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결혼 (3)
(245)
구정이 지나고 2월 중순이 되자 추위는 물러갔다. 입춘도 지나고 얼었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도 지났다.
구건호는 지에이치 모빌의 자기 책상에 앉아 이메일을 검색하다가 뜻밖에도 모리 에이꼬로부터 온 메일을 발견하였다.
[오빠 얼굴 본지도 오래 되었네요. 이제 두 달만 있으면 벚꽃이 활짝 피겠지요? 금년에도 교또의 헤이안진구(平安神宮)에서 벚꽃 축제가 있습니다. 교또시에서는 헤이안진구의 다이고쿠덴(大極殿)에 대규모 무대를 설치하고 무기(舞妓)들을 특별 초청한답니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 같아 한국여행을 하려고 합니다. 3월 중순경 한국 방문 예정입니다. 오빠를 만난다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설레입니다.
- 사랑하는 모리에이꼬 드림 - ]
구건호는 이메일을 받고 시껍했다.
“큰일이다. 내 결혼식 날짜하고 겹친다. 왜 하필이면 이때 오지?”
구건호는 당황하여 방안을 맴 돌았다.
“뭐라고 답장을 하지?”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이상했다. 모리에이꼬의 또랑또랑한 맑은 눈과 도톰한 입술이 자꾸 생각이 나 보고 싶기도 했다.
“모리 에이꼬도 보고는 싶은데 어쩐다?”
구건호는 그래도 어렵게 성사시킨 이 결혼식을 방해받아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답장을 했다.
[모리에이꼬 반가워. 오빠도 무척 보고 싶었어. 한국에 온다니 달려가서 만나고 싶어. 그런데 어쩌지? 내가 3월 중순경 중국에 가 있을 것 같아. 거기 벌려 논 사업체들이 있고 합작 계약 건이 있어. 내가 벚꽃 축제 때는 일본에 건너갈게.- 사랑하는 오빠가 - ]
이런 답장을 보내놓고 구건호는 모리에이꼬에게 미안했다.
“모리에이꼬, 미안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일본에 가서 좋은 음식, 좋은 옷 많이 사주마.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
모리에이꼬는 오늘 쉬는 날인지 이메일 답장이 바로 왔다.
[오빠 부담 갖지 말아요. 사업하시는 분이니까 많이 바쁠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3월 중순엔 친구랑 같이 가니 친구들과 함께 관광하지요. 그럼 벚꽃 축제 때 봐요.
- 사랑하는 모리에이꼬 드림 - ]
구건호는 모리에이꼬가 옆에 있으면 정말 안아주고 싶었다.
구건호는 머리도 식힐 겸 사장실을 나왔다. 공장 마당을 거닐다가 현장을 한 바퀴 돌고 싶었다. 구건호가 생산 현장에 들어왔다. 생산직 사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던 생산과장이 뛰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오, 생산과장님, 일들 봐요.”
구건호는 생산과장이라도 반말을 하지 않았다. 나이가 자기보다 비슷하거나 많기 때문이었다. 박종석 이사도 뛰어 왔다.
구건호가 박종석 이사를 대동하고 생산라인을 순회하자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는 척 했다.
“오늘은 구사장님이 현장을 도네.”
구건호는 이렇게라도 하면서 모리에이꼬를 잠시 잊고자 했다. 현장을 한 바퀴 돌고 사장실에 다시 들어왔다. 이번엔 생각지도 않은 설빙에게서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가 왔다.
[3월 16일 드라마 촬영으로 일본에 있을 예정입니다. 뉴오따니 호텔로 저녁 6시까지 나가겠습니다.]
“뉴오따니 호텔? 연락도 없던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그것도 결혼식 준비로 한창 바쁠 3월 16일이네. 이것 참 미치겠네.”
이러면서도 구건호는 설빙의 도도한 몸매가 생각났다. 달콤했던 키스의 기억도 새로웠다. 마음 같아선 뉴오따니 호텔에서 와인이라도 한잔 마시고 둘이 팔짱을 끼고 동경의 긴자 거리라도 걷고 싶었다.
구건호는 답장을 보냈다.
[앗! 설빙씨! 반가워요.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3월 중순이면 내가 중국에 있을 때군요. 중요한 합자 계약 건이 있습니다. 모처럼 주신 연락인데 너무 죄송하군요. 중국에서 돌아오는 즉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구건호는 설빙에게도 미안했다. 그리고 결단력 없는 자신이 싫어졌다.
[결혼을 앞두고 이게 뭐야. 주변에 여자들을 다 정리하고 결혼식을 올려야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아직도 모리에이꼬와 설빙에게 미련이 남아 미적거리니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왜 이런가.]
그러고 보니 곧 혼인을 할 김영은에게도 미안했다. 모리에이꼬와 설빙과의 관계가 탄로나 김영은이 분노의 얼굴을 하고 돌아서는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절도 있는 걸음 거리로 가버릴 거야.]
구건호는 소파에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구건호가 다니고 있는 정책대학원에서는 정치나 경제에 대한 강의만 하는 게 아니었다. 교양있는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차원에서 국내 최고의 예술가들을 초빙하기도 하였다. 이 날은 국내 화단의 거목이라는 화가 황영산씨의 특강이었다.
특강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또 하나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화가 황영산씨가 들어왔다.
“아, 저 분이 황영산이구나. 저 양반 그림 우리 집에 있어.”
이런 말도 뒤에서 들렸다.
담당교수가 황영산 화가를 소개하고 나갔다. 황영산씨는 60대 후반으로 화단의 원로였다. 서울의 유명 미술대학의 학장도 역임했고 국전 심사위원도 여러 번 했던 인물이다. 옷차림이 범상치 않았다.
화가는 스크린에 여러 대가들의 그림을 보여주며 작품세계를 설명했다. 말은 어눌하고 천천히 했지만 아주 흥미 있는 내용이었다. 구건호는 재미있게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갈 즈음 구건호가 황 작가를 불렀다.
“저, 선생님.”
황 작가가 뒤를 돌아보았다.
“강의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저는 사업을 하지만 화랑을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뵈어서 영광입니다.”
구건호가 자기 명함을 주었다. 황영산 화가가 구건호의 명함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제가 화랑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오, 그래요? 인사동입니까?”
“인사동은 아니고요. 강남 신사동에 있습니다. 얼마 전 아방가르드 중국 청년 전위 작가전을 했었고 프랑스 색채미학의 거장이라는 마리옹 킨스키 전시회를 한바 있습니다.”
“오, 마리옹 킨스키!”
황영산 화가는 자기의 명함을 주었다, 영문으로 아티스트란 글자가 있는 명함이었다.
“언제 한번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지금 광주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거기서 살아요.”
황 작가는 구건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선 바로 돌아서 가버렸다.
교실로 들어오니 회장이 불렀다. 회장은 현직 장관이며 부인이 D그룹 대주주로 있다.
“총무, 나 좀 봅시다.”
구건호가 얼른 회장 앞으로 달려갔다.
“저기 앞줄에 흰머리 난 사람 말이요, 이번에 차관에서 장관으로 부임했으니 서울대학교 정책대학원 학우일동으로 난초 화분이라도 하나 보내주지요.”
“좋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돈 있소? 지난번 10만원씩 걷은 것 식대로 다 나갔을 텐데?”
“15만원 남았습니다.”
“난초 화분 값은 되겠네.”
“5만원짜리 하나 보내겠습니다.”
“7만원 짜리로 하나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회비 8만원 남았습니다.”
“흠, 기금이 너무 없네.”
“한 번 더 걷을 가요?.”
“아니요. 내가 조금 찬조하지.”
“개인 부담하셔야 되겠습니까? 제가 걷지요.”
“내가 회장도 되었으니 두 번은 못 내도 한번은 내지요.”
회장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구건호에게 100만원짜리 수표하나를 꺼내 주었다.
“어이쿠, 이거 너무 많은데요?”
“관혼상제 이용이 솔찬히 나갈 거요. 가지고 계시오.”
아직 수업시간 전이라 구건호가 앞으로 나갔다.
“여기 주목해 주십시오. 공지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 총무 구건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번에 우리 반에서 차관으로 계시다가 장관이 되신 분이 있습니다. 앞에 계신 박XX님이십니다. 회비 남은 것에서 축하 난초 화분을 우리 정책대학원 학우 일동 명의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좋아요.”
“잘했어요.”
여기저기서 잘했다는 소리가 나오고 박수소리도 나왔다. 장관이 된 사람이 흰머리를 쓸어 올리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다음은 두 번째 공지사항입니다. 지난번에 회비 걷은 것은 식대로 지불하고 현재 8만원이 남았습니다. 기금이 고갈 직전인데 회장님께서 특별 찬조금을 내 주셨습니다. 100만원을 보내주셨습니다. 큰 박수로 감사의 뜻을 표해 주셨으면 합니다.”
큰 박수소리가 강의실이 떠나갈 듯 울렸다. 회장이 앉은 채로 인사를 하였다.
“재벌 집 사위가 100만원이 뭐야? 한 1,000만원 내야지.”
장관들은 고시 동기들인지 서로 농담도 잘하고 반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다음은 세 번째 공지사항입니다.”
“또 있어?‘
모두 또 구건호의 얼굴을 주시했다.
“지난번에 청첩장을 드린 바와 같이 뒤에 계신 사령관님 장녀 결혼식이 이번 주 토요일입니다. 꼭 참석하여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량관이 벌떡 일어났다.
“에, 공무다망하신데 무리하게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화환은 사절입니다.”
사령관이 무언가 한마디 더 하려는데 강의하는 교수가 들어와 그만 두었다.
정책대학원의 수업시간은 하루에 90분 강의가 두 번 있었다. 대체로 밤 10시 이전엔 끝났다.
수업이 끝나고 자기 소지품을 챙기는데 구건호가 회장 앞에 갔다.
“회장님, 아까 사령관님 따님 결혼식에 화환을 보내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 가요?”
“글세. 보내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보내줘야겠지? 하나 보내줘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구건호는 안 포켓에서 자기의 명함을 꺼냈다.
“이거 제 명함입니다. 혹시 심부름이라도 시킬 일이 있으면 연락처는 있어야 되겠지요.”
회장이 구건호의 명함을 보았다.
“회사가 여러 개네.”
“다, 구멍가게 수준입니다.”
“주소가 천안시 직산읍? 그쪽엔 나도 자주 가요. 컨트리클럽 사장하는 내 친구가 있어요.”
그러면서 회장은 자기의 명함을 주었다.
지에이치 모빌의 송사장이 시카고에서 만났던 클라이슬러 임원과 몇 번 이메일을 주고받더니 도면 하나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시카고 박람회에 출품했던 AM083 어셈블리 같은 이중압출 형태입니다.”
“내연기관용이지요?”
“그렇습니다.”
“수량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클라이슬러라면 세계적 완성차 업체니까 거래를 트면 또 기회는 많이 찾아올 겁니다.”
“우리가 만들 수는 있는 겁니까?”
“도면도 보내주었고 제품 샘플도 보내준다니 어려운건 없을 것 같습니다.”
“샘플을 보내줘요? 그럼 금형도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납품사가 도산하고 금형이 유실된 모양입니다. A/S용입니다.”
“흠, 신규 개발품이 아니라 많이 늘어나지는 않겠네요.”
“그래도 거래를 트는 것이니까 클라이슬러에 협력업체 등록도 되고 홍보 효과는 많습니다.”
“알겠습니다. 추진하세요.”
구건호가 오래간만에 디욘코리아를 방문했다.
지에이치 모빌에 있다가 디욘코리아로 온 상임감사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째, 있을 만 합니까?”
“예, 좋습니다. 분위기도 좋고 업무량도 적당해 좋습니다. 경리부 조차장도 제가 데리고 있던 아이라 호흡도 잘 맞습니다.”
“”좋다니 저도 좋습니다.“
“윤상무 이야기 들으니까 9호기, 10호기는 들어왔고 11호기, 12호기 주문 중에 있답니다. 생산직 직원도 추가 모집할 예정이랍니다.”
“흠, 그래요?”
“그리고 중국 수출 물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거기의 판매회사 사장이 영어를 할 줄 아는지 직접 애덤 캐슬러와 전화를 합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상해 국제학교 영어교사 출신이니까요.”
“김민혁 사장 처라고 그랬지요.?”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