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둘레길 데이트 (3)
(235)
문재식은 로지스틱스 공장 옆의 논 주인을 슈퍼 앞에서 만났다.
“뭐 사로 오셨어요?”
“예, 비누가 떨어져서 사로 왔어요.”
“요새 논으로 기름 안 흘러가지요? 우린 정비공장이 아니라 오일 취급 안합니다.”
“그런데 댁은 그 공장에서 기숙하시오?”
“예, 그렇습니다. 집은 서울 망원동인데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들어 주말에나 올라갑니다.”
“그래서 소주 사러 온 거요?”
“예, 적적해서요. 아저씨, 아니 사장님 우리 공장 구경하실레요? 아니 저녁 식사 안하셨으면 저 앞에 기사식당 가시죠.”
“난, 가야되는데....”
“사장님. 저도 주민등록은 이쪽으로 되어있습니다. 이제 한 동네 사람인데 동네 어르신들한테 제가 한번 대접해 드려야지요.”
문재식은 땅 주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허, 이 사람이.”
땅 주인은 문재식이 끌어당기는 소매를 강력하게 뿌리치지는 않았다.
기사 식당으로 온 문재식은 제육볶음과 소주를 시켰다.
“댁이 사장이라는데 원래 운수사업 하셨소?”
“아닙니다. 다른 일 하다가 친구가 불러서 왔습니다. 제가 무슨 돈이 있어 이런 사업체를 운영합니까? 월급쟁이 사장이지요.”
“그럼 일종의 머슴이네.”
“그런 셈입니다. 하하.”
땅 주인은 술을 잘했다. 시골 살면서 날마다 술을 마셔서인지 소주를 무슨 냉수 마시듯 했다. 문재식이 헉헉대며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자, 한잔 받으쇼, 나도 젊었을 땐 머슴 한 사람이요.”
“머슴요? 땅을 많이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요?”
“없어요, 40년 전 땅값이 쌀 때 논 몇 마지기 사논 것 밖에 없어요. 그땐 여기 공장이 하나도 없고 이 앞 포장도로도 없었어요.”
“아드님하고 같이 사세요?”
“요즘 젊은이들이 시골 살라고 하겠어요? 지금 평택 시내에 살아요.”
“따님은요?”
“딸 둘은 다 시집가서 수원 살아요.”
“아저씨, 아저씨라고 불러도 되지요?”
“사장이라고 부르지 마시오. 사장은 무슨 얼어 죽을 사장! 내가 아제 뻘은 되는 것 같으니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요.”
“아저씨, 아저씨하고 저하고 논에 오일 들어간다고 서로 얼굴 붉힐 것이 아니라 논을 파실 의향 없으세요?”
“왜? 누가 사겠다는 사람 있어요?”
“제가 아는 사람이 은퇴하면 여기 와서 저하고 같이 농사짓고 살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 살기 때문에 농지증명 받기가 힘들어서 우선 제 이름으로 살려고 하는데 아저씨가 안판다면 다른데 살만한 데가 있나요?”
“내가 판다면 얼마 주겠소? 아들이 논 팔고 평택에 와서 아파트 생활하라고 날마다 와서 졸라요.”
“여기 시세가 50만원인 것 같던데요?”
“에이! 그렇게 못 팔아요. 아, 여긴 2차선 포장도로변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전에 정비공장이 있을 때 나하고 60만원에 흥정되었는데 뭘.”
“아저씨 논 1,500평인가요?”
“거기가 두 필지로 되어있고 합치면 정확히 1,520평이요.”
문재식이 잠깐 계산해 보았다.
“힉! 9억이 넘네요.”
“내가 이런 말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아들놈이 사업이 잘 안되어 빚이 조금 있소. 농협 빚 좀 갚고 딸년들도 살기가 그렇고 그러니까 1억씩 떼어주면 남는 것도 없소. 겨우 평택 시내 아파트 하나 살까 말까 해요.”
“그래도 9억이면 누가 쉽게 사지 못하겠네요.”
“누가 사서 형질변경하고 공장부지로 바꿔 봐요. 배는 더 받을 거요.”
“그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세금도 많이 내야 하잖아요?”
“그래도 돈 있는 사람들이 잡아 놓기만 하면 재미 좀 볼 거요.”
“하여튼 아저씨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가 한번 사겠다는 분하고 의논해 보지요.”
“그런데 성씨가 문씨라고 하셨나? 문사장은 거 되게 술이 약하네. 딱 한 병만 더 합시다.”
문재식은 오늘 임자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재식이 구건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논가진 주인하고 어제 술 한잔 했어.”
“그래, 좋은 이야기 좀 오고 갔나?”
“아들이 사업자금이 필요한 모양이야. 평당 60만원 달라고 하네. 정확히는 두 필지 1,520평이야. 모두 9억 1천2백이네.”
“등기부등본 떼어 봤나?
“떼어보았어. 1,100평하고 420평이더군. 1,100평짜리가 농협에 1억5천 근저당 설정이 되어 있었어.”
“근저당 설정한건 아들 사업자금으로 빼준 모양이네.”
“젊었을 때 이 동네서 머슴도 살았다고 하던데?”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 동네 정보를 잘 아니까 열심히 돈 모아서 논을 샀을 거야. 3, 40년 전에는 쌀 때 아닌가?”
“땅 팔면 자식들한테 좀 주고 평택 시내에 가서 아파트 하나 사려고 하나봐.”
“잘 생각했어. 빚이 있다면 이자 나갈 것 아닌가? 옛날에야 농사지어서 자녀 교육도 시키고 그랬겠지만 지금 농사지어선 수지가 안 맞지.
“힘만 들겠지.”
“야, 그런데 농사짓던 사람들 대박이다. 말이 9억이지 9억이면 얼마냐? 우리 부모님이나 너희 부모님은 평생 2억도 없어서 아파트를 살아보지 못하신 분들 아니냐?”
“에효, 그러게 말이다.”
“9억 1천 2백만원이면 9억에 한번 끊어봐라. 계약금은 지에이치 로지스틱스에 있는 회사돈 가지고 해라. 계약만 되면 돈은 바로 보내줄게.”
“알았다.”
“계약서 쓸 때는 수수료 좀 나가더라도 부동산 사무실에 가서 써라.”
“알겠어.”
서울대학교 정책 대학원에서 우편물이 왔다. 면접일 통보였다.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는 것을 구건호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크, 면접이 내일이네.”
구건호는 김영진 변호사와 함께 갈까 하다가 그냥 혼자 가기로 했다.
“일주일에 야간에 두 번 나간다니 합격하면 다녀보자. 귀찮은 사람들 사귀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김영진 변호사가 저렇게 같이 다니자고 성화니 그렇게 하자.”
구건호는 점심을 먹고 와서 엄찬호에게 연락했다.
“나 2시에 나간다.”
“알겠습니다.”
구건호가 빌딩 현관을 나오니 벤틀리 승용차가 비상 깜박이를 켠 채 서 있었다.
“서울대학으로 가자.”
“서울대학요?”
“거기 가서 지식을 함양해야지.”
엄찬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서울대학으로 차를 몰았다.
사당동 로터리를 지날 무렵 김영진 변호사가 전화를 했다.
“오늘 서울대학교 정책대학원 면접일인 거 알지?”
“알아. 지금 가고 있는 중이야.”
“그래? 그럼 거기서 만나겠구나.”
서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엄찬호가 물었다.
“서울대학교 어디로 가지요?”
“글세, 박물관 뒤에 있는 국제대학원 건물이라는데. 잘 모르겠으면 박물관 근방에 세워라.”
박물관을 찾아가 보니 근방에 재벌기업에서 지어준 건물들이 많았다.
“응? 이게 뭐야? LG경영관, SK경영관, 동원 생활관, 대림 국제관, CJ어학원...제기럴, 많기도 하네. 서울대 나온 회장님들께서 건물 하나씩 지어준건가? 나는 성공하면 어디다 지어주지? 중국 절강대학? 사이버대학? 잠깐 다녔던 충남의 지잡대?”
구건호는 쓴 웃음을 지으며 면접장으로 갔다.
면접장 대기실에는 서너 명의 신사가 앉아 있었다. 나이도 있고 관록도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조교인 듯한 사람이 와서 구건호의 이름을 물었다.
“잠깐 기다리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구건호의 순번이 되어 조교를 따라 면접장엘 들어갔다. 풍채 좋은 50대 교수가 앉아 있었다.
“구건호 사장님이시죠?”
“예, 그렇습니다.”
“지원서에 보니까 여러 개 기업을 운영하시네요.”
“매출 천억은 넘지 못합니다.”
“얼마나 하십니까?”
“제일 큰 회사가 700억 정도 합니다.”
“아이고, 그러시면 아주 훌륭하십니다. 상장기업입니까?”
“상장은 아직 못했습니다.”
“매출 700억이니까 다트(금감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다 뜨겠네요.”
“예, 그렇습니다.”
“정책 대학원은 정부 인사나 판검사들도 오지만 사장님 같은 기업인들이 많이 와야 합니다. 국민들의 제일 관심사는 경제 아닙니까? 정책도 기업인의 머리에서 많이 나와야 합니다.”
“네.”
“됐습니다. 돌아가시면 합격여부를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면접을 하는 교수는 특별히 출신학교 같은 건 묻지 않았다.
밖에 나오니 김영진 변호사가 와 있었다.
“끝났어? 뭘 물어보냐?”
“뭐 별거 안 묻던데? 몇 마디 안하고 그냥 가라고 하네. 합격여부는 문자로 알려준다고 했어.
“그래? 서류심사에 합격했으면 면접은 그냥 통과돼. 일 년간 나하고 공부나 하자.”
구건호가 밖으로 나왔다.
엄찬호는 차 안에서 신나게 자고 있었다. 입까지 벌리고 코까지 골았다.
“야, 가자!”
“어? 사장님. 공부 다 하셨어요?”
“다했지.”
“근데 벌써 끝났어요?”
“나, 아까보다는 얼굴이 더 지성적으로 보이지 않니?”
“에이, 그대로네요.”
“그럼 공부가 부족한 모양이다.”
“앞으로 여기 계속 옵니까?”
“일주일에 저녁때 두 번 와. 정책대학원에 오늘 면접 봤어.”
“그럼, 특근수당 달아주겠네요.”
“당연하지. 저녁도 너랑 나랑 같이 먹어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모실가요?”
“신사동 빌딩으로 가자.”
일요일이 되었다.
구건호는 이번엔 배낭을 챙겼다. 렌드로버를 직접 운전하며 한성여대역앞 스타벅스 부근까지 왔다. 구건호는 슈퍼에서 생수와 캔맥주까지 샀다.
스타벅스에서 김영은을 기다리는 구건호는 초조했다.
“오늘도 나타나려나?”
김영은은 10시가 조금 넘어서 나타났다. 복장은 지난번과 같은 복장이었다. 구건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뜨듯한 커피 마시고 갈까요?”
“마시면서 가지요.”
구건호와 김영은은 커피를 마시면서 천천히 경신고등학교 쪽으로 올라갔다.
“한양 도성 성곽 돌담이 위에 있는 돌하고 아래에 있는 돌하고 색깔이 틀리네요.”
“아래에 있는 돌은 조선시대부터 있던 돌이고 위에 있는 하얀 돌은 현대에 와서 다시 쌓은 것들입니다.”
“오, 그렇군요.”
구건호는 한번 왔던 경험이 있어서 오늘은 헉헉대지 않고 올라갔다. 꼭대기까지 올라가 잠시 벤치에 앉았다. 구건호가 맥주 캔을 주었다.
“하나씩 마시고 가지요.”
김영은은 구건호가 준 맥주를 자기 등산용 가방에 넣었다.“
“나중에 식사하면서 먹지요.”
둘레길 걷기를 마친 구건호와 김영은은 스타벅스 쪽으로 내려왔다. 오늘은 길상사를 들리지 않았다.
“점심 식사 하시죠.”
“그냥 집에 가서 먹지요.”
“아닙니다. 이 동네 맛집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구건호는 김영은을 태우고 다시 길상사 쪽으로 갔다.
“이쪽은 반대방향 아닙니까?”
“인터넷에서 보았어요. 좋은 한식당이 있다고 합니다.”
성북동의 집들은 웅장했다. 재벌들이 많이 산다는 동네는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없었다.
김영은이 창밖을 열심히 내다보았다.
구건호는 삼청각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여기도 길상사의 대원각처럼 박정희 시대 때의 유명한 요정이었다. 지금은 재단법인 세종문화회관에서 복합 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여기가 삼청각입니다. 유명한 요정이 있던 곳이지요. 절은 아니고 음식점입니다.”
“이런 집은 비싸겠는데요?”
구건호는 음식이나 옷을 사는 데는 값의 고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정식을 파는 삼청각의 한식당은 12시부터 문을 연다고 하였다. 구건호는 김영은과 함께 한식당 문이 열릴 때 까지 경내에 있는 취한당과 동백헌 등을 구경하고 다시 한식당으로 갔다. 한식당의 문이 열려져 있었다. 구건호는 코스요리를 시켰다.
“한식도 코스 요리가 있습니까?”
김영은이 물었다.
음식은 정갈하게 나왔다. 둘은 경치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서먹서먹한 관계라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밥만 먹었다.
식사후 구건호가 경내를 한번 더 보고 가자고 제안했다.
구건호가 유하정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김영은이 따라왔다.
“햇볕이 참 따듯하네요. 잠깐 여기 앉았다 가지요.”
구건호가 돌 의자에 앉자. 김영은도 돌 의자에 앉았다. 구건호가 캔 맥주를 꺼내 김영은에게 주었다. 아예 따서 주었다.
“마시고 가요. 가방 속에 있으니 무거워요.”
김영은이 자기 가방 속에 있던 캔맥주를 꺼내 구건호에게 다시 주었다. 구건호도 맥주의 뚜껑을 땄다. 구건호가 맥주를 마시며 김영은에게 물었다.
“김영은씨는 배우자감으로 어떤 남자를 원하세요?”
김영은이 한참있다가 대답했다.
“돈이 많은 사람이요.”
구건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사람을 잘못 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