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하늘의 인연 (1)
(215)
구건호는 아침에 모리 에이꼬와 함께 일본 라멘을 끓여 먹었다.
모리 에이꼬는 공연 준비 때문에 나가 봐야 한다고 했다. 이번 행사는 동경의 문화회관에서 하는 공연이므로 비중 있는 행사고 자기의 위치를 다지는데 꼭 거쳐야할 공연이라고 했다.
“오빠가 자주 못 와 미안하다. 사업이 너무 바빠서 그렇구나.”
“괜찮아. 마음만 있으면 돼.”
“내 마음은 항상 너에게 있다. 그리고 이건 공연 축하금이다. 넣어 둬라.”
모리 에이꼬가 쓸쓸히 웃으면서 구건호가 준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나 이제 나가봐야 돼. 오빠도 오늘 간다고 그랬지?”
“그래 너 못보고 갈 것 같구나.”
구건호는 모리에이꼬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오빠, 건강해!”
“그래, 너도!”
“이따 갈 때 불 잘 끄고 나가.”
“그래.”
구건호가 손을 흔들어주자 모리 에이꼬도 오른 손을 흔들어주고 나갔다.
구건호는 몸이 늘어져 나가기가 싫었다.
출국 비행기는 저녁 시간대이므로 다시 모리 에이꼬의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잤다.
12시쯤 되어서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아카사카 한식당의 최지연 사장 전화였다.
“구사장님, 일본에 오셨다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모리 에이꼬 공연 보러 왔었습니다.”
“공연 보셨지요?”
“예, 봤습니다.”
“깜찍하게 잘 하죠? 모리 에이꼬가 거기서 제일 어려요. 동경 문화회관 무대에 설 정도면 대단한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일본 사람들도 도꾜 분까 가이깐 (동경 문화회관)에서 공연했다고 하면 알아줘요.”
“하하, 그래요?”
“그리고 세가와 준꼬한테서 전화 왔어요.”
“세가와 준꼬? 신쥬꾸 요정의 마마상 말입니까?”
“고맙다고 하네요. 구사장님께 직접 전화를 하고 싶어도 말이 안통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나한테 전해 달라고 했어요.”
“고마울 일도 없는데요?”
“고맙지요. 지금 모리 에이꼬가 경제적 안정 위에서 예술 활동 하는 것도 모두 구사장님 덕분 아닙니까?
“별로 지원해 준거도 없는데, 허허.”
“우리 집은 안 들리실 거예요? 요즘 신문에 보니까 지에이치 갤러리에서 좋은 전시회 많이 하던데. 일본 쪽 하고는 안 해요?”
“일본에 인맥이 없어서요.”
“아이고, 사장님. 이 최지연 인맥 우습 게 보지 말아요.”
“그건 아는데 미술계 쪽이라서요..”
“미술계 쪽에도 아는 사람 없을 줄 알아요? 한 사람 보내줄게요.“
“그렇다면 고맙습니다.”
“오늘 한국 들어가세요?”
“예, 5시 비행기입니다.”
“어머, 그럼 지금 공항에 가셔야겠네요.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고맙습니다. 다음에 뵙죠.”
구건호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엄찬호에게 전화가 왔다.
“사장님이세요? 공항에 도착하셨어요?”
“어, 김포공항이다.”
“제가 도착장 앞으로 지금 갈게요. 주차장에 있어요.”
“차 가지고 왔냐?”
“예, 거기로 갈게요.”
엄찬호는 구건호가 왕복표 예매한 것을 알고 도착시간에 맞추어 차를 가지고 나온 모양이었다.
“짜식,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왔네.”
구건호가 도착장으로 오니 벤트리 승용차가 비상등을 번쩍이며 서 있었다. 구건호는 차에 올라탔다.
“일요일인데 쉬지 않고 나왔구나.”
“출장 갔다 오시는데 모셔야지요?”
구건호는 엄찬호의 출장이라는 소리에 가슴이 좀 뜨끔하기는 하였다. 일본에 가서 공연보고 모리 에이꼬랑 놀고 와서 그랬다.“
“어디로 모실가요?”
“타워팰리스로 가자.”
기사를 두고 다니니 편하기는 했다. 오늘 같은 날도 약간은 피곤한데 기사가 차를 가지고 오니 편했다. 사실 김포공항에서 타워팰리스로 오려면 가까운 거리도 아니어서 부담이 있었고 리무진 버스도 오래 기다려야만 했었다.
구건호는 신사동 빌딩으로 출근하여 밀린 전표 결재를 하고 아래층 갤러리로 내려갔다. 한국 작가의 수채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작가와 작가의 친지인 듯한 사람들 서넛이 선채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전이라 그런지 관람객은 별로 없어 한산하였다.
이들은 구건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흠, 잘 그렸네.”
구건호는 프랑스 화가 마리옹 킨스키가 그린 그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한국 무명 작가가 그린 수채화는 알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언론은 프랑스 작가전은 대대적인 보도 기사를 써 주었는데 이 무명작가는 언론에서 한 줄도 다루어 주지 않았다.
구건호는 그림을 한 점 사주고 싶었다. 황금빛 벌판에서 벼가 익어가는 석양의 모습을 한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누가 예약했나요?”
차를 마시던 여자가 황급히 구건호 쪽으로 다가왔다.
“아닙니다.”
“내가 예약하지요. 작품 가격이 얼마입니까?”
“소품이라 60만원입니다.”
구건호는 작품 구입신청서에 작품 배달 주소 등을 써 주었다.
“작품은 전시회 끝나고 배송해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날 내가 사람을 보내지요. 그 사람한테 주면 됩니다.”
작품은 소품이라 승용차 안에도 들어갈 것 같았다. 엄찬호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될 것 같았다.
구건호가 자기 방으로 올라와 신문을 보고 있는데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입원했어.”
“엄마가? 왜?”
“넘어져서 못 일어나. 허리를 다친 모양이야.”
“그래?”
“지금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어.”
“서울대 병원? 인천 길 병원이 아니고?”
“거기 척추 골절을 잘 보는 의사가 있데.”
“척추골절?”
“그런 모양이야. 또 엄마가 아는 사람이 수간호원으로 있어서 그리로 가셨어. 그래야 병실도 좋은데 잡아주고 의료비 바가지 안 쓴다고 해서 그리로 가셨어.”
“허, 참. 그럼 여기 대학로 앞에 있는 서울대학 병원인가?”
“그래, 너 퇴근하다가 한번 들려봐라.”
“척추 골절이 오래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골다공증이 심한 모양이야.”
“그래?”
“에효, 늙으면 할 수 없지 뭐.”
구건호는 오후에 대충 일을 끝내고 서울대 병원엘 갔다. 6명이 있는 다인실이었다. 구건호는 병실을 옮겨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병실로 들어갔다. 다른 환자들은 잡담도 하고 TV도 보는데 엄마만 유독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마, 많이 아파?”
“건호 왔냐? 바쁜데 왜 왔어?”
“허리가 많이 아파?”
“허리도 아프지만 지금 관장을 못해서 그래.”
“관장?”
“사흘째 변을 못보고 있어. 허리도 아픈데 항문이 막혔는지 변이 나오려다 막혀서 밥도 못 먹고 있어. 아구구, 아구구.”
마침 링겔 주사액을 체크하러 간호원이 왔다.
“환자가 관장을 해달라는데요?”
“저희는 못해요. 의사 선생님 오셔야 되요.”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나요?”
“예, 말씀 드렸습니다.”
엄마는 고통스런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까 의사선생님 회진 나왔을 때 이야기할 걸 잘못했어. 아구구.”
구건호는 안되겠다 싶어 의사를 찾았다.
간호실에서는 극히 사무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의사 선생님 지금 회진 가셔서 안돌아오셨어요.”
간호실의 간호원은 이 말만 하고 컴퓨터를 보며 자기 일만 했다.
엄마는 계속 고통스러워했다.
엄마의 신음 소리를 들을 때 마다 구건호도 고통스러웠다. 엄마가 소리를 지르자 간호원 두사람이 뛰어왔다.
“아줌마, 잠깐 기다리세요. 의사 선생님 곧 오셔요.”
구건호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는 몸을 떨기까지 했다. 하긴 변이 막 나오는데 항문이 막혔다면 구건호가 생각하기에 자신도 엄청 괴로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왔다.
의사는 의외로 젊은 여성이었다. 20대 후반쯤 되는 하얀 피부의 여성이었다. 의사는 흰 가운의 주머니 속에서 작은 플래시를 꺼냈다. 그리고 엄마의 눈을 살피고 입안을 살폈다.
“하부 복통은 없지요?”
“없습니다.”
“구토가 나오려고 하는 증상은 없지요?”
“없습니다. 아구구, 아구구.”
간호원 두사람도 얼굴을 찡그리고 서 있었다.
젊은 의사는 간호원을 향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린스 에너마(Enema: 관장액) 준비하세요.”
간호원 두 사람이 나가더니 한사람은 세수 대야 같은 것을 들고 오고 한사람은 무슨 약병 같은 것을 들고 왔다. 젊은 의사가 다시 와서 고무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보호자 분은 잠시 자리 좀 비켜주세요. 냄새도 많이 나고 오물이 튈 수도 있습니다.”
젊은 의사는 고무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썼다. 그리고 엄미의 항문을 벗기고 관장액을 투여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커튼이 벗겨졌다. 구건호가 호기심에서 목을 빼고 벗겨진 커튼 사이로 관장하는 장면을 구경했다.
“악, 악!”
“조금만 참으세요!”
의사는 놀랍게도 고무장갑을 낀 자기 손을 엄마의 항문에 쑤셔 넣었다. 엄마의 비명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세수대야 속으로 관장액과 함께 엄마의 인분이 쏟아져 나왔다. 냄새가 진동을 했다.
구건호는 이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아, 의사들이 저런 일도 하는구나!”
구건호는 의사가 자기의 손가락을 환자의 냄새나는 항문에 넣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이고, 살았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는 간호원과 함께 약솜으로 엄마의 항문을 씻어주었다. 그리고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누워만 계셔서 변이 굳어져 그렇습니다. 이제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의사의 웃는 모습에 구건호는 잠시 얼어버리고 말았다.
“고, 고맙습니다.“
구건호가 90도 각도로 의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최근 들어 구건호가 인사만 받았지 남에게 이렇게 깊숙이 허리 굽혀 인사하긴 처음이었다.
의사가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주치의 선생님이 내일 척추 성형 수술을 하십니다. 골다공증을 많이 염려했는데 골밀도 검사에서는 걱정할 수준은 아닙니다. 수술후 약 꾸준히 드시면 완쾌하실 수 있습니다.”
젊은 의사는 오물에 더렵혀진 고무장갑을 들고 뒤돌아 나갔다. 자세하나 흔들림 없이 침착한 걸음 거리였다.
엄마는 사과를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간호원이 약을 가지고 왔다.
“의사선생님이 저녁은 마음대로 드셔도 되지만 오늘밤 10시부터는 아무것도 드시면 안 된다고 합니다. 내일 수술하기 때문에 그렇답니다.
“고마워요, 아가씨. 나 때문에 고생들 했어요.”
“엄마, 골다공증 염려할 것 없데. 내일 수술하기만 하면 낫는데.”
“그래 고맙다. 너 피곤할 텐데 이젠 들어가 봐라.”
“원무과에 내려가서 병실 옮겨드리라고 할게요.”
“여기도 괜찮은데?”
“좋은 병실 옮겨드릴 테니 휴양 온 셈 치고 며칠 푹 쉬었다 가세요.”
구건호는 원무과에 내려가 엄마의 병실을 일인실로 옮기는 수속을 밟았다.
원무과에서는 내일 아침에 병실을 옮겨주겠다고 하였다.
구건호는 다시 병실로 올라가 엄마에게 가겠다고 인사를 하였다.
“엄마 병실 옮기는 수속 했으니 내일 일인실로 옮겨줄 거예요.”
“괜찮다고 해도 그러네.”
“엄마, 3억짜리 벤트리 승용차 타고 다니는 아들이 있는데 자기 엄마 6인실 병실에 있다고 하면 남들이 욕해요.”
“아휴, 너한테 미안하기만 하다.”
“이제 배 아픈 건 없지요?”
“없어. 아주 시원해. 그 젊은 의사 참 대단하다. 언제보아도 환자한테 친절해. 인물도 좋으니까 심성도 고운 모양이야.”
구건호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젊은 의사가 생각났다. 참으로 위대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구건호는 그런 여자와 결혼한다면 하고 생각했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서울대 병원 의사라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나같이 지잡대 다녔던 사람하고 어울리겠어? 아무리 내가 돈이 많아도 그건 어렵겠지.”
구건호는 엄찬호가 운전하는 벤틀리 승용차 뒤에서 옅은 한숨 소리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