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236화 (236/501)

# 236

둘레길 데이트 (4)

(236)

구건호가 김영은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 돈이 많은 사람을 원한다고 했습니까?”

“그래요.”

“그 사람의 인격이라든가 가치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나요? 돈을 따지니 좀 이상합니다.”

“인격도 훌륭하고 가치관도 건전하고 돈도 많으면 안 되나요?”

구건호는 정이 팍 떨어졌다. 김영은에게 가졌던 환상이 와르르하고 깨지는 것만 같았다. 약간 비웃음을 먹은 채 말했다.

“그럼 재벌을 찾으면 되겠네요.”

구건호는 남은 맥주를 벌컥대며 다 마셨다.

김영은은 싸늘히 웃기만 하였다.

“의사들은 페이도 많이 받잖아요. 그런데 돈이 얼마나 더 필요한가요?”

구건호는 흥분되어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김영은이 조용히 자기의 왼쪽 팔뚝을 걷었다. 왼쪽 팔뚝엔 흉한 흉터 자국이 보였다.

“그, 그건 무슨 자국입니까?”

“독충에 물린 겁니다.”

“독충?”

“아프리카에 의료봉사 3년을 다녀왔어요. 의사들 페이도 좋은데 그냥 봉사하러 갔었어요. 거기서 독충에게 물린 거예요. 내가 돈만 아는 사람이라 그랬을까요?“

구건호는 눈이 둥글어진 채 다음 말을 들었다.

“엄마가 고2때 돌아가셨어요. 난소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이모처럼 화가가 되려다가 의과대학엘 들어갔어요. 난소암을 연구하는 연구원이 되고 싶었어요. 아니, 돈이 많은 사람하고 결혼해 연구소를 하나 차리고 싶었어요.”

“흠.”

또 다른 세계가 보였어요. 100원짜리 약 한 톨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김영은도 캔 맥주를 다 마셨다.

“하지만 연구는 여러 사람이 모여 시스템적으로 연구해야 되요. 정부나 대학 단위의 기관에서 연구해야지 개인의 의욕만 가지고는 안 되지요. 그래서 아프리카로 갔지요. 가니까 “의사가 아무리 페이가 좋아도 한 달에 500만원 모으기 힘듭니다. 20년 모아도 지금 구사장님이 산다는 강남 아파트 한 채를 못 사지요. 돌아가신 엄마도 중요하지만 현재 우리와 같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의료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구건호는 김영은의 말을 듣고 자기가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건호가 천천히 자기 왼쪽 팔뚝을 걷었다.

불에 덴 흉한 자국들이 나왔다. 상처를 꿰맨 자국도 있었다. 김영은이 눈을 크게 떴다.

“돈을 벌기위해 공장에서 얻은 영광의 상처들입니다.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해 밤잠 안자고 사출공이나 압출공 일을 했지요. 이를 악물고 돈을 벌었습니다.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무엇이든지 손을 댔지요. 돈을 한없이 벌고 싶었습니다. 의사들이 20년 걸려도 장만하기 힘든 강남 아파트를 지금 당장이라도 수십 채 살수는 있지요. 재벌은 아닙니다. 훌륭한 생각을 가진 영은씨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구건호는 자기도 모르게 김영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김영은이 손을 살며시 빼냈다.

“우리 가요. 저 약속 있어요.”

김영은은 평상시와 같은 절도 있는 걸음 거리로 차고를 향해 갔다.

지에이치 갤러리에선 조각전시회가 한창이었다.

한사람의 작품이 아니고 여러 젊은 작가들의 소품 조각들이었다. 지에이치 갤러리는 빌딩 입주회사들의 젊은 직원들한테 인기였다. 밖에 나가 점심 먹고 구경거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어느 때는 가방을 든 중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와서 만화 원화 전시회 같은 것 또 안 열리냐고 물어보곤 하였다.

구건호는 점심시간을 피하여 전시회 구경을 했다. 점심시간대에 오면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여러 명의 작가 전시회이므로 작가 몇 사람이 중앙의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도 보였다. 구건호는 조각품을 보고 웃었다.

“진짜 재주들 좋네. 잘 만들었네.”

작품 중에는 촛대위에 새가 앉아 있고 이어폰 위에 나비가 앉아있는 조각품도 있었다. 구건호는 마음에 드는 조각품 하나를 사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집에 자꾸 물건만 쌓이면 복잡하니 사는 건 그만두자.”

구건호가 갤러리 구경을 하고 올라오자 중국의 김민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주시 평제로(平齊路)에 있는 사자루(寫字樓: 사무실 건물) 건물에 사무실이 하나 나와서 계약했어. 보증금 없이 깔세로 한국 돈 540만원이야.”

“흠, 월 45만원이구나.”

“크기는 99평방미터(30평)야. 영업집조(사업자등록증)도 나왔어.”

“30평에 월 45만원이면 비싸지는 않구나.”

“발품 좀 팔았지.”

“창고하고는 멀지 않지?”

“멀지 않아. 4키로도 안 돼.”

“창고는 합자사 재산이 아니니까 나중에 돈 벌면 임대료 책정해서 내 개인 통장에 넣어라.”

“그렇게 할게.”

“사무실 차렸으니 집기도 가져와야하고 직원도 뽑아야겠구나.”

“책상 3개하고 경리 한사람만 뽑으려고 해. 창고 경비원은 우리 소속 안 하기로 했어.”

“그건 알아서 해라. 그런데 영업활동 하려면 승용차도 한 대 사야겠구나. 아우디 사라.”

“아우디는 너무 비싸고 진초우형(緊湊型: Compact형을 말함) 할부로 살까?”

“할부가 되나?”

“은행대출 형태로 돼. 딩딩이 국제학교 소득증명이 있어서 돼.”

“그런데 넌 와이프 이름을 막 불러도 되니?”

“중국선 부부간에 보통 이름 부르잖아. 너도 알잖아?”

“하하, 그러긴 한데”

“딩딩이 중국에서 생산되는 한국 기아차 K3를 타고 싶어 하더군.”

“할부가 된다고 하니 사줘라. 영업해야 되니까. 그런데 기사 둬야 되잖아?”

“아냐, 딩딩이 운전 면허증 있어. 난 외국인이지만 딩딩은 운전하고 다녀도 돼.”

“딩딩 딩딩하니까 합자사 이름도 편하게 딩딩 합자사라고 불러야 되겠다. 발음도 그게 편하다.”

“하하, 그래? 그렇게 해라.”

“9호기, 10호기 돌아가니까 우선 원재료 10톤만 보낼 테니 팔아봐라.”

“원재료 보내기 전에 딩딩이 디욘코리아 생산 현장을 보고 싶어 해. 세일즈 토킹을 하려면 어떻게 생산되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하던데?”

“그건 맞는 말인 것 같다. 내일이라도 오라고 해라. 너도 같이 와라. 너도 한국에 온지 오래 되었잖아?”

“그럴까?”

“와서 문재식이 운송회사도 한번 들리고 그래라.”

“흠, 알았다. 그럼.”

구건호는 김민혁의 전화를 끊고 결혼식장에서 본 김민혁의 처를 생각해 보았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인상이 좋은 한족 여자라 영업은 잘할 것 같네.”

구건호는 이제 한 달만 있으면 37살이 되어 초조했다.

“김민혁, 문재식 다 결혼했고 후배 박종석이도 장가를 가서 곧 아이 아빠가 되는데 난 이게 뭐야. 돈만 있다고 다 되는 세상은 아니네.”

구건호는 김영은에게 문자 메세지를 보냈다.

[벌써 금요일이 되었네요. 만나고 싶군요. 내일 모레 일요일 10시 30분에 한성대역앞 스타벅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일요일이 되었다.

눈이라도 오려는지 잔뜩 흐린 날씨였다. 일기예보를 보았다. 눈이 온다는 예보가 떴다.

“둘레길이 올라가는 데가 많아서 미끄러우면 어쩌나.”

구건호는 김영은이 나올지 안 나올지 항상 불안하였다. 아직 그녀의 마음을 사진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매번 그랬듯이 초조한 가운데 김영은을 기다렸다. 김영은은 빨간색 등산복 잠바를 입고 나왔다.

“커피를 마시고 가요.“

구건호의 제의에 오늘은 김영은이 자리에 앉았다.

“빨간색 등산복이 어울리네요.”

“고맙습니다.”

“둘은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머, 저 눈 좀 봐.”

김영은이 감탄하며 창밖의 날리는 눈을 보았다. 구건호는 안중에도 없고 눈만 쳐다보았다.

“저 눈을 그리고 싶었는데.”

김영은은 추억에 젖은 눈을 하고 눈을 바라보았다.

커피를 다 마실 무렵 구건호가 김영은에게 말을 걸었다.

“둘레길 걷지요.”

눈은 아직 쌓이지 않았다. 하지만 둘레길 입구까지 가는 동안 눈은 계속 펑펑 쏟아졌다. 오늘은 둘레길 쪽으로 올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레길 입구에 오자 눈은 함박 눈으로 바뀌어 펑펑 쏟아졌다. 김영은이 탄성을 질렀다.

“와-, 저 눈 쌓인 것 좀 봐.”

김영은은 눈 쌓인 곳으로 달려가더니 눈을 움켜쥐고 눈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눈덩이를 구건호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얍!”

눈덩이 여러 개 중 한 개가 구건호의 머리에 맞았다. 구건호도 눈덩이를 만들어 김영은에게 던졌다. 두 사람이 때 아닌 눈싸움이 번졌다.

“얍!”

“얍!”

눈싸움은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 구건호는 숨이 찼다.

“이제 그만 합시다.”

눈싸움이 멈추고 구건호가 김영은에게 다가갔다. 김영은은 어린애 머리통만하게 눈덩이를 만들더니 가까이 다가온 구건호의 머리에 갑자기 던졌다.

“으웩, 퉤퉤”

눈가루가 눈과 입속으로 들어갔다.

“호호호.”

김영은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났다.

얼굴에 뭍은 눈을 손수건으로 다 닦은 구건호가 말했다.

“눈 와서 못 올라가겠네요. 내려갑시다.”

“삐쳤어요?”

“삐쳤어요.”

“대학로 쪽으로 가요. 생맥주 사드릴게요.”

구건호와 김영은은 차를 놔둔 채 대학로를 가기위해 동성고등학교 방향으로 걸어갔다.

“복수하고 싶어요.”

김영은이 입을 막고 웃었다. 구건호는 용기를 내어 팔짱을 끼었다.

“미끄러워 넘어질까 봐 그런 거예요.”

김영은은 팔짱낀 손을 빼지 않았다. 김영은에게서 풋풋하고 싱그러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순백의 눈과 그녀의 얼굴이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던 반장 여자 아이가 있었다. 인기가 많은 아이라 구건호는 접근도 못했지만 꼭 그 아이와 함께 걷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둘은 장작구이 통닭집에서 통닭과 함께 생맥주를 마셨다. 눈 내리는 날 맥주를 마시니 김영은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여자들은 역시 감성에 약했다. 이 날 두 사람은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와 아프리카에서의 이야기, 그리고 구건호의 중국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이들은 대학로 광장에서 있는 사물놀이 구경도 하고 혜화동 로터리까지 다시 올라왔다.

“다음에 둘레길 위험하면 대학로에서 만나요. 아까 생맥주집 앞에도 스타벅스가 있네요.”

김영은은 대답대신 웃기만 하였다.

“조심해 가세요.”

구건호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김영은도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서울대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정책대학원 합격을 축하한다는 메시지였다. 새해가 시작되는 1월 3일부터 개강을 한다는 안내도 있었다.

“흠, 내가 반쪽짜리 서울대생이 되었나?”

구건호는 김영은에게 문자를 보냈다. 서울대 정책대학원에서 1년 강의를 듣는 과정에 들어갔다는 내용이었다. 문자에 대한 답신은 없었다.

김민혁이 자기 처 딩딩과 함께 한국으로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구건호는 엄찬호를 불렀다.

“중국 김민혁 사장이 들어온단다. 인천공항에 가야겠다.”

구건호는 벤트리 승용차를 타고 강변도로를 달렸다.

김민혁의 처 딩딩은 키가 거의 김민혁 만했다. 구건호는 딩딩을 결혼식 때 보고 처음 보았다. 역시 세련된 여성이었다. 추운 날씨 탓에 두 부부가 모두 코트를 입고 왔다.

“인사해, 구건호 동사장(이사장)이야.”

“니하오!”

구건호가 손을 내밀었다. 딩딩도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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