어디 개인병원 월급쟁이 의사한다는 소식만 들었어.”
“그런데 왜 나를 선택했지? 나도 돈에 집착이 강한 사람인데.”
“이모가 약을 많이 팔았어. 천 억대의 자수성가한 젊은이라고 귀가 아프도록 이야기 했어.”
“최 화가 말인가?”
“거짓말인줄 알았어. 요즘 세상에 출세 사다리도 없는데 젊은 사람이 어떻게 천억을 벌겠어? 최고 학부의 의사도 자기돈 10억이 없어 융자받아 병원 차렸다가 망하는 세상인데 그걸 어떻게 믿겠어.”
“이모가 그랬었나?”
“그런데 좋아하던 이모 친구 신정숙 사장도 만나보라고 자꾸 권해서 심심풀이로 만나보았지.”
“그런데 오빠 첫 인상이 어땠는 줄 알아?”
“어땠는데?‘
“돈 많은 사람이 아니고 그냥 대기업의 평범한 샐러리맨 같았어. 우선 선하게 생긴 것 같아 좋았어. 그때까지 결혼상대로는 생각도 안했어. 그렇게 돈이 많다니 돈 번 이야기나 들어보고 끝내려고 했지.”
“그런데?”
“내가 아프리카 봉사 갔다가 독충에 물린 팔을 보여 주었을 때 오빠도 공장에서 다친 팔을 보여주었잖아. 사실 그때 이상하게 눈물이 났었어. 나도 내가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 줄 몰랐어.
과정에 충실한 남자구나. 그래서 돈을 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추구하는 길은 달랐어도 같은 과정을 걷는 동지로 보였어. 운명적으로 이 남자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어."
"흠"
"그리고 오빠는 점잖았잖아. 껌도 씹지 않고 반바지에 슬리퍼도 신고오질 않았어. 미술을 이야기하는 교양인이도 했어.“
“잘 보아주어 고맙다.”
“오빠라면 날 잘 지켜줄 것 같았어.”
“그래, 평생 너를 내가 꼭 지켜주마.”
구건호는 김영은을 힘껏 껴 앉았다. 나무토막 같기만 했던 김영은도 이날은 두 팔로 구건호의 목을 감았다. 이들은 이날 밤 결혼 후 처음으로 뜨거운 정사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