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중매 (3)
(206)
동경의 아까사카에 있는 뉴오따니 호텔은 400년된 전통 정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구건호와 설빙은 연못의 붉은 난간에서 아래의 물을 바라보았다. 밤이었지만 가로등의 불빛 때문인지 잉어들의 유영을 볼 수 있었다.
“정원이 참 아름답네요.”
저 쪽으러 가 봐요.
구건호는 설빙의 손을 잡았다. 배우라서 그런지 키는 큰데 손은 작았다. 설빙은 손을 빼지 않았다.
설빙은 중매 들어온 사람이 구건호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보다는 구건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선배 배우 이미령씨가 한 말이 귀에 아직도 선했다.
[인기 있을 때 시집가. 인기는 오래 못가. 어느 날 갑자기 꺼지는 수가 있어. 재벌가? 그 질식할 것 같은 덴 뭐 하러 들어가니? 돈이야 우리도 있을 만치 있잖아? 구건호라는 사람 얼마나 대단하니? 자수성가한 사람 아니냐? 인성도 그만한 사람 없다더라. 나이도 그만하면 적당하다. 너 연예인 생활 계속해도 이해 해줄만한 사람이라더라.]
설빙은 처음 만났을 땐 구건호라는 사람의 신분에 대하여 믿음이 적었었다. 긴가 민가 했는데 믿을 수 있는 선배 탤런트가 극구 칭찬을 하니 자연히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구건호라는 사람의 인상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되었다. 인물로 따지면 E그룹의 아들 보다는 백번 나았다.
설빙은 백 속에서 선그라스를 꺼냈다.
“밤이라 누가 보는 사람도 없을 텐데....”
“주의를 하는 것은 좋지요. 괜한 소문을 만들어내면 시달리니까요.
구건호는 설빙의 손을 잡고 석심정을 지나 초월정이라는 곳으로 왔다.
“석심정은 음식점인 것 같고 초월정은 카페인 것 같아요.”
“그러네요. 석심정 앞에 지나갈 땐 음식 냄새가 나는 듯 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네요.”
구건호와 설빙은 초월정의 빈 의자에 앉았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석심정이나 초월정의 불은 꺼져있었다. 설빙은 갑갑한지 안경을 벗었다.
“미인의 얼굴을 선그라스로 가리니 안타깝네요.”
설빙이 웃었다.
초월정의 야외용 빈 테이블 위에는 길고 작은 꽃병이 있었다. 장식용인 것 같았다. 긴 꽃병 속에는 국화꽃 한가지씩만 꽂혀 있었다. 화병의 입구가 작아 꽃을 한 송이 밖에 꽂지를 못한 것 같았다. 구건호가 병속의 국화를 뽑았다.
“영원히 사랑합니다.”
구건호가 꽃을 주자 설빙이 깔깔대며 받았다.
“사업가답지 않게 센스가 있네요.”
“이제 꽃을 받았으니 내 마음을 허락한 겁니다.”
구건호가 설빙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어머!”
설빙이 놀란 눈으로 구건호를 쳐다보았다.
설빙은 받았던 국화꽃을 다시 병에 가만히 꽂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밤이 늦었네요. 이제 그만 갈게요.”
“동경의 밤은 이제부터인 것 같은데요?”
“내일 아침에 스탭들과 행동을 같이해야 돼요.”
그럼 저기 벤치에 조금만 앉았다 가요. 신쥬꾸의 프린스 호텔까지는 차를 잡아줄게요.“
구건호와 설빙은 연못이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구건호는 설빙을 가만히 껴 앉았다. 설빙은 피곤한지 구건호에게 몸을 기대었다.
“설빙씨는 지금 부모님이랑 같이 있어요?”
“부모님은 방배동 살아요. 저는 청담동에 있고요.”
“방배동? 원래 어렸을 때도 거기 살았어요?”
“네, 저 방배동에 있는 서문여고 나왔잖아요.”
“흠, 맞아. 인터넷에 나온 프로필 보았어요. 서문여고 졸업하고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셨더군요.”
“서문여고 다닐 때 공부는 잘했어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가려고 했는데 떨어졌어요. 그래서 대치동에 있는 입시 학원에 다녔는데 공부도 힘들고 주위에서 연극영화과에 가라고 하도 성화를 해서 들어갔어요.”
“쉽게 포기하셨네요.”
“외교관이 선진국만 다니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빈곤국도 많이 가서 3D업종이라고 말리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부모님에게 연극영화과에 간다니까 좋아하면 가라고 하시고 이모부도 적극 권했어요.”
“부모님은 뭐하셨는데요?”
“방송국 PD출신이었어요. 내 이야기만 묻지 말고 구사장님 이야기도 좀 해봐요.”
“나는 집이 인천이었는데 학교는 부천서 다녔어요. 대학은 언젠가 말했듯이 중국 절강대를 다녔어요.”
“그럼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유학가신 거예요?”
“네? 아, 네...”
구건호는 인서울에 갈 실력이 안 되어 지잡대를 다니다가 사이버대학을 졸업한건 이야기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인천에 계시겠네요.”
“부모님은 인천서 직장생활 하시다가 은퇴했어요. 인천 구월동에 아파트에 살고 있고 나는 강남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살아요.”
“타워팰리스? 어머, 거기 내 친구도 살아요.”
설빙은 한번 말문이 열리자 조물조물 말을 잘 하였다. 도도하게 보였지만 한번 마음을 열자 보통 여자들과 하나도 다르질 않았다. 산책 나온 노부부가 벤치쪽으로 오자 설빙은 얼른 선그라스를 꼈다.
노부부는 한국 관광객인 것 같았다. 부인이 설빙을 힐끗 보더니 한마디 했다.
“일본 여자들은 밤에도 선그라스를 끼는 모양이네.”
설빙이 입을 가리고 웃었고 구건호도 하하 하고 웃었다.
구건호가 다시 설빙을 힘주어 껴안았다. 설빙에게서 화장품 냄새가 은은히 풍겨왔다.
“일본보다는 우리 서울에서 자주 만나요.”
설빙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문자 보낼게요. 우리 빌딩 옥상에 북카페도 있으니 거기도 좋고요. 아니면 신사동 내 사무실도 좋고요. 설빙씨 있는 청담동도 좋아요.”
설빙이 시계를 보았다.
“12시 넘었어요. 이제 가야돼요.”
구건호는 호텔에 부탁하여 콜택시를 불렀다.
구건호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설빙도 콜택시의 유리를 반만 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구건호는 설빙을 보내놓고 후회스러웠다.
“기념이 될 만한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사서 줄걸.”
구건호는 잠자리에 들면서 설빙에게 문자 메세지를 보냈다.
[오늘 고마웠어요. 편히 자요.]
바로 답장이 왔다.
[네, 구사장님도 편히 주무세요.]
아기가 콜콜 자는 만화 이모티콘까지 첨부된 메시지였다. 구건호가 웃으며 다시 문자 메세지를 보냈다.
[구사장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오빠라고 불러요.]
메시지가 다시 왔다.
[오빠, 잘 자요]
구건호는 뭔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 호텔 룸 안에서 ‘야호’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보니 모리 에이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구건호는 꿈같은 동경의 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지에이치 갤러리에서는 중국 청년 전위 작가전이 드디어 열렸다. 신정숙 사장은 역시 마당발이었다. 미술계 인사들의 축하 화분도 많았고 심지어 언론사 사장 화분도 있었고 대학총장 화분도 있었다. 특이하게 절강대 상경대학 교수 왕지엔의 화분과 중국 상해시 인민정부 문화 광파영시 국장 리스캉의 화분도 있었다.
“광파영시(廣波映視)가 뭐야?”
그림을 구경하러온 강남 아줌마들이 깔깔대고 웃으며 리스캉이 보내온 화분의 글씨를 사진 찍기도 했다.
전시회 덕분에 북카페의 매상도 덩달아 올라갔다.
“청년 전위 작가전은 투자 가치가 있다고 해서 벌써 10점이 예약되었습니다.”
신정숙 사장의 말에 구건호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림 한 점당 1억 원씩 한다면서요?”
“그림 투자하는 강남 아줌마들이 떴다 하면 하루 수백억이 움직이는 건 보통입니다.”
“그래요?”
구건호는 자기도 돈이 수천억 있지만 그림이 1억짜리라면 사기가 어려웠다. 구건호는 혀를 내둘렀다.
“1억이면 내가 살던 인천이나 아산에선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인데...”
구건호의 부모나 김민혁의 부모는 1억짜리 집에서 평생 살아보질 못했었다. 최근에 자식들 덕에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지만 1억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한 돈들이었다. 대한민국은 부(富)가 너무 한쪽으로 편중화 되어있었다. 아니 전 세계가 그런 것 같았다.
구건호가 멍하니 있는데 신사장이 옆에 와 계속 말을 했다.
“구사장님 갤러리 임대료가 월 500이라고 하셨지요? 반년치 임대료는 걱정 없을 것 같습니다. 호호.”
사람들은 화랑으로 계속 들어왔다. 이걸 안보면 문화인이 아닌 것 같은 생각들이 드는 모양이었다. 비서 오연수는 전시회 기간 동안 지원근무를 나왔다. 입구에서 팜프렛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팜프렛은 공짜가 아니었다. 5천 원씩 파는데도 많이들 가져갔다.
중국에 있는 김민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구사장? 리스캉하고 왕지엔이 보낸 화분 봤지?”
“봤어. 이거 어떻게 보낸 거야.”
“리스캉하고 왕지엔이 보내달라고 돈을 부쳐왔어. 그래서 내가 문재식이 한테 연락을 했지.”
“그랬구나. 여기서 리스캉 화분이 인기다.”
“왜? 화분이 멋진 건가?”
“아니, 광파영시가 뭐냐고 사람들이 호기심이 나는 모양이더라.”
“중국말을 그대로 써서 그렇구나. 상해시 언론 및 방송담당 국장이라고 쓸걸 그랬다.”
“아니, 이게 좋아 더 중국 같잖아?”
“사람은 많이 왔다며?”
“많이 왔어.”
“다행이다. 나는 아방가르드라고 해서 이름이 괴상해 사람들이 안 올 줄 알았다. 신정숙 사장이 역시 안목 있는 사람이네.”
“문화 쪽에서 있던 사람이라 우리하고는 달라.”
김민혁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지금 디욘코리아에서 제품 막 나온다면서 여기 안 보내 줄 거여?”
“조금 더 기다려봐.”
“여기 사논 창고에 쥐들만 왔다 갔다 해.”
“지금 기계장비가 5호기, 6호기가 들어왔는데 8호기 들어오면 보자.”
구건호는 점심시간이 되어 강이사를 갤러리 쪽으로 내려오라고 하였다.
“신사장님, 강이사님 내려온다고 했으니 식사나 하러 가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식사는 해야지요. 오연수씨도 같이 갈까?”
“오연수씨는 저하고 교대로 식사하러 가야됩니다. 화랑에 자리가 비면 안 됩니다.”
강이사가 내려왔다. 강이사는 부대찌개 잘하는 집이 있으니 거길 가자고 하였다. 구건호도 부대찌개가 땡겼다. 신사장은 가까운 곳에 있는 돈가스 집으로 가지고 하였다.
“부대찌게도 좋은데 찌개 종류는 옷에 배요. 오늘 전시장에서 많은 손님 맞는데 음식 냄새가 옷에 배면 안 좋잖아요.”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구건호는 식사하는 곳에서 신사장에게 사무실을 지에이치 빌딩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앞으로 화랑도 관리해야 하는데 마포에서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하기가 불편하지 않습니까?”
“아직은 지에이치 미디어가 힘이 없습니다. 출판만 해서는 강남 사무실의 임대료를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중국 청년 전위 작가전이 성공한 것 같지만 두 번째, 세 번째도 성공하리란 장담은 어렵잖아요. 일단은 두 번째 기획하는 것이 성공하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나는 지에이치 미디어를 종합 컨텐츠 회사로 키우고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종합 컨텐츠요?”
“리스캉은 자꾸 나보고 중국 드라마 제작사를 인수하라고 합니다.”
“드라마요?‘
신정숙 사장은 복잡한 표정이 되어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밥을 먹고 있는 도중에 문자가 왔다는 알림 톡이 울렸다.
[내릴 저녁 화랑이 문 닫을 무렵 잠깐 지에이치 갤러리를 들렸다 가겠습니다. 바빠서 오빠를 뵙지 못하고 갑니다. 설빙.]
“전시회가 저녁 7시까지라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내일 저녁 7시경 탤런트 설빙이 전시회장을 올 겁니다.”
“어머나 그래요? 사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설빙 소속사에 아는 분 계셔요?”
”예, 아는 사람 있습니다. 설빙은 노출을 꺼려 선그라스를 끼고 올 겁니다. 굳이 아는 체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