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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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구건호는 몇 일만에 천안시 직산읍에 있는 지에이치 모빌에 출근했다. 직원들이 구건호를 보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구건호가 사장실에 들어가자 임원들이 보고서를 들고 왔다. 구건호는 임원들이 올리는 보고서만 결재했고 부장 이하 중간 관리자들의 결재는 하지 않았다. 중간 관리자들의 결재는 송사장이 전결했다.
“다들 오셨는데 차나 한잔 하시지요.”
구건호는 비서 박희정씨에게 차를 주문했다. 비서는 녹차 6잔을 가지고 왔다. 송장환 사장이 먼저 말했다.
“S기업의 신규 오더 5건은 모두 개발 완료해 납품되고 있습니다. 이 5건 중 주문량이 많은 창원과 울산공장 납품의 원재료는 디욘코리아 것으로 승인받아 납품합니다.”
“디욘코리아 원재료는 얼마나 씁니까?”
“월 35톤 정도 합니다.”
“톤당 480만원이라고 하니 월간 1억 6천 8백이네요. 납품액이 말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숫자의 계산 만큼은 구건호의 능력을 따라 오는 사람이 없었다. 구건호는 경리 출신이기도 하지만 암산 능력은 천부적 자질이 있었다. 공부를 잘했던 사람도 아니고 일류대학을 다닌 사람은 아니지만 숫자 계산 능력은 참으로 탁월했다. 이것이 아마도 오늘날 그가 부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기도 하였다.
상임감사가 부채 감소현황을 발표했고 총무이사는 생산량 증가로 생산직 사원 10명을 모집한다는 말을 했다.
“박종석 이사, 현장에 10명이 필요한가?”
“필요합니다. 지금 야근도 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장은 산업연구원에서 발표회를 갖는다고 하였다.
“지난번 특허 낸 것에 대한 발표입니까?”
“그렇습니다.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기회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교다(行田)기업에서 도면이 하나 왔습니다. 오토바이에 들어가는 부품인데 우리가 개발할 수 있느냐고 해서 지금 개발 중에 있습니다.”
“교다기업요? 거기는 어떻게 해서 알게 된 겁니까?”
“디욘코리아의 부사장 애덤 캐슬러가 소개 했습니다”
“애덤 캐슬러요? 애덤 캐슬러는 일본통이 아니고 맥시코 합자사 사장 출신인데 발이 넓네요.”
송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고요. 디욘제팬의 리차드 아미엘 사장이 소개한 겁니다. 아미엘이 어떻게 알아가지고 애덤 캐슬러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일본지역은 거리가 가까우니 해 볼만 합니다. 하지만 주문량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작더라도 주문 받아 놓으면 연줄로 또 다른 일감이 생길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습니다.”
“다른 말씀 없으시면 회의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총무이사님은 저 좀 보시죠.”
다른 임원들이 모두 나가고 총무이사만 남았다.
“법인 명의로 골프회원권하고 콘도는 샀는가요?”
“골프회원권은 아직 안사고 콘도만 3구좌 샀습니다. 골프회원권 구입 품의서는 상임감사님이 홀딩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는 모양이네요.”
“송사장님은 영업을 위해서 사야 된다고 하고 상임감사님은 단기차입금을 상환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의견 조정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흠.”
“최종적으로 구사장님이 결정하시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구사장님은 여러 개 회사를 맡고 계신 분인데 골치 아픈 판단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지금 엉거주춤한 상태입니다.”
“콘도는 장기 근속자들에게 혜택 돌아가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오늘 품의서 올리겠습니다.”
“내가 없더라도 송사장님 결재 맡으면 바로 시행하세요.”
“알겠습니다.”
“노조와 임금협상은 잘 하고 있지요?”
“예, 노사 양측 임금 협상 위원 상견례 끝났고 2차 협상에 들어갑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구건호는 오후가 되어 디욘코리아로 넘어갔다.
윤상무가 들어와 보고를 했다.
“생산부 신입사원 2명과 공무과 신입사원이 1명이 채용되어 일 하고 있습니다. 사장님이 안 계셔서 인사 못 드렸습니다. 올라오라고 할 가요?”
“됐습니다. 김전무님하고 윤상무님 보았으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포터를 한 대 사야겠습니다.”
“포터요?”
“판매량이 늘어나 택배차량 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사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기사도 채용해야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물류팀이란 부서를 어차피 만들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판매량에 따라 포터는 2대, 3대 늘어나겠지요.”
“김전무는 어디 갔어요?”
“만동전장에 들어갔습니다. 거기 구매담당 임원하고 미팅이 있는 모양입니다. 제품 샘플하고 성적서 가지고 간 것 보니까 영업 때문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흠, 알겠습니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 김전무가 돌아왔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만동전장에 들어갔던 일은 잘 되었습니까?”
“만동전장에서 프로텍터 새로운 개발품이 있다고 해서 들어갔다 왔습니다.”
“그건 원재료 구매가 아니고 성형제품 아닙니까?”
“그래서 지에이치 모빌의 송사장님한테 연결시키고 오는 길입니다.”
“송사장님이 하겠답니까?”
“구매량도 많지 않고 공정도 손이 많이 가서 하청을 주겠답니다. 단 납품은 모빌로 하는 것이지요.”
“구매량이 얼마나 되어 그렇습니까?”
“월 2천인데 와이에스 테크에 하청 주기로 했습니다."
"와이에스테크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와이에스 테크는 우리 원재료를 쓰는 것이지요.”
“알겠습니다. 홈페이지는 만들었습니까?”
“만들고 있습니다. 지에이치 미디어의 오민숙 팀장이 여기 와서 공장 구경하고 사진도 다 찍어 갔습니다. 시안을 보내왔는데 빠진 것이 있어서 다시 보충하고 있습니다.”
“흠,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퇴근을 하다가 차 안에서 와이에스 테크의 박영식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입니까? 박영식이요.”
와이에스 테크는 한때 구건호가 경리직으로 근무했던 회사다. 하지만 지금은 갑을 관계가 명확한 하청업체이므로 박영식 사장은 구건호에게 깎듯이 대했다.
구건호가 오늘날 수천억의 재산을 형성하는 데는 와이에스 테크에 있을 때 마련한 종자돈이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구건호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와이에스 테크에 일감을 많이 몰아주기도 하였다. 또 와이에스 테크의 사장을 형님이라고 불러주기도 하였다.
“아, 형님 아니십니까?”
“아우님 덕택으로 만동전장에 들어가는 프로텍타를 우리가 만들기로 했네. 너무 고마워서
말을 못하겠네.“
“별 말씀 다하십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송장환 사장이 결정한 것입니다.”
“송사장이 그냥 결정했겠소? 모두 아우님이 나와 가깝다는걸 알고 그런 거지.”
“와이에스 테크도 요즘 괜찮지요?”
“아우님 덕택으로 우리도 월 매출이 100억을 바라보고 있으니 요즘 내가 밥맛이 나고 그러네. 같이 한번 식사라도 할 기회 좀 주시게나.”
“하하,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와이에스 테크에 면접 보러 올 때가 생각났다.
“양주시에 있는 방일가스에 있다가 면접 보러 오라는 통지를 받고 어찌나 흥분되었던지. 또 합격했다고 입사 서류 가져 오라는 경리부장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던가? 경리부장도 그때 출산한 아이가 4살이나 5살은 되었겠는데?”
구건호는 방일가스를 가보고 싶었다.
“방일가스는 지금도 있을까? 그때 두 부부가 있었는데 지금도 하는 가 몰라. 내일은 오전에 출근했다가 거기나 한번 가보자. 요즘 길도 좋아 판교에서 구리 쪽으로 빠지면 양주 가는 길이 나오니까 말이야.”
다음날 구건호는 아침에 회사에 잠깐 들렸다가 양주로 출발했다. 두 시간 넘게 차를 타고 달렸지만 옛날 근무했던 곳을 더듬어 본다고 생각하니 가벼운 흥분도 일어났다.
“여기가 의정부로구나. 저 안쪽에 있는 전산학원에서 밤늦게 까지 내가 전산 회계를 배웠지. 간판이 보이는걸 보니 지금도 학원은 하는 모양이네. 국비지원으로 교육을 받았었지.”
구건호는 차를 양주시청에서 백석 쪽으로 몰았다.
“광적면 간판이 보이네.”
구건호가 살던 원름 건물은 그대로 있었다. 그때는 신축 건물이라 밝았는데 지금 보니 우중충 하였다.
“저 앞에 있는 편의점도 그대로네. 저기서 밤바다 소주와 새우깡을 사들고 얼마나 울었었나. 고생 자체보다도 희망이 없다는데 더 좌절했지.”
구건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구건호는 드럼통 세척공과 분쇄공으로 일했던 동일테크도 가 보았다. 산더미 같은 드럼통이 야적되어 있었고 아직도 지게차가 왕왕 거리며 왔다 갔다 했다.
“저 드럼통을 내가 화공약품 섞어가며 하루에 150개를 닦았지.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힘이 들어 손목과 어깨에 날마다 파스를 붙였는데 동창 조원철이나 이석호가 저 일을 해보았을까? 지에이치 모빌의 임원들이나 디욘코리아의 임원들이 저 일을 해 보았을까?”
구건호는 만감이 교차했다.
청담동 이회장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자네의 그때 고생이 오늘의 자네를 만든 거네.]
구건호는 안으로 들어가 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광적면으로 나왔다. 면사무소 부근에 화장품 가게가 있어 여성용 화장품 세트와 남성용 화장품 세트를 하나씩 샀다. 그리고 은현면의 방일가스 찾아갔다.
방일가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기 콘테이너 박스 사무실에서 내가 처음 경리 일을 보았는데 없어졌네.”
고추밭에서 일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기 방일가스는 어디로 갔어요?”
“방일가스 없어졌어요. 방일가스 사장님은 저기 대로변에서 철물점 해요.”
“무슨 철물점이지요.”
“은현 철물점이요. 멋쟁이 신사 양반이 방일가스를 찾네.”
구건호가 차를 세우고 철물점 안을 보았다. 쪽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사모님이었다.
“많이 늙으셨네.”
구건호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사모님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무엇을 찾습니까?”
아마 물건을 사로 온 사람인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예? 누구신데요?”
사모님은 구건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전에 방일가스에 근무했던 구건호입니다.”
사모님은 구건호를 한참 쳐다보다가 놀랐다.
“어머! 시상에! 시상에! 이게 누구여! 구주임 아니여?”
구건호는 오래간만에 구주임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모님은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여보! 여보! 빨리 나와 봐요!”
“왜,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나, 지금 이거 고치고 있잖아!”
“구주임 왔어요! 구주임!”
“구주임이 누구야?”
사장이 면장갑을 낀 채 나왔다.
“안녕하세요?”
구건호가 인사를 하자 사장은 눈을 껌뻑거리며 쳐다보았다.
“당신 몰라요? 구주임에요, 구주임.”
“오, 구주임! 야, 몰라보겠는데? 신수가 훤한 걸 보니 돈 좀 만지는 모양인데? 그래 지금 어디 있나?”
“그냥 지나가는 길에 들렸어요. 두 분 건강하신 모습 보니 좋네요.”
“지금 인천에 있나? 그때 아버님이 아프셔서 간다고 했지 아마?”
“지금은 딴 데 있어요. 그런데 방일가스는 그만 두신 모양이네요.”
“응, 가스는 찾는 사람이 줄어들어 접었어. 철물점 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해.”
“두 분 요새 싸우지 않으세요?”
“여편네가 아니고 웬수네. 웬수.”
“하이고, 누가 할 소릴! 나니까 붙어서 살지, 딴 여자 같으면 벌써 고무신 거꾸로 신었어!”
“하하, 여전하시네요. 오다가 광적면에서 화장품 선물세트 하나씩 샀어요. 그때 저한테 잘해주셔서 지금도 사장님하고 사모님 생각이 가끔 나요.”
“힉! 이 비싼 걸 사왔네. 내가 시집와서 30년 동안 저 인간한테 한 번도 이런 걸 받아본 적이 없는데 사왔네.”
“하하, 두 분 싸우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구건호는 손을 흔들며 가게를 뛰어 나왔다. 뒤에서 사장님과 사모님의 소리가 들렸다.
“구주임, 고맙소!”
“구주임, 고마워요!”
구건호는 차를 몰고 나오면서 기분이 유쾌했다.
“여전히 심성은 좋은 분들이네. 가끔 싸워서 그렇지.”